한국 최고의 기업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영결식과 발인이 지난 10월 28일 오전 엄수됐다. 영결식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가족장으로 진행됐다. 이후 이건희 회장과 유족, 친지 등을 태운 운구 행렬은 생전 이 회장의 발자취가 담긴 공간을 돌며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혁신의 거목, 하늘의 별이 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쓰러진 뒤, 순천향대학 서울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돼 VIP 병실에서 6년 넘게 치료를 받아왔다. 자가 호흡을 하며 재활에 전념하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지난 10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1942년에 태어난 이 회장은 부친 이병철 삼성 창업주 별세 이후 장자 승계 원칙을 깨고 1987년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이후 혁신을 거듭하며 대한민국 경제를 한 단계 올려놓았다. 메모리 반도체 1위와 스마트폰의 위상은 이 회장의 과감한 판단과 결단에서 비롯됐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초장기인 1983년 무렵, 삼성전자는 D램 개발 경쟁이 붙었을 때 과감하게 새로운 기술 공법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더 쉬운 모델이 경쟁력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 회장의 결정은 대성공으로 이어졌고, 다른 방식을 선택했던 일본 경쟁업체는 삼성전자에 밀려났다. 결국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며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를 지키게 됐다.
휴대전화도 이 회장의 혁신이 주효했다. 기존 모토로라가 처음 휴대전화를 내놓은 후 휴대전화의 통화(SEND)와 종료(END) 버튼은 일괄적으로 숫자 키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경영진에게 "가장 많이 쓰는 키가 통화와 종료 키인데, 이게 아래쪽에 있으면 한 손으로 전화를 받거나 끊기가 불편하다"며 "두 키를 위로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지시했다. '이건희 폰'으로 불리는 휴대전화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94년 제품 출시를 서두른 탓에 애니콜 휴대전화가 불량률 11.8%까지 치솟자 "불량은 암"이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그 후 직접 "전 신문에 광고를 내고 불량 제품 교환을 약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회수된 15만 대의 휴대전화를 삼성전자 구미공장 운동장에 쌓게 한 뒤 그는 임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산산조각을 내고 불태우게 했다. 그 유명한 '애니콜 화형식'이었는데 당시 잿더미로 변한 휴대전화는 150억원어치의 분량. 효과는 컸다.
이후 삼성 휴대전화의 불량률이 떨어졌고, 이 사건은 '애니콜'과 '갤럭시'로 이어진 삼성전자 휴대전화가 높은 완성도 속에 세계에서 애플과 경쟁하는 브랜드로 남게 했다. '신경영'으로 대표되는 이건희 회장의 혁신 경영은 삼성그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를 한 단계 더 경쟁력 있는 모델로 발전시켰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성은 이 회장 체제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매출은 1987년 취임 당시 9조 9,000억원에서 2014년 400조원으로 무려 40배나 늘었다. 직원 수는 1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늘었다. 협력 업체까지 감안하면 600여만 명이 삼성그룹과 관련해 일하고 있다.
단일 회사가 전체 법인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나 될 정도로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독보적이다. 이를 이룬 것이 이건희 회장.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이 회장이 이룩한 성과는 창업보다 더 빛나는 수성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그룹이 먼저 혁신의 모델을 보여주면 그것을 다른 대기업들도 참고하고 따라 한 덕분에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며 "이건희 회장이 한국 경제에 남긴 DNA는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 엄청나다"고 평가했다.
끊이지 않았던 조문의 발길
삼성그룹 측은 일요일이었던 지난 10월 25일 오전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는 내용을 삼성그룹 임직원과 언론에 알렸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에 빈소를 마련한 유가족은 조화와 조문을 사양하고 검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밝혔지만, 정·재계 주요 인사들의 조문은 계속됐다.
청와대 노영민 비서실장과 이호승 경제수석이 빈소를 찾았고, 문재인 대통령은 노영민 비서실장을 통해 "한국 재계의 상징인 이건희 회장의 별세를 깊이 애도하며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는 구두 메시지를 유족들에게 전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빈소를 찾아 이건희 회장의 별세를 애도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10월 26일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기자들을 만나 "이건희 회장은 2세 경영인으로서 정말 놀라운 업적을 남기신 분"이라고 평가했다. '삼성 저격수'로 불리는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도 장례식장을 찾았고, 심재철 국민의힘 전 의원은 이틀 연속으로 조문하는 등 정치인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 밖에 고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이홍구 전 총리, 정운찬 전 총리, 송철호 울산시장 등도 빈소를 찾았다.
재계 인사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았다.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이는 구광모 LG그룹 회장. 별세 소식이 알려진 직후인 오전 10시 38분께 가장 먼저 빈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 회장은 20여 분가량 조문한 뒤 "(이 회장은) 우리나라 첨단산업을 크게 발전시킨 위대한 기업인이자 재계의 큰 어르신"이라며 "재계 어르신들이 오래 계셔서 많은 가르침을 주시면 좋은데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범LG가(家)의 구자열 LS 회장과 구자용 E1 회장,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도 모두 조문했다.
이건희 회장과 생전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10월 25일 곧바로 빈소를 찾았다. 이건희 회장보다 10살이 적지만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진 김승연 회장은 "가장 슬픈 날"이라며 "(고인을) 친형님같이 모셨다"고 안타까워했다. 실제 김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멘토 삼아 경영과 관련된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도 허창수 전경련 회장, 최정우 포스코 회장,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 황각규 롯데지주 이사회 의장, 윤종원 기업은행장,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 김영주 한국무역협회장,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부회장, 지성규 하나은행장 등도 빈소를 찾았다.
허동수 GS칼텍스 명예회장과 아들 허세홍 GS칼텍스 대표는 함께 조문했는데, 이 중 황각규 롯데 이사회 의장과 조현준 효성 회장은 이틀 연속 조문하기도 했다. 특히 삼성그룹 승계 과정에서 앙숙이 됐던 CJ그룹 이재현 회장은 숙부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빈소에 1시간 30여 분간 머물다가 돌아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3세 경영으로 넘어가면서 삼성과 CJ 간 애증의 관계가 해소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삼성SDS 출신인 김범수 카카오 의장, 이재용 부회장과 친구인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도 빈소를 찾았다. 김범수 의장은 밤늦게 빈소를 찾은 뒤 "삼성에서 (일할 때) 배운 모든 것이 고스란히 한게임, 네이버, 카카오로 이어졌다"며 "삼성 키즈들이 한국의 새로운 사업을 이뤄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택진 대표 역시 "고인 덕에 지금의 저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다"고 추모했다.
생전 예술·체육 분야에 큰 관심을 두고 활동한 이건희 회장이기에 예술인과 체육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생전 대한레슬링협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했던 이건희 회장. 빈소에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백건우, 조성진 등이 방문했다. 특히 백건우는 심경을 묻는 말에 "아버님을 잃은 것 같다. 다른 말 할 것도 없다"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체육계에서는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이 국내 체육회를 대표해 조문했다.
수원 가족 선산에 영면하게 된 거인
지난 10월 28일 오전에 열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영결식에는 유족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과 고인의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고인의 조카인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등만 참석했다. 발인에는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과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 삼성전자 권오현 상임고문, 삼성전자 김기남 부회장, 정현호 사업지원TF 사장, 이인용 사장 등 삼성 임직원이 함께했다. 평소 이재용 부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영결식에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다.
이날 이재용 부회장은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이부진 사장은 중간중간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것을 힘들어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 이부진 사장은 장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면서 휘청해 이재용 부회장의 부축을 받아야 했고, 버스 안에서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우는 모습이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도 홍라희 여사와 이재용 부회장이 함께 부축하는 모습을 보였다.
운구 행렬은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과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살았던 한남동 자택, 이태원동 승지원(承志園) 등을 정차하지 않고 통과한 뒤, 이어 화성 반도체사업장에 도착했다. 경기도 반도체 생산 라인이 있는 화성 반도체사업장은 이 회장이 평소 가장 애착을 가졌던 곳 중 하나. 지난 2010년 마지막으로 기공식과 웨이퍼 출하식을 챙겼던 곳으로, 이곳에서 고인은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나온 수천 명의 임직원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정문에는 '회장님의 발자취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초일류 삼성전자의 이름이 더욱 빛나게 하겠습니다' '100년 기업의 발판을 만드신 진정한 삼성인! 그 뜻을 새겨 새로운 100년을 열겠습니다' 등 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각오가 담긴 플래카드들이 그의 마지막 출근을 맞이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임직원들은 3,000송이의 국화를 가슴에 얹고 고 이 회장을 추모했고, 일부 임직원은 참았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협력사 직원들까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몰리면서 2km에 달하는 화성 사업장 도로 양편에 인파가 4~5줄로 길게 늘어서는 모습도 연출됐다.
그 후 이건희 회장은 장지인 수원 가족 선산에 영면했다. 수원 선산은 이병철 선대 회장의 부모와 조부가 잠든 곳이기도 하다.
이건희 검찰 수난사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향년 78세로 별세하면서 새삼 이건희 회장의 검찰 수난사가 주목받고 있다. 삼성그룹을 이끄는 순간부터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까지 검찰 수사를 받아야 했던 이건희 회장의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 특히 건강 상태로 인해 기소중지됐던 사건들이 2건 이상 있을 정도로, 이 회장은 떠나는 마지막까지 검찰 수사 대상이었다. 피의자나 피고발인이 사망할 경우 수사기관은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하는데 이 회장 사건 역시 자연스레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다.
이 회장이 최근 수사를 받아야 했던 것은 비자금. 경찰은 지난 2017년 삼성그룹 일가의 자택 인테리어 공사비 비리 의혹 수사 중 삼성그룹 임원 명의로 된 260개의 차명계좌를 발견했다. 증권 계좌가 대부분이었는데, 삼성그룹이 4,000억원대 비자금을 관리·탈루했다고 보고 삼성그룹 재산관리팀 총괄임원 출신 전 아무개 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조세) 혐의로 입건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건강 상태를 고려해 기소중지 처분했다. 기소중지란 피의 사건에 대해 피의자의 소재 불명·건강 등으로 수사를 진행할 수 없을 때 검사가 수사를 중지하는 처분이다. 기소중지 사유가 해소되면 검사는 다시 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 즉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수사하겠다'는 의미로 사건을 남겨둔 것이었다.
지난 2016년에는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 정황이 담긴 동영상이 뉴스타파를 통해 공개됐는데, 당시 시민 단체들이 이 회장 등을 불법 성매매 혐의 등으로 고발한 사건도 있었다. 당시 검찰은 '동영상을 폭로하겠다'며 이 회장 측에 접근해 9억여원을 뜯어낸 혐의 등으로 CJ제일제당 부장 출신 선 아무개 씨 등 일당을 기소했지만, 역시 건강 문제를 이유로 이 회장은 시한부 기소중지 처분한 바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이 별세하면서 이 사건들은 모두 종결 처리됐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악역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 사건 관련 250억원 뇌물 제공 혐의 불구속 기소 △2000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고발 건 무혐의 △2005년 '삼성 X파일' 정관계 로비 사건 무혐의 △2007년 전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에 따른 삼성 특검 수사 후 불구속 기소 등 25년 동안 꾸준히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럼에도 한 차례도 구속된 적이 없는 기업인이었다. 두 차례 불구속 기소 후 집행유예 선고, 그 후 특별사면을 받는 등 구치소 신세를 진 적은 없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 제공 사건 때는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개천절 때 사면 복권됐고, 김용철 변호사 폭로로 시작된 삼성 특검 수사 때는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뒤 2009년 12월 사면 복권됐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이 회장을 특별 단독 사면하면서 IOC 위원인 이 회장의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지원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아들 이재용 부회장은 구속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11월 9일에는 부친상이 끝난 지 10여 일 만에 국정농단 사건 관련 뇌물공여 혐의 파기환송심 재판에 피고인 신분으로 출석해야 했다. 국정농단 관련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 때 구속되며 '삼성가(家) 최초 구속'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했던 이재용 부회장. 부친상을 치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심경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밖에도 삼성바이로직스 분식회계 사건 등으로 불구속 기소된 사건까지 남아 있어, 검찰과 법원이라는 굴레에서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가까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각별했던 딸 사랑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각별한 '딸 사랑'은 유명하다. 재계에서는 대한민국 경제를 한 단계 끌어올린 작은 거인으로 평가되지만, 집에서는 딸을 끔찍하게 아끼는 아빠였다는 평이다.
이 회장은 중요한 공식 석상에 딸들의 손을 잡고 등장하는 등 돈독한 부녀 관계를 보여주곤 했다. 지난 2010년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CES)에서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의 손을 잡고 등장하며 "이번에 우리 딸들 광고해야겠다"고 애정을 표현했다.
특히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외모부터 성격, 배려 넘치는 화법 속에서도 강단 있는 경영 스타일 등이 부친을 쏙 빼닮아 '리틀 이건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회장의 딸 사랑은 자연스레 여성 인재 양성으로 이어졌다. 1987년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후 남녀 차별 관행을 없애는 데 적극적이었다. 여성 전문직제나 업계 최초로 대졸자 여성 공채 등을 도입한 것도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다른 나라는 남자 여자가 합쳐서 뛰고 있는데, 우리는 남자 홀로 분투하고 있다. 마치 바퀴 하나는 바람이 빠진 채로 자전거 경주를 하는 셈"이라며 기업들이 여성을 적극 채용하고 인프라를 구비해줘야 한다고 자신의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강조했던 이건희 회장.
재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평소 딸들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고 관계 역시 돈독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며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 주도하에 적극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여성 인재들의 능력을 키워준 점도 있지 않겠냐"고 평가했다.
이건희 회장이 남긴 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생전 직설적인 화법으로 재계, 정치계, 언론계에 많은 메시지를 남겼다. 특히 "가족 빼고 다 바꿔야 한다"며 기업인들에게 혁신을 강요했던 점이나, "정치계는 4류,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필요성을 강조했던 부분들은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라는 평도 나온다. 아래는 이건희 회장이 생전 남긴 유명한 발언들이다.
이건희 회장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중
"어떤 승리에도 우연은 없다. 스포츠에서 얻을 교훈은 어떤 승리에도 결코 우연은 없다는 사실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도 노력 없이 승리할 수 없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말리지 않는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을 옆으로 돌려놓는가?"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 구태여 회사에서만 할 필요 없다. 6개월 밤을 새워서 일하다가 6개월 놀아도 좋다. 논다고 평가하면 안 된다.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
1995년 베이징 특파원들과 간담회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에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
2011년 1월 신년사
"삼성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기꺼이 협력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2010년 3월 경영 복귀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2014년 1월 신년사
"다시 한번 바꿔야 한다. 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특별한 강아지 사랑
일본 유학 시절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한 이건희 회장. 과거 한남동 자택에서도 포메라니안, 요크셔테리어, 치와와 등 여러 마리의 강아지를 키웠다. 이 중 이건희 회장이 유난히 아꼈던 강아지는 포메라니안종의 반려견 '벤지'. 1986년부터 키운 벤지는 2009년 1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 회장은 벤지의 체세포를 보관했다가 2010년과 2017년에 복제에 성공했다.
이 회장은 자신의 반려견을 아끼는 데 그치지 않고 개와 관련한 사회 공헌 사업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보신탕 문화가 비판 대상이 되자 이 회장은 진돗개를 국제사회에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진돗개에 대한 정확한 혈통 기준도 모호하던 때 에버랜드를 통해 진돗개 연구를 지원했고 덕분에 2005년 진돗개는 영국 애견 단체 켄넬 클럽에 세계 197번째 명견에 등재됐다.
삼성화재를 통해서는 1993년부터 시각장애인 안내견 공급을 시작했다. 안내견학교를 설립한 뒤 현재까지 200마리가 넘는 래브라도·골든 리트리버종의 안내견들을 시각장애인에게 제공했다. 안내견들이 역할을 다하고 나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모두 삼성 측에서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스원탐지견센터는 2003년부터 검역 탐지견 사업을 시작으로 마약 탐지견, 폭발물 탐지견, 환경지킴이견 등 특수 목적견을 국가기관에 기증 및 무상 대여하고 있다. 2007년부터는 문화재청과 1문화재 1지킴이 활동을 위해 잉글리시 스프링어 스패니얼종의 흰개미 탐지견을 양성, 문화재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이 회장은 평소 보신탕을 즐기는 임원들에게도 "개를 한 마리 선물할 테니 키워보라"며 국내 동물복지에 안타까움을 여러 차례 표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