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감 없고, 깊고 진했다. 그만큼의 세월을 살아오며 만들어진 연륜과 내공,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자분자분 따뜻하게 말을 이었다. 단단한 사람인 동시에 유리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매 작품 치열하게 자신을 몰아세우며 연기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는 조금 즐겨도 되지 않아요?" 그녀의 대답은 매번 같다. "사람이 쉽게 변하나요?" 그녀에게 연기는 즐겁기보다 고통이다. 부족한 자신을 수도 없이 마주하는 순간이기에 고통스럽다. 데뷔 34년 차, 여전히 연기 앞에서 겸허해진다.
그렇게 내놓은 작품, 영화 <내가 죽던 날>이 지난 11월 12일 개봉했다. 김혜수는 극 중 형사 '현수' 역을 맡았다. 가장 가까운 이의 배신과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일상이 무너졌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형사로서 재기하기 위해 절벽 끝에서 사라진 소녀 '세진'의 흔적을 추적하며 삶의 진실을 찾아간다. 김혜수는 "어떤 측면에선 내 이야기 같았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김혜수는 최근 가족과 얽힌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힘든 시간을 보낸 바 있다.
"현수의 대사 중에 그런 게 있어요. '나는 내 인생이 멀쩡한 줄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실제로 제가 했던 말이에요. 또 영화 속 대사 중에 '난 왜 몰랐던 걸까? 그래서 벌 받나 봐'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마음 역시 제게 조금 있었어요. '네가 널 구해야지' 하는 대사와 '인생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길다' 등등 유독 세포 하나하나에 흡수되는 말이 많았어요. 연기하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던 작품이에요."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민낯에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배우 김혜수보다 사람 김혜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연기? 두려운 동시에 경이로운 일
영화 <내가 죽던 날>을 선택한 이유는요? 사실 대본을 읽기도 전에 제목이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리고 대본을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의 위로를 받았고요. 제가 느끼는 위로를 관객들이 느낀다면 가치 있는 작업이 아닐까 싶었어요. 어쩌면 그게 영화의 목적이 아닐까요?
그동안 유명 감독들과 호흡을 맞췄는데, 이번엔 신인 여성 감독이에요. <타짜>의 경우엔 당시 최동훈 감독님이 영화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을 때였어요. 제겐 행운이었죠. 그 외에 대부분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했어요. 저는 특별히 선호하는 감독이 있진 않아요. 작품이 우선이죠. 물론 배우라면 누구나 이창동, 봉준호 감독님과 작업을 하고 싶겠죠. 그런 거 말고, 저는 감독보다 시나리오를 우선으로 봐요. 이번 작품은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아니었어요.
<내가 죽던 날>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거의 모든 작품이 스태프의 다양한 아이디어로 풍성해지죠. 물론 그 많은 아이디어 중 버려지는 것도 많고요. 이번 작품에서 현수가 꿈을 꾸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은 제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거예요. 실제로 제가 어느 한 시기에 비슷한 꿈을 반복적으로 꿨거든요. 그 감정을 그대로 담았어요.
그 꿈에 대해 부연 설명을 듣고 싶어요. 오래전 일인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1년 내내 비슷한 꿈을 꿨어요. 그래서인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몇 커트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더라고요. 그 당시 제가 심리적으로 힘들었을 때였어요. 뭐랄까, 심리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그 꿈을 안 꾸게 되고, 심리적으로도 편안해졌죠. 불면증이 조금 있었을 때였어요.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때의 저는 극복할 여력이 없기도 했고, 제 성향상 극복하려고 아등바등하지도 않아요. 저는 이겨낸다는 게 없어요. 그냥 내버려두는 거죠. 원치 않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고, 제가 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은 그냥 내버려둬요.
함께 출연한 이정은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좋은 배우인 동시에 좋은 사람을 현장에서 만난다는 건 특별한 일이에요. 이렇게 완벽한 순간을 선사하는구나 하는 감정이 들 정도로요. 실제 정은 씨가 영화 속 캐릭터처럼 말없이 사람을 안아주는 힘이 있어요. 저는 이 영화의 흥행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미 많은 걸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원톱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요? 이 어려운 시기에 여성 연기자로서 원톱 영화에 출연하는 책임감과 의미…. 물론 그에 따른 책임감을 피하진 않지만, 저는 사실 제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만도 매번 벅찬 게 사실이에요. 배우로서 그 캐릭터에 충실한 게 우선이죠.
작품마다 자신을 몰아치며 완벽하게 연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번 연기, 만족하나요? 자기 연기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다행인 건, 제가 시나리오를 보고 느낀 위로의 감정을 관객들도 느껴주셔서 안도한 건 있어요. 글쎄요, 연기요? 연기로만 따지자면 저는 영화를 찍고 난 뒤엔 제 영화를 남 영화 보듯 멍하게 보는 편이에요.(웃음)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은퇴'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마도 많은 배우가 매번 작품을 시작하고 마칠 때 수시로 드는 마음일 거예요. 일종의 두려움 같은 거죠. 경험한바, 두렵지 않은 현장은 없어요. 연기라는 게 참 기묘하게 힘들거든요. '배우'라는 단어의 의미만 봐도 그래요. 배우의 '배(俳)'가 사람 인과 아닐 비를 합쳐 쓴 글자이고, 빼어날 '우(優)'를 쓰죠. 직역하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 걸 뛰어나게 해야 하는 거잖아요.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이에요. 그럼에도 해내야 하고, 또 보란 듯이 해내는 사람이 있고요. 이 모든 게 얼마나 경이로운 동시에 두려운 일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한 얘기예요.
연기가 두렵지만 즐겁기도 하겠죠? 두려운데 왜 즐거워요? 연기는 제게 고통스럽고 힘들어요. 다만 그런 건 있어요. 현장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감은 있어요. 하지만 연기의 고통을 압도하는 '즐거움'은 없습니다.
그럼 김혜수를 즐겁게 하는 건 뭔가요? 사랑, 음악, 시, 글, 아이들, 하늘, 초록…. 사소하고 일상적인 게 즐거워요. 그런 것들로 충전이 되니 살 수 있는 거죠.
저도 사실 여러분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어요. 아등바등 늘 제게 주어진 옷을 버거워하며, 작은 것에 기뻐하고, 별거 아닌 것에 실없이 웃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는 연기자예요. 10대 때 우연히 이 일을 시작했어요. 그 낯선 세계에서 어른들 틈에 끼어 20대를 맞이했죠. 뒤늦게 사춘기가 왔어요. 본질에 접근하기보다는 '이 일이 뭐지?' '나는 왜 이러지?' '왜 하는 거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거죠. 눈떠 있는 시간 대부분을 이걸 하며 보내니까요. 내적으로는 방황을 많이 했던 시기예요.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삶도 버거웠고, 또 그렇게 10대와 20대의 청춘을 보낸 게 아까웠어요. 그러다 30대를 맞이했고 그때는 이 창의적인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진짜로 어디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한데 또 벽에 부딪히죠. 내 한계를 마주하게 되고,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게 되고, 내가 원하는 것과 내게 원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한 좌절도 느끼고요. 그렇게 30대 한가운데서 '마흔이 되면 정말로 이 일을 그만두고 내 삶을 찾을 거야' 하는 생각을 매일 하며 지냈어요. 그렇게 40대가 됐는데, 결국 내 삶과 연기를 분리한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하면서 평생을 살았고, 연기하면서 세상을 바라봤고, 연기하면서 취향이 생겼는데 이제 와서 분리한다는 게 의미가 없더라고요. 매번 그런 식이에요.
결국 김혜수라는 배우는 여성들의 롤 모델이 됐고, 시대의 아이콘이 됐어요. 저만의 힘으론 불가능한 일이죠. 불특정 다수의 사랑, 불가항력적인 운, 힘들 때마다 나타난 수많은 귀인….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내 인생을 구성했던 것 같아요. 사실 연기 잘하는 배우, 얼마나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운이 좋았어요. 행운이 끊임없이 제게 왔어요. 감사한 일이죠. 많은 사람이 저를 '용기 있는 여성'으로 봐주는데, 사실 저는 여러분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어요. 아등바등 늘 제게 주어진 옷을 버거워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고, 별거 아닌 것에 실없이 웃기도 하고요.
참, 뒤늦게 SNS를 시작했어요.(웃음) 너무 재미있어요. 제가 이럴까 봐서 그동안 SNS를 안 했는데 역시 너무 재미있는 거죠.(웃음) 오프라인에서 자주 보는 내 친구를 다른 공간에서 또 본다는 게 신기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재미있고, 가끔 누군가가 쓴 글귀 하나에 위안을 받는 것도 고맙고요. 그분이 제 팬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잠깐의 친구' 그것도 좋던데요? 그런 거 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요. SNS의 순기능이죠. 물론 순기능만 취할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어쨌든 여러 가지 의미로 재미있고 좋아요.
평소 환경에 관심이 많은 걸로 알아요. 소소하게 하는 일인데 누군가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더라고요. 예전에 태안에 기름 유출이 됐을 때 주변 친구들과 다 같이 가서 일을 도운 적이 있어요. 생각해 보니 내 주변에서도 할 일이 많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한강 둔치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오면서 여기저기 보이는 쓰레기를 줍는다든지 하는 일이오. 그런 걸 드러내는 게 쑥스럽기도 하지만 상관없어요. 제가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받아서 했던 일이고, 또 제가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건 어찌 됐든 좋은 일이니까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있지만, 그 미덕은 간직하되 좋은 것은 많이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최근 영화에선 줄곧 어두운 캐릭터를 맡아왔어요. 의도한 바인가요? 우연이에요. 그냥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작품을 하는 거예요. 제가 계획적인 성격이 아니랍니다.
<내가 죽던 날>에선 영화 내내 화장기 없는 얼굴로 등장해요. 여배우로서 나이 듦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라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이미 배우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 한 건 그걸 다 포함한 거죠. 캐릭터에 적합한 얼굴, 신체, 보이스를 다 하겠다는 의미죠. 민낯이오? <국가부도의 날>에서도 민낯으로 출연했는걸요.
한국 영화계가 남성 중심이죠? 이에 대한 생각도 궁금해요. 전 세계를 막론하고, 또한 시대를 막론하고 늘 그래 왔죠. 최근 동성 동료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우린 왜 그동안 작품에서 못 만났지?' 하고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더라고요. 대체로 남자 연기자들 사이에서 여자 연기자는 1명을 구색 맞추기로 껴주는 구조잖아요. 마블 영화만 봐도 그래요. 왜 그런 구조가 만들어졌느냐? 비즈니스 측면에서 본다면 현실적인 반응에 근거한 것이겠죠. 물론 최근 들어 언론에서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루고 있고, 또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은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는 건 맞아요. 최근 부쩍 여성 감독이 수적으로 많아진 것도 느끼고요. 물론 반갑죠. 한데 반갑다는 마음보다 자질 있는 좋은 여성 감독을 만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잠깐 반갑게 만나고 헤어지는 이벤트가 아니라요.
올해로 데뷔 34년 차가 됐어요.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나이도 그냥 그런가보다 해요. 나이로 인한 부담감도 없고요. 그런 것보다 내가 어떤 배우인지가 중요하죠. 숫자가 많을수록 최고가 된다면 최선을 다해 나이를 먹을 텐데 그런 게 아니잖아요.
마지막으로 이번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개인의 상처나 절망이 어떠한 계기로 완벽히 치유된다는 건 있을 수 없죠. 그 시기를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죠. 그럼에도 그 힘든 시기에 전혀 의식하지 못한 누군가를 통해 위안을 얻게 된다는 걸 영화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이 영화가 제게 위안이 됐듯이 관객들에게도 그런 힘을 줄 것이라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