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최숙현 선수가 소속팀 감독과 선배들로부터 폭언, 폭행을 받은 정황이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22살 짧은 생을 살다간 최 선수는 지난 6월 26일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투신했다.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최 선수는 초등학생 때 수영을 시작해 11살이 된 2009년 경북 대표로 활약했으며, 경북체고를 졸업하고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에 입단해 본격적인 실업팀 선수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철인 3종 경기'라 불리는 트라이애슬론은 수영, 사이클, 마라톤의 세 종목을 연이어 겨루는 경기로 강인한 체력과 정식력을 요하는 종목이다. '무쇠처럼 강한 사람'이라는 뜻의 철인(鐵人)조차 견디지 못했던 고통은 무엇인지, 유가족들이 공개한 문자메시지 속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많은 국민이 분노를 표출했다.
복숭아 먹었다고 뺨 20대…
최 선수의 억울한 죽음이 대중에게 알려진 건 청와대 국민청원에서부터였다. 지난 7월 2일 '트라이애슬론 유망주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제목으로 최 선수의 죽음을 알린 청원인은 최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을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어린 선수가 꿈을 펼쳐보기 전에 별이 돼 떠났다. 우리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최숙현 선수는 운동을 좋아했다. 피, 땀,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 정신을 동경했다. 감독, 선배, 팀닥터는 그렇지 않았다. 슬리퍼로 얼굴을 치고 갈비뼈에 실금이 갈 정도로 구타했고 식고문까지 자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최 선수가) 참다 못해 고소와 고발을 하자, 잘못을 빌며 용서해달라는 사람이 정작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모르쇠로 일관하며 (가해를) 부정했다. 최숙현 선수는 이런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관계자들을 일벌백계하고 최숙현 선수의 억울함을 풀어달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폭언과 폭력을 근절하고, 고통받는 젊고 유능한 선수들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덧붙였다.
비교적 짧은 분량이었지만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내용에 17만 명이 넘는 국민이 동의를 보내면서 해당 사건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유족은 최 선수가 말한 '그 사람들'을 최 선수가 속한 소속팀의 감독, 팀닥터, 선배들로 보고 있다.
알려진 가혹 행위에 따르면 최 선수가 복숭아 1개를 먹고 감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뺨을 20차례 맞았고, 체중 조절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흘간 단식을 해야 했으며, 빵 20만원어치를 강제로 먹이는 '고문'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의 '팀닥터'로 불린 마사지사 안주현은 치료를 명목으로 선수들을 성추행하고 훈련 비용을 핑계 삼아 선수들의 돈을 갈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선수의 동료들은 증언을 통해 안 씨가 술에 취해 선수의 볼을 가격하다 입을 맞추고,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최 선수에게 '자살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했다고 밝혀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극에 달했다.
안 씨는 최 선수에 대한 폭행을 주도한 것 외에도 의사 면허나 물리치료사 자격증 없이 선수들에게 의료 행위를 하고 치료비 명목으로 돈을 갈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대구지법은 증거 인멸과 도망의 염려를 이유로 지난 7월 13일 안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한 상태다.
또 다른 가해자로 지목된 김규봉 감독은 최 선수 외에도 17명에 이르는 추가 피해 선수들에게 폭행과 폭언 등 가혹 행위를 한 혐의를 받으며 경북지방경찰청이 최근 압수수색을 시행했다. 모든 혐의를 부인하는 김 감독의 뻔뻔함에 유가족은 최 선수가 소지했던 폭언, 폭행 당시의 녹취록을 공개했다.
지난해 뉴질랜드 전지훈련 당시 숙소 주방에서 녹음된 파일에는 김 감독이 한 여자 선수를 향해 "(그릇) 언제 치울래? X발 너는 뭐 하는데, 국가대표면 다야!"라고 말하면서 '퍽' 하고 폭행하는 소리가 담겼다. 이어 "어따대고 X가지 없는 걸 배워와서, 센스가 그렇게 없어?" "억울하냐, 야이 미친X아, 어디서 X가지 없는 걸 처 배워왔어!" "그만큼 대가리가 안 돌아간다고?" 등 폭언을 쏟아냈다.
악마를 보았다
가해자 중 가장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킨 인물은 팀의 최고참이자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의 주장인 장윤정 선수다. 최 선수와 함께 경주시청에서 뛰었던 동료 선수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가혹 행위는 감독만 한 것이 아니다. 팀의 최고참인 주장 선수는 항상 선수들을 이간질하고 따돌림시켰다. 훈련 중 실수를 하면 물병으로 머리를 때렸고 고소공포증이 있는 선수의 멱살을 잡고 옥상으로 끌고 간 뒤 뛰어내리라고 협박했다"고 폭로했다.
이어 "주장은 숙현 언니를 '정신병자'라 부르며 이간질했고, 숙현 언니가 팀닥터에게 맞고 방에서 혼자 울고 있으면, 이를 두고 '쇼'라고 말했다. 고 최숙현 선수와 저희를 비롯한 모든 피해자는 처벌 1순위로 주장을 지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주장 장윤정은 2007년부터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여성부 동메달과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혼성릴레이 은메달을 따낸 인물이다. 경주시청 소속으로 나간 전국체전에서는 2016~2018년 금메달을 따냈고 작년에는 은메달을 획득해 '차세대 트라이애슬론의 간판'으로 불렸다.
지난 7월 6일 가해자로 지목된 장윤정 선수는 국회에 참석해 "선수들을 폭행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하며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특히 "고인에게 사죄할 마음이 없느냐"는 질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경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답변으로 사과 역시 거부한 상태. 반성이나 사과 한마디 없는 최고참 선배의 태도에 네티즌은 "악마를 보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최 선수의 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선배 선수는 총 4명이다 그중 1명인 김도환 선수는 지난 7월 14일 직접 쓴 사과문을 공개하며 최 선수에게 용서를 구했다. 김도환 선수는 사과문에서 "2017년 뉴질랜드 전지훈련 중에 최 선수가 길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뒤통수 한 대를 (때린 것을) 인정한다. 이런 신체접촉 또한 상대방에게는 폭행이란 것을 인지하지 못한 제 안일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다시 한 번 반성하고 깊이 사죄드린다"고 전했다.
한편 반성문을 공개한 몇 시간 뒤 김도환 선수를 포함한 주요 가해자, 김규봉 감독과 장윤정 선수가 체육회 스포츠공정위에 재심 신청서를 제출해 또 한 번 논란이 일었다.
앞서 대한철인3종협회는 최 선수가 세상을 등진 지 열흘 만인 지난 7월 6일 스포츠공정위를 열어 김규봉 감독과 장윤정 선수를 영구 제명하고, 김도환 선수에 대해서는 10년 자격정지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뻔뻔하고도 파렴치한 가해자들이 언제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깊이 뉘우치게 될지 좀 더 두고 봐야 알 것 같다.
'내가 더 분노했다'
최숙현 선수의 사망 사건으로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인 '체육계'.
농구 선수 하승진
하승진이 자신의 SNS를 통해 최숙현 선수의 사망을 애도하며 울분을 토했다. 그는 "스포츠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으로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출 길이 없다"고 밝히며 "대한체육회, 대한철인3종협회, 경주시체육회 등등 신고하고 진정서 넣으며 도움의 손길을 뻗었지만 외면하고 은폐하기 바빴던 협회 버러지 같은 X들, 고이다 못해 썩은 물들. 쓰레기 같은 X들아. 지들 밥그릇 챙기기에만 정신없고 시궁창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라고 강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최윤희
국가대표 수영 선수 출신 문화체육관광부 최윤희 제2 차관이 대한체육회를 직접 방문해 사태 관련 경위를 보고받고 강력한 후속 조치를 약속했다. 최 차관은 "선수 출신으로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 데 대해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분노한다"고 말하며, "이 사태에 대해 가장 앞장서 책임지고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후배 선수들이 인권이 보장되는 환경 속에서 행복하게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경북체고 후배 임주미
최 선수와 경북체고를 함께 다니며 친분을 이어온 임주미 선수는 자신의 SNS를 통해 최 선수를 추모하고 무능력한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냈다. 임 씨는 "숙현 언니의 사진이 이렇게 떠도는 현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가늠하지 못할 만큼 고통받으며 혼자서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언니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며 "분명 입 막고 있는데 내가 다 아니까 뭔가 싶지? 내 게시물 보고 제발 찔리라고 올리는 거예요. 이번엔 내 입도 한번 막아보시지 그래요 감독님"이라고 김 감독에 대한 분노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