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았던 워킹맘 시절
유튜브 채널 Q&A영상에서 밀라논나는 워킹맘 시절을 극기훈련 같았다고 회고했다.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공부까지 매진해야 했던 전쟁같았던 시절, 그녀는 1988년 <우먼센스>를 만나 이 시절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홍익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결혼 전 계획을 되살려 남편과 함께 유학 갈 나라를 찾다가 이태리행을 결심했다. 부부 동시 출국이 처음 하락되던 1978년이었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인 그 당시만 해도 유학생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가지 못하게 되어있어 아들을 친정에 맡기게 되었다. 디자인 분야에 있어 최초의 밀라노 유학생 부부인 우리는 교포들은 물론 이태리친구들의 도움도 무척 많이 받았다. 나는 미란고니스쿨에서 영화와 무대의상을 위한 디자인 공부를 하게 됐다. 그러나 아이를 계속 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워낙 완고한 친정 쪽에서 아이는 엄마의 손에 키워야 된다는 편지를 했고 나 자신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관계처를 쫓아다니며 사정도 하고 싸움도 한 끝에 겨우 아이를 데리고 오자 자연히 일은 두 배로 늘어나 고달픈 유학생 부부가 되었다. 학교에 갈 때는 탁아소나 동네 친구 집에 맡기기도 했지만 둘 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학교로 데리고 가서 옆자리에 앉혀놓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 측은 물론 이태리 친구들은 그럴 때마다 갸냘픈 동양여자가 처량해 보였는지 아이를 귀여워 해주며 무척 많은 도움을 주곤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흘러간 그 3년은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절로 바빠질 정도다. 그러나 이 시절 나는 난생처음 즐겁게 공부했다.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혼자 한다는 그 자체가 소중했던 것이다.
결혼 후, 돌이 된 아이를 내버려 둔 채 유학을 결정했던 이유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부단히 고민했던 그녀의 흔적도 고스란히 우먼센스에 남겨져 있다. 밀라논나가 어린아이를 두고 유학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의 친정아버지는 무척 완고한 분이어서 맏딸인 나를 정숙하기로 소문난 숙명여중,고교로 보내실 정도로 보수적이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나 손재주가 있는 딸이 언제나 못마땅하셨던 분이었다. 평범한 아낙으로 살아가기를 바랐기에 내가 이화여대 장식미술과를 졸업하자마자 서둘러 결혼을 추진하셨다. 4학년 2학기 때 은사의 소개로 만난 남편 역시 혼인을 무척 원했던 터라 대부분의 맏딸 성향이 그렇듯 어수룩하기만 하던 나는 준비 중인 유학도 포기하고 별 생각 없이 결혼해 가정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삶은 그런 방향은 아니었다. 큰아들이 첫돌을 지내고 숨을 돌릴 만큼 가사에 익숙해지자 나 자신이 ‘고여있는 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인 것.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사는 삶에 무한한 갈증을 느꼈다. 자연히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결혼 전 계획을 되살려서 남편과 함께 유학 갈 나라를 찾다가 이태리행을 결심했다.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꿈이 진행 중’인 인간으로 살기 위해
밀라논나는 자신의 일이 우선시 되어버렸던 인생을 회고한다. 그리고 그건 나의 꿈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작업과 강의에 충실해 온 지난 8년간 나는 무척 자신의 생활에 대해 만족을 느껴왔다.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꿈이 진행 중’인 인간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위에서 거는 나에 대한 갖가지 기대치가 있겠지만 각자의 꿈이란 객관적,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홀로 조용히 이뤄가는 것, 절대적인 것이 아닐까?
나는 작은 행복을 잘 느낀다. 가족은 아예 뒷전인 채 내 작업에 몰두 할 때의 일하는 행복, 새로운 것을 배워와 후배들을 가르칠 때의 행복, 나이가 들수록 깊이와 폭이 커지는 나의 감성을 발견할 때의 행복 그리고 가족이 언제나 함께함을 느낄 때의 행복, 자기 세계를 가진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볼 때의 행복.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순간순간 느끼는 행복의 이면에는 나 스스로의 노력이 언제나 뒤따른다는 것이다. 나의 인생은 내가 나를 끊임없이 연출함으로써 완성되어 가는 것. 아무도 대신 연출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가끔씩 떠올려보며 자신을 채찍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