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살에 찾아온 기적이에요." 전미도는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을 한마디로 정의했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14년 차 뮤지컬 배우 전미도는 <슬의>를 통해 안방극장에 입성했다. 첫 드라마에 첫 주연이었다. 업계에서는 이미 입소문이 난 배우였지만 그동안 방송 매체 연기와 연이 없었다. 신예 발굴과 기성 배우 재발견에 일가견이 있는 신원호 PD가 전미도를 일찌감치 알아봤다.
조정석, 정경호, 유연석 등 시청자에게 익숙한 배우들 사이에서 '생소한' 전미도의 존재감은 영롱하게 빛났다. 그만큼 '얼마나 잘 해낼까?' 하는 부담 어린 시선도 뒤따랐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반신반의를 호평 일색으로 바꾸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99학번 의대 동기 5인방의 정신적 지주이자 율제병원 홍일점 신경외과 교수 '채송화' 역을 맡은 전미도는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했다. 채송화를 완벽히 체화한 연기로 시청자에게 다가갔다. <슬의> 최고의 수혜자라는 말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파격 캐스팅이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오디션 제안을 먼저 받았어요. 떨어지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는 생각에 지원했는데 신원호 감독님이 처음에는 저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걸로 알아요. 하지만 다행히 대화가 잘 통해서 몇 달 뒤 2차 오디션까지 보게 됐죠. 그 현장에서 우연히 유연석 배우를 만났어요. 뮤지컬 활동을 할 때 인연이 있었는데 <슬의>에 먼저 캐스팅된 유연석 배우가 신원호 감독님에게 저를 추천했더라고요. 비슷한 시기에 조정석 배우도 저를 추천했고요. 두 사람이 제 캐스팅이 성사되도록 큰 도움을 준 셈이죠.
뮤지컬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인데 왜 드라마로 무대를 옮겼나요? 14년 정도 뮤지컬 무대에 섰어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편인데 공연만 오래하다 보니 연기가 한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도전하고 싶었어요. 질책을 받고 욕을 먹더라도 일단 부딪혀보자는 생각이었죠. 드라마 <마더>와 영화 <변신>에 짧게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그걸 토대로 좀 더 집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오디션 제안을 받았어요. 캐스팅이 결정된 후에는 무대 느낌을 덜어내려고 리딩 연습을 많이 했죠.
질타는커녕 호평 일색이었어요. 그저 감사했어요. 첫 방송부터 무척 떨렸고 숨죽이면서 봤던 기억이 나요. 신원호 감독님도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전미도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게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던 것은 작가님과 감독님의 힘이 컸다고 생각해요.
채송화는 참 매력적인 캐릭터예요. 차분하고 이성적이지만 본능적으로 인간애가 있는 인물이라고 설명을 들었어요. 감독님이 감정 표현을 적게 하되, 심심하지 않도록 조금씩 변주를 해달라고 하셨어요. 어려운 주문이었지만 이우정 작가님이 대본을 잘 써주셨어요. 사실 채송화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멋진 사람이잖아요. 다행히 음치라는 콘셉트도 있고 먹을 것에 집착하는 엉뚱한 면도 있어서 인간적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일할 땐 완벽하지만 사생활에는 허점이 있어 균형을 맞추면서 연기하려고 했어요.
음치 설정이 인상적이었어요. 처음에 음치로 설정됐다는 얘기를 듣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조정석 배우처럼 매회 노래를 해야 한다면 너무 부담스럽잖아요. 완벽한 인물이라 허술함이 보이는 게 매력이라고 생각했고 뮤지컬 팬들에게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았죠. 동료들끼리 음치인 척 흉내 내면서 자주 놀았거든요. 그 경험을 떠올리며 연기했는데, 작가님의 계획이 잘 먹힌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밴드 연습은 얼마나 했나요? 뮤지컬 <원스>를 하면서 6개월 정도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어요. 그때 악기 연주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무조건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일이더라고요. 그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는 악기 연습에만 1년 정도를 투자했어요. 악기와 친숙해지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특히 외롭게 각자 연습하다가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여 합주하는 순간엔 다들 "우리 콘서트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흥분했어요. 그 참맛을 알고 나니 더욱 재미있었어요.
심지어 음원 성적까지 좋았어요. 온 우주가 나서서 저를 도와준 게 아닐까 싶었어요(전미도는 신효범의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를 리메이크한 OST로 음원 차트 1위에 올랐다). 아마 음치 설정이 주는 반전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요? 1위를 할 정도로 대단히 잘 부른 것도 아닌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주변 동료들도 놀리더라고요. "드라마 출연한 건 알겠는데 네가 뭔데 아이유를 이겼냐"고.(웃음) 워낙 가창력이 돋보이는 노래라 부담스러웠는데 조정석 배우가 "촉이 오니까 걱정 말라"고 얘기해줬어요. 말 그대로 이뤄져 조정석 배우가 가장 기뻐했죠.
"그냥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뮤지컬 배우, 영화 배우가 아니고 그냥 배우. 어떤 장르에서 어떤 연기를 해도 자연스러운 그런 배우이고 싶어요."
유일한 홍일점이었는데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직업 환경이 부럽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제가 생각해도 감개무량합니다.(웃음) 현장에서 다들 저를 잘 케어해주셨는데 하필 그게 저라서 죄송하기도 했어요. 현장은 드라마와 흡사했어요. 촬영이 끝난 뒤에 "우리가 연기를 제대로 한 게 맞냐"고 되물을 정도로 카메라 온 앤 오프 차이가 거의 없었거든요. 우리끼리 말하다가도 "너 말고 '정원(유연석 분)'이가 말한 줄 알았어" 라고 농담할 만큼 각자 캐릭터의 특징을 조금씩 갖고 있어요.
'채송화'가 아닌 전미도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환자들을 대할 때 진정성 있는 모습, 책임감 있게 끝까지 지켜보는 모습, 믿음직스러운 의사의 모습은 제가 배우로서 작품을 대할 때의 태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선택해주신 분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 노력하는 스타일이에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배우로서의 성실함이에요.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전혀 다르고요. 저는 정적이고 사색하는 걸 좋아해요. 채송화처럼 혼자 캠핑은 절대 못해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스타일이에요.
실제 남편의 반응은 어땠나요? 남편이 모니터링을 해줬는데 저보다 더 재미있게 보더라고요. 집에 가면 항상 <슬의>를 보고 있을 정도로 드라마의 '찐팬'이 됐어요.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준완(정경호 분)'이에요. 실제 남편과는 반대 스타일이라 그런 것 같아요. 촬영하는 동안 남편의 응원이 없었더라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부담이 되고 걱정스러웠는데 힘을 북돋아줘서 고마웠어요. 말하자면 끝이 없을 만큼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조승우가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꼽았어요. 제가 조승우 배우의 연기 멘토라고들 하는데 사실 그분이 제 멘토예요. 항상 제가 많이 배우는 편이었어요. 저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말한 게 아닐까 싶네요. 다만 저 때문에 조승우 배우의 이름까지 계속 회자되는 것 같아 항상 미안하고 부끄러워요. 관련 기사가 나간 뒤에 연락을 한 번 했는데 조승우 배우가 저에게 "잘돼서 너무 좋다"고 얘기해주더라고요.
<슬의> 시즌2 이슈가 핫해요. 올해 11월쯤 촬영을 시작할 것 같아요.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잘 모르지만 20년 가까이 된 친구들의 우정 이야기, 사랑 이야기, 40대가 겪는 문제들이 나올 것 같아요. 주요 배역이 시즌2에도 다 나오겠지만 새 인물이 추가돼야 새로운 관계들도 생기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부부의 세계> '김윤기(이무생 분)' 선생님이 정신과로 들어오면 좋겠어요.(웃음)
전미도에게 <슬의>란? 서른아홉 살에 찾아온 기적이요. 원래 뮤지컬 공연을 할 때도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슬의>는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나이에 이런 기회가 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게다가 방송 매체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이토록 큰 기회가 오는 건 말도 안 되죠. 좋은 배우와 좋은 현장을 만났어요. 제 인생 모든 운을 받은 게 아닌지 앞으로가 걱정될 정도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