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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1세대 화가 윤석남의 인생 조언

수많은 여성의 동반자이자 조력자로, 윤석남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On June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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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미술사에서 윤석남이란 이름 석 자가 갖는 의미는 크다. 올해로 82세인 윤석남 화가는 40여 년간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이자 페미니스트 1세대 화가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그녀는 불혹의 나이에 처음 붓을 들었다. 그 전까지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왔지만 표현에 대한 열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한 윤석남 화가는 당시 남편에게 받은 한 달 치 생활비를 털어 화구를 샀다. 혹자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윤석남 작가는 오히려 유쾌하게 반문한다. "여자들이 좀 이기적으로 살면 어때?"라고. 순수한 열정 하나로 화단에 뛰어든 윤석남 화가는 어머니를 모델 삼아 2년간 그림에 몰두했다. 그리고 1982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추상화풍이 지배적이던 당시 화단에서 '여성'을 주제로 한 그녀의 그림은 크게 주목받았다.

그녀의 작품 화두는 여성과 모성, 그리고 어머니다. 윤석남 화가는 여성이 지닌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반추해왔다. 1983년 전시 <어머니의 눈>을 통해 '어머니'라는 개별적 존재에 초점을 맞췄고 2003년 이후에는 허난설헌을 시작으로 이매창, 김만덕 등 역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로 시야를 넓혔다. 2008년 전시 <1,025:사람과 사람 없이>를 통해서는 버려진 개들을 거둬 키우는 평범한 동시대 여성에 대한 헌사를 보냈다. 핍박받던 기성세대 여성의 현실을 넘어 여성의 깊고 넓은 포용력에 대한 표현으로, 윤석남 화가의 세계는 점차 진화해나가고 있다.

예술, 별거 있어?

윤석남 화가의 세계는 그녀의 화성 작업실 안에서 매일 견고해진다. 그녀는 일주일 중 6일을 이곳에서 상주한다. 벌써 10년째 머물다 보니, 곳곳엔 화가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벽면을 채운 오래된 책들, 군데군데 배치된 미술품엔 화가의 다양한 사연이 녹아 있다. 특히 1,025마리의 유기견 나무 조각상이 모여 있는 지하 1층 수장고가 압권이다. 윤석남 화가는 2년간 드로잉 작업에 매진한 뒤 3년에 걸쳐 채색과 조각 작업을 완성했다. 총 5년의 세월이 깃든 작업물에는 365일 싱싱한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작업 시간이 얼마나 길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윤석남 화가는 언제나 겸허한 자세로 작업에 임했고 쉬이 달래지지 않는 욕망의 허기를 채워나갔다. 그럼에도 82세 노년의 예술가는,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고 힘주어 말한다.


유기견 조각상은 실제로 보니 더 대단하네요.
보러 와줘서 감사하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많이 알려지는 게 좋잖아. 작품, 그리고 미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까. 내가 유명해지고 말고는 중요치 않지. 가끔 다른 작가들이 농담 비슷하게 '여기저기서 하자고 하는 거 다 할 필요 뭐 있어?' 라고 하는데 '그래도 나는 할 거야!' 라고 말해요. 예술이라는 게 뭐 별거 있어? (웃음)

1,025마리 조각 작품이라니 힘들지 않았나요? 개 그림이 손에 익지 않아 드로잉 연습만 2년을 했으니 실제 작업 기간은 한 3년 정도였던 것 같아.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꼭 해야만 했어요. 2003년 신문에서 유기견 1,025마리를 보호하고 있는 이애신 여사의 사연을 읽게 됐는데 가슴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어. 개들도 생명체인데 예뻐서 데려와 놓고 힘들면 버린다니. 내가 처음으로 여사님을 찾아갔을 적에는 개를 버리러 온 사람인 줄 알고 대뜸 "개는 어딨어요?" 묻는 거야. 화도 나고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 그때 여사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보호소 회원으로 가입해 사료 기부도 많이 했어. 10년이 걸리더라도 이 작품은 꼭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어. 다 못 끝내고 죽으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였다니까? 건강히 완성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 아무튼, 작가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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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화가는 <1,025:사람과 사람 없이>를 통해 1,025마리의 유기견 나무 조각을 제작했다. 개들을 쓰레기처럼 버리는 현대인의 냉혹함에 대한 분노와 그 개들을 돌본 여성의 사심 없는 힘을 이야기한다.


작가님의 욕망의 원천은 '어머니'였죠? 결혼하고 사글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어. 시어머니까지 한 방에서 생활했는데 가난하고 말고를 떠나 '내가 왜 살고 있지?' 하는 근본적은 의문이 드는 거야.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해 고민하게 됐지. 안 할 수가 없었어. 아침에 일어나 밥하고, 빨래하고 방 하나 청소하는 데에 시간이 뭐 얼마나 걸리겠어. 끝나고 나면 할 게 없어 읽은 책 또 읽고 읽었는데, 그렇게 살다 보니 살 이유가 없는 거야.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모셔야 할 시어머니가 있으니까 버텼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됐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결심한 그길로 남편에게 받은 한 달 치 생활비를 몽땅 털어 화구를 샀어. 그리고 친정엄마를 집으로 모셔서 그림을 그렸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내가 친정엄마를 너무 좋아해. 엄마의 일생을 그리고 싶었거든. 그게 시작이었지.

열정이 대단하셨네요. 예술적인 조예나 능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그걸 하고 싶다는 욕망과 실천하는 힘이 중요한 거지. 가장 먼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거야. 외국에서는 교육 방식이 자유롭고 은퇴할 나이에 무언가를 시작해도 눈총을 받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자유로운 사상이 힘든 편인 것 같아. 어릴 때 정형화된 틀에 갇혀버리면 그걸 깨기가 힘들더라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귀한 일이든, 흔한 일이든 상관하지 말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해. 자기만족이 최우선이 돼야 하고 우주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 둬야 해. 자기 자신을 믿고, 나는 나대로 가는 거야.

그러니까, '무대뽀 정신'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렇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학교 다닐 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던 것 같아. 그래도 상관없었어. '너희들 나 왕따 시키니? 그래, 좋아!' 라는 배짱이 늘 있었거든. 어쨌든 그런 배짱은 갖고 있어야 해요. 내가 잘난 사람이든 아니든 나에겐 내가 최고여야 하는 거야. 부모들도 애를 잘 키우겠다고 너무 간섭하면 안 돼.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두는 게 좋지.

작가님에게 어머님은 어떤 의미였나요? 우리 어머니는 아주 자유로운 편이셨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윤석남 화가의 아버지는 1923년 개봉된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연출한 영화감독 윤백남이다)인데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어. 그때 6남매 중 막내가 2살이었고 우리 어머니는 고작 39살 먹은 여자였어. 살 곳도 없고, 가진 것도 전혀 없어서 금호동에 흙벽돌을 쌓아 집을 만들고 그랬어.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어머니는 공장에 나가 일하고 밤늦게 퇴근하셨어. 가끔씩 퇴근길에 센베이 과자를 사와서 우리를 깨우셨는데, 둘러앉아 다 같이 게임을 하고 이긴 사람에게 과자 하나씩 나눠주면서 놀았지. 그러니까 가난이 무섭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다 어머니 덕분이었지. 자식들 앞에서 한 번도 "우리 이제 어떻게 사니" 같은 우는소리는 안 하셨거든.

어머니가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네요.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겨우 나오셨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항상 끼고 사셨어. 책 읽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 나도 영향을 많이 받았지. 그런 어머니 밑에서 건강히 자랐고 고3 졸업하자마자 취직해 동생들 공부시켰어. 나중에 결혼하고 애도 낳았지만 난 우리 어머니 같은 엄마는 못 됐지. 희생이 참 크셨어. 이러니까 내가 어머니 얘기를 안 할 수가 있겠어?

그래서 작가님의 작품이 대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인가봐요. 어머니를 얘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가 봐. 워낙 내 성질이 그렇지 못한 것도 있어요. 과격한 건 잘 못 하겠더라고. 이건 태생적인 게 아니라, 습관처럼 굳어진 것 같아.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거야. 어렸을 때부터 여자로 길러지면서 남에게 양보해야 한다, 이해하고 넘어가줘야 한다, 이런 얘기를 노상 들어왔으니까. 가정적으로도 화목해야 하고 여자니까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이 많았어. 내가 아마 남자로 태어났으면 이렇게 살았겠나 싶기도 해. 그럼에도 뭔가가 꿈틀댔기 때문에 그림을 시작한 것 아니겠어? 그림으로 다시 나를 찾아가고 있고 아직도 그 과정에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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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전시를 목표로 윤석남 화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표현하는 작업에 매진 중이다. 현재는 2·8 선언과 3·1운동에 앞장선 김마리아 열사를 작업 중이다.

오는 9월 전시를 목표로 윤석남 화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표현하는 작업에 매진 중이다. 현재는 2·8 선언과 3·1운동에 앞장선 김마리아 열사를 작업 중이다.

좀 이기적이면 어때?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세요? 여전히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면서 살아. 요즘엔 1850년서부터 1930년까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돌아가신 여성들을 그리고 있어. 독립운동가 하면 보통 남자를 먼저 떠올리잖아. 기록으로만 따져도 남자는 2,000명이 훌쩍 넘는데 여자는 고작 200여 명밖에 안 돼. 사진까지 남아 있는 분은 고작 몇 십 명뿐이더라고. 그래서 이 얘기가 너무 하고 싶었어.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작업하기가 힘들어. 작은 독사진, 증명사진 보고 상상하면서 그리는 중인데, 사실 재미있어 미칠 것 같아(여성 독립운동가 관련 전시는 오는 9월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윤석남 화가는 이 전시가 끝난 이후에도 장기 프로젝트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계속 그려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치지는 않으세요? 지칠 때가 없다고 하면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럴 땐 잠도 자고 책이나 영화도 보곤 해. 옛날 같았으면 그렇게 이틀씩 시간을 보내고 그랬을 텐데 요새는 오래 못 가. 몇 시간 쉬다가도 '빨리 작업해야지!' 하는 생각에 금세 다시 돌아오게 돼요.

시대를 관통해오셨잖아요.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을 느끼세요? 굉장히 많이 변했다고 생각해. 요즘 남자들만 봐도 결혼해서 빨래나 집안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잖아. 가정에서 여성, 남성의 일을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는 거지. 참 반가운 일이야. 그런 면에서는 많이 발전했다고 볼 수 있지. 반면, 아직 경직돼 있는 부분도 분명 있어요. 페미니스트 사상이 공격을 받기도 하고 또 반대로 과격하게 침투하기도 하니까. 이런 것이 유연해지고 완벽하게 자유로워지는 날이 언제 올까 싶어. 한 100년, 200년 뒤에는 성(性)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나만 해도 주변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침 맞아.(웃음) 감히 침은 못 놔도, '잘난 척하네' 이런 분위기가 되는 거지.

그래도 중·장년 여성들의 희망이시잖아요. 난 정말 이 얘기만큼은 꼭 해주고 싶어요. 하고 싶은 일로 꼭 성공해야지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 일단 시작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사회적인 의미를 찾는 것보다는 자신이 그 일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 너무 좋지 않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성공과 실패를 나누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여자들이 이기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좀 이기적이면 어때? 그냥 침 맞을래, 바늘 한 번 맞지 뭐, 하는 마음으로 이기적으로 살기를 바라.

동년배 작가들이 없다는 게 외롭진 않으세요? 서울 역삼동에서 첫 작업실을 마련하고 같이 활동했던 작가들도 지금은 다 손을 놨어. 몸이 안 따른다 이거야. 할 만큼 했다고들 하는데 시작했으면 죽을 때까지 하는 거지, 할 만큼이 어디 있어? 내 생각은 그래요. 나는 할 만큼 다하지 못한 것 같거든.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숨을 쉬고 내 손이 허락하는 동안은 계속할 거야. 지금처럼 거대한 작업이 힘들면 작은 작업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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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윤석남 작가는 관련 서적들을 읽는다. 작업실 곳곳엔 이들의 삶을 그린 서적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버텨 여성주의 미술의 상징이 되셨네요. 아우, 싫어. 어려서부터 분단장도 싫어하던 스타일이었어. 선생님이 예뻐해주면 그게 부담스러워 도망가던 아이였지. 특별 대우가 싫었거든. '나를 내버려둬! 관심 두지 마!' 하는 독불장군 스타일이었지. 생각해보면 친구들 눈에 얼마나 별나고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싶긴 해. 물론 '대모' 이런 타이틀은 지금도 너무 싫어.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좀 바꿔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나를 희생하더라도 여성주의 미술은 계속 흘러가야 하니까. 온전하게 가야 하니까. 내가 조금 거북해도 받아들여야지. 이왕 상징적인 존재가 된 거, '나 써먹을 대로 써먹어 봐' 이런 생각도 들어.

여성주의 미술을 정의 내리기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범위가 참 넓지. 그런데 내 생각엔, 작가가 그냥 내 얘기를 하면 되는 거야. 내가 여성이고, 또 여성으로 살아온 과정이 있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있잖아. 내 얘기를 그림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게 여성주의 아니겠어? 나에게 '여성주의' 타이틀을 붙여도 좋다 이거야. 내가 가진 힘이 없어도 사람들이 "내게 힘을 주세요" 라고 말한다면, 내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면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거야.

창작자로서 상상력이 늙거나 퇴화하는 게 두렵지는 않으세요? 그건 자연의 법칙이지. 무엇보다 기억력이 많이 쇠퇴한 게 느껴져. 과하게 말하면 그저께 만난 사람도 잘 기억이 안 나. 머릿속이 너무 꽉 차 있으니까 흡수되는 게 아니라 밖으로 뱉어내더라고. 또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분명히 있지. 나름대로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게, 운동이야. 마흔 줄에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하루에 1시간씩 걷자는 나와의 약속을 했어. 지금도 끊임없이 걸어. 주변에서는 지독하다고 얘기하지만 그게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 오늘도 걸어야 해, 인터뷰 끝나고도 할 일이 많아.(웃음)

앞으로 어떤 작가로 살아가고 싶으세요? 딱 하나야.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겠다는 것. 다른 건 없고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 미술을 하고 싶어. 앞으로도 독립운동가들을 계속 그려나갈 거야.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많은 분이 전시를 보러 와주셨으면 좋겠어. 내 그림을 보고 "이게 도대체 뭐예요? 뭘 그린 거예요?" 라고 말해도 돼. 작가라고 해서 권위의식을 갖는 건 정말 싫거든. 그냥 와서 한 사람으로서, 편안하게 날 대해줬으면 좋겠어. 그림을 보러 와주신 분들과 그렇게 공존하고 싶어.


윤석남 작가는 먼 길을 온 취재진을 향해 작업실이 아니라 할머니 집에 놀러온 거라 생각해달라고 거듭 말했다. 내어줄 게 별로 없다며 그릇에 담아낸 정겨운 센베이 과자 하나에 경계는 금세 허물어졌다. 나이나 직업의 간극도 별로 중요치 않았다. 윤석남 작가가 선사한 소박하고 상냥한 그 시간을, 한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CREDIT INFO
에디터
박주연
사진
서민규
2020년 06월호
2020년 06월호
에디터
박주연
사진
서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