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의 여느 아빠들보다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고 자유로운 아빠라고 생각했다. 가정 내 훈육을 늘 자신 있게 맡아왔고, 평생 꿈꿔온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있을뿐더러 부자간의 친분은 어디 내놔도 뒤처지지 않을 사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늘 내 예상을 벗어나곤 한다. 온갖 변수와 돌발 상황을 마주하고 계획과는 다른 결과를 맞닥뜨리는 일이 빈번하다. 의도와는 다르게 아이를 섭섭하게 한다거나, 진심이 서로에게 닿지 않아 오해할 때도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부쩍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특히 더 그렇다.
휴교 중이라 집에서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는 주안이에게 여유로운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이 어느새 나의 첫 일과가 됐다. '아침 공부'를 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내가 안아달라는 요구를 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면 주안이는 순진하게 다가와 나를 꼭 안아준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려는 주안이를 붙잡고 정신없이 뽀뽀를 쏟아부으면 주안이는 왜 자신을 괴롭히냐며 투덜거린다. 엄마랑은 한참 누워 대화도 하고 스킨십도 곧잘 하는 녀석이 왜 아빠와는 3분도 함께 누워 있지 않으려는 건지. 아무리 서운함을 토로해도 "아빠가 너무 세게 안으니까 그렇지!"라며 '팩트 폭격'만 하고 떠나는 녀석의 뒷모습이 그저 섭섭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졌다는 듯 다시 나를 꼭 안아주던 아들이었는데. 빠르게 30까지 세고 "됐지?"라며 빛의 속도로 사라지긴 했지만 못 이기는 척 안아주던 모습을 이제 볼 수 없어 더욱 섭섭함이 몰려온다.
아이가 커갈수록 품에 안는 시간이 줄어간다는 생각에 속상함이 일었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부자는 또 다른 관계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주안이와 단둘이 집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함께 게임도 하고, 장난도 치고, 각자 할 일도 하면서 평온하게 하루를 보냈다. 저녁 시간엔 우리가 좋아하는 피자를 배달시켜 먹었고, 함께 샤워하고 잠들 때까지 서로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을 보냈다. 나는 그날 주안이와 함께한 소소한 일과를 아내에게 들려주었고 내 얘기를 듣던 아내는 우리의 하루를 "친구하고 하루 놀고 온 것 같다"고 평가했다. 솔직히 둘이 티격태격한 부분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이가 편하고 자연스러운 친구 관계 같다는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아들에게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자 의식적으로 다가가면 녀석은 곧장 "아빠! 왜 그래? 이상해!" 라며 한 걸음 물러선다. 자연스럽게, 또 편안하게 천천히 녀석의 친구가 되어가면 될 것 같다. 가끔 섭섭함을 느끼거나 불안감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끈끈한 존재가 되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얼른 주안이가 쑥쑥 자라 나에게 팔씨름을 이기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남자 대 남자가 된 그때는 또 우리 사이가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사랑해, 손주안!
글쓴이 손준호
1983년생으로 연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뮤지컬 배우다. <팬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페라의 유령> 등 다수의 뮤지컬에 출연했다. 지난 2011년 8살 연상의 뮤지컬 배우 김소현과 결혼해 2012년 아들 손주안 군을 얻었다. 뭘 해도 귀여운 주안이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