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불륜남의 탄생
안방극장에 역대급 불륜남이 등장했다. 본처와 상간녀 사이를 저울질하며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라고 당당히 외치는 남자, 바로 JTBC <부부의 세계>의 ‘이태오(박해준 분)’다. 이태오는 불륜을 사랑으로 치부하는 당당함, 재혼 후에도 전처 ‘지선우(김희애 분)’ 곁을 맴도는 지질함으로 완성된 인물이다. 모든 것을 잃은 뒤, 종내 빈털터리로 지선우를 찾아와 자신을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뻔뻔함도 덤으로 갖췄다. 덕분에 ‘국민 욕받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박해준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캐릭터가 캐릭터인 만큼 비난 일색이 예견돼 있었고 웰메이드로 평가받는 영국 BBC 원작 <닥터 포스터>를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애증과 집착이라는 히스테릭한 감정을 오가야 했고 악랄하게, 때로는 비굴하게 굴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되는 ‘나쁜 남자’의 치명적인 매력까지 갖춰야 했다. 배우로서는 여러모로 시험의 무대였다. 박해준 역시 “<부부의 세계>를 선택하기까지 힘들었다. 출연하고 싶었지만 내 능력으로는 못 해낼 것 같아 도망치고 싶었다”고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제작진의 설득 끝에 <부부의 세계>에 합류한 박해준은 그동안 우려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기대 이상을 해냈다. 김희애 최고의 파트너이자, 시청자들의 혈압 유발자로 등극했고 데뷔 14년 만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들어는 봤나? ‘한예종 장동건’
부산 출신인 박해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예종)에 진학하기 위해 상경했다. 연극원 2기로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185cm의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 덕에 재학 내내 ‘한예종 장동건’으로 유명했다. 평소 수더분한 성격으로 알려진 박해준은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외모를 칭찬하면 손사래를 치며 인기를 부인해왔다. 하지만 한예종 1년 선배이자 절친으로 알려진 이선균은 “박해준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난리가 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부부의 세계> 방영 중에도 ‘박해준 실물 후기’라는 글이 화제를 모았다. 가까이서 박해준을 봤다고 밝힌 글쓴이는 “불륜남이라고 욕하기는커녕, 셋째 부인 하겠다고 할 뻔했다”고 털어놔 네티즌들의 웃음과 공감을 얻었다. ‘한예종 시절 이태오’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재된 박해준의 과거 사진도 연일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외모에 비해 인지도 면에서는 늘 아쉬움을 남겼다. 한예종 출신 배우와 감독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았지만 ‘주연’으로 이름을 떨친 영상물은 거의 없었다. 무명 시절이 꽤 길었다. 그럴수록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팠다. 박해준은 연극 극단에서 충무로로, 다시 안방극장으로 무대를 옮기며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갔다. 특유의 야누스적인 매력 덕분에 선악 구분 없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었다. 2012년 영화 데뷔작 <화차>에서는 악랄한 사채업자로,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는 냉혈한 스나이퍼로 분했다. <독전>과 <악질경찰>에서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절대 악인으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독전>은 업계에 ‘연기 잘하는 배우’ 박해준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작품이었다. 이 때문에 한때 대중에게는 ‘악역 맛집’이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물론 악랄한 모습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tvN <미생>의 ‘천 과장’이나 <나의 아저씨>의 ‘겸덕’, 영화 <나를 찾아줘>의 ‘명국’처럼 사심 없는 중년 남성의 표상이 되기도 했다.
꾸준함과 묵묵함, 그리고 번뜩이는 배우로서의 기지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춘 이영애는 “처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 무조건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독전>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있더라. 정말 남편처럼 의지가 됐다”고 극찬했다. 당시 박해준은 적은 분량이었음에도 이영애와 함께 안정감 있는 연기로 극을 이끌었다. <부부의 세계>의 김희애는 “이렇게까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 줄 몰랐다. 컷 이후에 나는 흥분해서 감정이 쉽게 멈추지 않는데 박해준 씨는 바로 편하게 장난치더라. 전환이 빨라 배신감을 느낄 정도다. 괴물 같은 느낌이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연기를 하고 싶다”며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박해준의 키워드 4
#쏟아지는_러브콜
요즘 박해준은 다양한 작품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전까지 악역에 한정된 시나리오를 받았지만 이제는 다양한 얼굴에 걸맞은 배우로 거듭난 것이다. 참여하는 작품의 면면도 화려하다. 5월 말부터는 송강호, 이병헌과 함께 영화 <비상선언> 촬영에 돌입했다. 박해준은 극 중 재난 극복의 컨트롤타워인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실장 역을 맡았다. 촬영을 마친 영화들도 개봉을 준비 중이다. 최민식과 호흡을 맞춘 따뜻한 휴먼극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이성민과 공동 주연한 미스터리 스릴러 <제8일의 밤>을 통해 또 다른 매력을 선보일 예정이다.
#실제_아내는_누구?
한예종 후배였던 배우 오유진과 7년간 유명한 캠퍼스 커플로 사랑을 키우다가 2010년 결혼에 골인했다. 오유진은 1981년생으로 박해준보다 5살 어리다. 연극 무대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박해준과 함께 극단 차이무의 연극 <거기>에 참여한 바 있다. 박해준은 2013년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인터뷰 당시 “충무로에서는 신인이라고 하지만 나이가 적은 편도 아니고 결혼한 사실을 숨기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박해준 부부는 2013년에 득남했으며 2017년 둘째를 낳았다.
#늦깎이_데뷔
32세 나이로 다소 늦게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작은 2007년 연극 <그때, 별이 쏟아지다>다. 이후 <늘근도둑 이야기> <올모스트 메인> <거기> 등 2014년까지 연극 활동을 이어갔고 같은 해 tvN 드라마 <미생>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캐릭터 싸움이 치열했던 <미생>에 중간에 투입돼 부담도 있었으나 말끔한 외모와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박해준이 맡은 ‘천관웅’ 과장의 슈트 핏이 매주 화제를 모았다. <미생>을 계기로 주목받기 시작한 박해준은 <4등> <독전> <악질경찰> 등 굵직한 작품에서 주·조연급으로 활약하며 입지를 다졌다.
#소년과_남자_사이
박해준의 얼굴에는 선악이 공존한다. 감독들에게 매력적인 페이스로 어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예종 동문으로, 평소 온화한 박해준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이정범 감독은 <악질경찰>을 통해 그에게서 ‘야생성’을 끄집어냈다. 이정범 감독은 “조각상처럼 잘생긴 얼굴 안에 야수성과 폭력성이 있다. 이 사람을 눌렀다가 개발하는 느낌으로 터뜨리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반면에 <부부의 세계>의 모완일 감독은 동년배 배우들에게는 없는 ‘순수함’을 발견했다. 모 감독은 “남자 배우는 나이가 차면 아저씨가 된다. 근데 박해준은 소년이 보인다. 체면, 예의, 격식이 없는 순수함이 있다”며 박해준의 얼굴을 극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