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오세훈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시절 그의 인기가 얼마나 '핫'했는지 알 것이다. <동아일보>에서 조사한 '결혼하고 싶은 남성 순위'에서 배우 이병헌을 제쳤고, 그의 에세이는 종합 베스트셀러 10위권을 기록했으며, 당시 톱스타만 찍는다는 광고 모델도 줄줄이 꿰찼다. 오세훈의 등장은 대한민국 변호사의 이미지를 180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훤칠한 키에 말끔한 외모, 귀공자 같은 자태와 센스 있는 말솜씨까지, 고리타분한 변호사의 이미지가 오세훈의 등장으로 새롭게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인지도를 바탕으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이 된 그는 파격적이고 과감한 정치 능력을 인정받으며 2006년 민선 최연소 시장이자 2010년 최초의 재선 서울시장이 됐다. 그가 시장직을 내려놓은 건 재선한 지 1년째 되던 해였다. 시장직을 걸고 무상 급식 주민투표를 실시했고, 결과는 투표율 미달로 개표가 무산되면서 '임기 중 자진 사퇴'라는 불명예를 남긴 것. 이후 한동안 정치판과는 떨어져 '인생 공부'를 즐겼다는 그에게 '서울 광진을'에 던진 출사표의 의미를 물었다.
종로에 이어 또다시 '험지 출마'입니다(오 후보는 2016년 '서울 종로'에 출마해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의원에게 패했다).
쉽지 않습니다.(웃음) 여긴 기본적으로 민주당의 텃밭이에요. 25년 동안 한 번도 보수 성향의 후보가 당선된 적이 없는 곳이죠. 하지만 저 역시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지난 출마 때는 선거 4개월 전에 종로로 이사를 갔어요. 지역 구민들이 어떤 애환과 니즈를 지니고 있고, 제가 뭘 해야 하는지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했죠. 한마디로 아주 얕은 수준의 겉모습만 보고 그곳을 꽤 많이 안다고 판단한 겁니다. 지나고 보니 그 점이 굉장히 후회가 됐습니다. 사랑에 빠지기엔 너무나 짧았던 그 시간들이요. 하지만 광진구는 달라요. 저는 성동구 성수동에서 태어났고, 2011년 시장직 사퇴 이후 줄곧 이곳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전 지금 광진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날이 좋은 날엔 한강 변에 나가 산책을 하고, 각종 편의 시설과 복합 쇼핑몰을 방문해 시간을 보내고, 또 지역 중심을 관통하는 지하철도 이용합니다. 만에 하나 이번 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하더라도 저는 광진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애정이 많아선지 어디에 무슨 일을 하면 지역민들의 삶이 편리해지고 더 쾌적해질지에 대한 생각도 많습니다.
상대는 전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고민정 후보입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정치를 시작한 분이니 정도대로 선거를 잘 치러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 권력자의 힘을 차용하는 정치를 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거예요. 본인을 "구청장, 시장, 대통령까지도 다 연결되는 후보"라고 언급하신 기사를 봤습니다. 글쎄요. 유권자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는 모르나 지역구를 책임지는 정치인으로서 믿을 건 개인의 실력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산 확보, 쉽지 않습니다. 국회에서 예산철에 남의 지역구를 챙겨주는 그런 아름다운 풍토는 정치권에 없어요. 처음 시작한 정치인이니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주시는 유권자들이 계시겠지만 분명 판단은 냉정하게 하실 거라 믿습니다.
패기와 관록의 대결이네요.
정치를 해보니 두 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둘 다 중요하죠.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시행착오를 겪어본 경험입니다. 실패가 결국 사람을 만드는 거죠. 저도 사실 패기에 차 실패를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시각도 달라졌고, 생각도 많이 바뀌었어요. 어려움에 맞닥뜨렸을 때 그러한 바탕이 자연스레 나온다고 생각해요. 제가 30대 후반부터 정치를 시작해 올해로 20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마주한 일련의 상황이 분명 앞으로 제가 결정하고, 판단을 내리는 모든 일에 지혜로 발휘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튜브 채널 <오세훈TV>의 유튜버로도 활약 중이에요.
요즘은 정책도 중요하지만 제 삶 자체를 보여주는 일도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유권자들은 보통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시잖아요. 자신이 투표하려는 정치인의 됨됨이나 내면 세계를 궁금해하는 경향이 커졌어요. 그런 의미에서 유튜브나 SNS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일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무조건 정책으로 승부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라고 여겼어요. 근데 지금은 그런 세태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주변의 권유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됐어요. 처음 유튜브를 개설하고 주야장천 정치 이야기만 했더니 구독자 수가 크게 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오세훈의 영화로 본 세상'을 시작하니 많은 분이 제 채널을 찾아주고 계세요. 어떤 영화를 선택했고 또 어떤 리뷰를 하는지 그 속에 제 인생관이나 생각의 지평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잖아요. 인위적으로 나의 생각이 이렇다고 피력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제 관심사를 들여다보며 '정치인' 오세훈이 아닌 '인간' 오세훈에 대해 느낄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들의 출연도 반가웠어요.
평소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하니 일상을 함께하는 가족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손자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아요. 한창 예쁠 나이거든요. 딸과 바로 마주 보는 아파트에 거주 중인데,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작년까지는 같은 동네지만 걸어서 5분 거리에 떨어져 살았어요. 가까운 거리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편하게 오고 가기에는 불편함이 있어 쉽게 부르거나 찾아가지 못했죠. 이제 아파트 단지를 지나 엘리베이터만 타면 되니까 훨씬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사위와도 더 친해졌어요.
첫사랑과 결혼한 러브스토리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한 친구가 있었어요. 사실 저보다 1년 선배인데 디스크로 한 학년을 쉬면서 같은 학년 친구가 됐죠. 허리가 아파 수업에 못 나오는 날이 많아 제가 수업시간에 필기한 노트를 들고 친구 집을 자주 들렀습니다. 그때 만난 그 친구의 여동생이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웃음) 고등학교 때 이렇다 할 연애를 한 건 아니고, 함께 스터디를 하며 오빠 동생으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 같은 대학교에 진학해 캠퍼스 커플이 됐죠. 그때만 해도 고려대에 여학생이 많이 없던 시절인데 몇 안 되는 여학생 중 하나를 꿰차고 다니니 얼마나 많은 질시가 있었겠어요. 그렇게 눈치를 보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서로 챙겨주기도 하면서 연애를 했습니다. 이후 대학원 2년 차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와이프와 결혼을 했어요.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기 전 결혼식부터 올리고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장모님의 의견을 적극 수렴했습니다.(웃음) 스물네 살 때니 또래에 비해 결혼이 빠른 편이었죠.
로맨티스트이시네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와이프는 중학교 시절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더라고요. 저는 아내가 첫사랑이자 유일한 상대라서 억울함도 있지만 항상 제가 하는 일을 격려하고 응원해주는 이 사람이 있어 행복합니다.(웃음) 요즘은 서로 바빠 얼굴도 못 볼 때가 많아요. 전 선거운동을 하다 보니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 스케줄이고, 아내는 낮엔 대학교수로 학생들 가르치고 밤엔 극단 연출가로 활동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 바쁘게 지내는 건 좋지만 끼니는 잘 챙겨 먹는지, 영양 섭취는 잘하는지 늘 걱정입니다.
오히려 외조를 해주셔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발명한 게 '하비 주스'입니다.(웃음) 손자 녀석이 '할아버지' 발음이 안 돼 '하비'가 만든 주스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러요. 맛은 없어요. 토마토를 베이스로 몸에 좋다고 알려진 채소를 몽땅 넣고 갈아 만든 주스거든요. 조금이나마 균형 잡힌 영양소 섭취에 도움이 될까 싶어 아침마다 아내에게 대접하고 있습니다.
따님도 워킹맘이라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이를 키우는 젊은 세대들을 위한 정책을 생각하게 됩니다. 손주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맡길 곳이 없어 친정과 시댁에 부탁한 적이 꽤 있어요. 갑자기 아이가 아프거나, 어른 혼자 외출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당장 아이를 돌봐줄 곳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곳이 고작 쇼핑몰뿐이라는 것도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껏 뛰어놀 나이에 미세먼지를 피하려 실내만 찾아야 하는 현실이 속상해요. 무료로, 혹은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키즈 시설이 많이 생기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주말에 못다 한 업무와 육아까지 하는 엄마 아빠들이 많은데,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고 엄마 아빠도 마음 놓고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설들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면서 스스로 약속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공직 경력을 바탕으로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고요. 그렇게 9년을 살았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책을 쓰고, 봉사활동을 다니며 공직 생활에서 얻은 식견과 경험을 공적 영역에 환원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요.
시장 사퇴 이후 9년 동안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아프리카, 페루, 중국, 영국 등 코이카(KOICA) 해외 자문단으로 봉사 활동을 많이 다녔습니다. 제 나름대로 인생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진 거죠. 가르쳐주러 간 봉사 활동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양대학교 특임 교수와 고려대학교 석좌 교수를 지냈고, 작년에는 <미래>라는 책도 펴냈어요. 제가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면서 스스로 약속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공직 경력을 바탕으로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고요. 그래서 본업인 변호사로 로펌에서 고문을 맡게 됐을 때도 보수는 초봉 변호사의 연봉만큼만 달라고 했습니다. 로펌이 만약 나에게 억대 연봉을 준다면 그 대가는 저의 영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허용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9년을 살았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책을 쓰고, 봉사 활동을 다니며 공직 생활에서 얻은 식견과 경험을 공적 영역에 환원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요.
간단해 보여도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저는 30대에 이미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라는 사람에 비해 과분한 사랑이었죠. 변호사로서 <오 변호사 배 변호사>에 출연했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면서 제가 사회에 기여한 것보다 사회가 제게 가져다준 것이 훨씬 많았습니다. 광고 한 편 찍고 큰 액수의 돈을 받는 것도 황송할 따름이었고요. 그때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도대체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했기에 이토록 큰 사랑을 받는 걸까, 이렇게 갑자기 복이 많이 오면 안 좋은 일도 많이 생기는 게 아닐까' 라고요. 그때 퍼블릭 마인드가 생겼어요. '무엇으로 내가 이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를 처음 생각하게 된 거죠. 지금까지 그 마음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처음 정치판에 뛰어들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변호사로서 첫 판례를 받아낸 일조권 소송을 통해 환경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환경에 관련된 시민단체 활동도 하게 됐지요. 시민단체 활동을 해보니 입법 로비를 하거나 행정부에 정책 로비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일찍 정치의 필요성에 눈을 떴어요. 어떤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 정치를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공무원들에게 부탁해서 정책을 만들고, 국회의원들에게 부탁해서 법을 바꾸는 게 시민단체의 주된 활동이라 자연스레 정치의 힘과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이죠. 국회의원이 돼 직접 법을 만들고, 사람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정책을 만드는 것이 사회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정치를 시작할 때 마음과 지금 마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게 지식과 정보, 경험이 쌓이면서 초심이 더욱 두터워졌어요. 요즘 젊은 세대는 제가 그저 '무상 급식'에 반대한 '전 서울시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겁니다. "가난한 아이에게 밥을 더 주고, 부잣집 아이에겐 밥을 줄 필요가 있냐"는 제 주장이 누명과 오명으로 '아이들 밥그릇이나 뺏는 나쁜 사람'처럼 덧칠해졌죠. 제 주장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는 덮였고요. 그럼에도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제게 보여준 사랑과 지지를 저는 되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오로지 서울의 도시 경제력과 서울 시민들의 삶의 질만 생각하며 일에 빠져 살았던 그때처럼요. 지금은 그때의 열정과 더불어 유연함이 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이 아닌 인간 오세훈의 꿈은 뭘까요?
10년 정도는 더 에너제틱하게 일하고 싶고, 이후에는 그동안 저 때문에 외로웠을 가족들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섭섭한 것이 있다면 손자가 할아버지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한다는 거예요. 근데 돌이켜보면 우리 아이들한테도 저는 그런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을 사느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어요. 온전히 '인간' 오세훈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좋은 할아버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으로 인생의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