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스튜디오 곳곳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엔 리듬체조 선수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채 환하게 웃는 손연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언제 찍은 것이냐는 물음에 손연재는 배시시 웃으며 "워낙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손연재는 한국 리듬체조의 역사를 새롭게 쓴 주인공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국내 최초로 개인 종합 동메달을 획득했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매트 위를 우아하게 걷던 '체조 요정'은 운동선수의 삶을 내려놓고 여느 20대와 같은 캠퍼스 생활을 즐기다 다시 리듬체조로 돌아왔다. 그녀는 국제 주니어 리듬체조 대회 '리프 챌린지 컵'을 주최하는 것을 시작으로 리듬체조 클래스 '리프 스튜디오'를 오픈하며 인생 2막을 열었다.
얼마 전 두 번째 '리프 챌린지 컵'을 개최했죠? 오랜만에 들려온 소식에 반가웠어요.
은퇴하고 3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절 잊지 않으시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어 감사해요. 은퇴 후 첫해에는 대학생활을 하며 지냈고, 두 번째 해에는 제1회 리프 챌린지 컵을 개최했어요. 그리고 2019년엔 리듬체조 스튜디오 '리프스튜디오'를 오픈했죠.
24살에 은퇴했어요.
체조 종목은 보통 10대 후반에 은퇴하는데 저는 오랫동안 활동한 편이에요. 5살에 시작해 19년 동안 선수로 활동했고, 마음의 준비를 해온 터라 생각보다 덤덤했어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적응하는 건 어땠어요?
되돌아보면 전 번아웃 상태였어요. 선수가 지켜야 하는 체계적인 일상이 답답했고 때로는 버거웠거든요. 그래서 은퇴 후 우선 나의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지내보자고 결심했죠. 학생 신분이라 대학교에 다니면서 천천히 일상에 적응했어요.
학생 손연재의 캠퍼스 라이프가 궁금해요.
훈련 때문에 해외에 체류한 시간이 많았던 게 아쉬워서 열심히 즐겼어요. 마지막 두 학기 동안 최대 학점을 이수했는데 성적이 우수한 건 아니었지만 열심히 했어요. 서툰 실력으로 PPT를 만들면서 과제를 했고 공강 시간에는 동기들과 시간을 보냈죠. 그러면서 '대학생들은 이런 생활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또래 친구들과 생활해보니 어땠나요?
저와 비슷했어요. 사실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 걱정이 없을 거란 환상이 있었는데 은퇴 후에 '나 이제 뭐 하지?' '어떻게 살지?' '무슨 일을 하지?'라는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친구들도 저처럼 미래를 걱정하며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은퇴가 알려진 후 연예계 진출설이 있었죠.
감사하게도 주변에서 제안을 많이 해주셔서 '방송 쪽 일을 해야 하나?'라고 고려한 적도 있어요. 체조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정리되니까 생각이 뚜렷해졌어요. 많은 사람이 예상하는 일이 아닌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었죠.
'나의 미래는 리듬체조'라는 답을 내렸군요.
하지만 저를 한 카테고리 안에 가두고 싶진 않아요.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저를 한길로 모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연예인이면 연예인만 해야 하고, 지도자면 선수만 육성해야 된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요즘은 멀티 시대잖아요. 가능하면 유연한 사고를 하면서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고 싶어요.
다양한 타이틀을 얻고 싶다는 의미죠?
전공과 거리가 먼 일을 시작하는 건 어렵겠지만 리듬체조에서 파생되는 일들엔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리프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지도자 역할을 하고, 리프 챌린지 컵을 주최하는 기획자로 활동하는 것처럼요.
리프 챌린지 컵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선수 때부터 생각해왔던 거예요. 해외에서는 은퇴한 선수들이 대회를 여는 경우가 많은데 국내에선 전무해 아쉬웠거든요.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가 없어 어린 선수들이 대회를 경험할 기회가 적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요. 그래서 경험을 살려 내가 선수라면 참여하고 싶은 대회를 만들자고 생각했죠.
국내가 아닌 국제 대회라니, 클래스가 남달라요.
아시아 투어를 하며 코칭을 한 적이 있는데 해외에 있는 선수들 역시 국제 대회를 찾더라고요. 해외 선수들에게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좋아 국제 대회를 열면 많은 선수가 참가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2019년 열린 두 번째 대회에는 7개국에서 150명 이상의 선수가 참여했어요.
이번 대회에서 갈라쇼를 했어요. 오랜만에 선 무대는 어땠나요?
선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행복했어요. 그런데 3년 동안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아 기량의 40% 정도밖에 발휘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커요. 올해에도 갈라쇼를 하려면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주최자로서 보완하고 싶은 점은 없나요?
일반 대중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대회를 구성해보려고요. 야외에서 원데이 클래스를 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또는 페스티벌처럼 진행하면 어떨까요?
"선수 시절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조심했어요.
컨디션이 좋다고 하면 '금메달 예정'이라고 기사가 나와 스트레스를 받고 때론 예민해지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선수가 아닌 지금의 삶이 좋아요.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일에 도전하는 것이 즐거워요."
2019년 3월 리듬체조 클래스인 '리프스튜디오'를 오픈했습니다.
리듬체조를 대중화하고 싶어 용기를 냈어요. 많은 분이 리듬체조는 어려운 스포츠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어떻게 잘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리듬체조는 음악에 맞춰 하는 운동이라 처음엔 수강생들이 어색해하지만 막상 시작하며 어느 순간 몰입하면서 즐거워해요. 얼굴을 보면 느껴지잖아요. '아, 지금 수강생들이 몰입하고 있구나'라고요. 그 순간에 짜릿함을 느껴요.
커리큘럼은 어떻게 구성하나요?
아이와 일반인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만들고 있어요. 자세 교정과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표현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 클래스도 있어요. 스트레칭 위주의 베이식 클래스, 리본이나 볼을 활용한 클래스, 프리핸드 클래스, 작품 클래스 등이 있죠. 2020년에는 발레나 필라테스와 접목한 클래스를 만들려고 해요.
지도자라는 타이틀은 어때요?
제가 잘 아는 것을 하니까 즐거운데 아직까진 어색해요. 지도자보다는 선수 입장이 더 이해되기도 하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스튜디오를 시작했는데 오픈한 지 1년 가까이 흐르고 나니 서서히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익숙해지겠죠.
국가대표 선수를 키우고 싶다는 욕심도 있죠?
계획하진 않았지만 시스템을 구축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선수를 키우게 되지 않을까요? 만약 선수를 양성하는 지도자가 되면 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상의 실력을 길러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하니까 고민이 깊어질 것 같아요.
동시에 대표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습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대표 손연재라니, 멋있다'라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런데 때로는 누가 대신 대표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만큼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직책이에요.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야 하고, 직원들이 노력한 만큼 제가 보답을 해야 하니까요.
리프스튜디오는 '손연재'의 소속사이기도 한데, 선수를 영입해 매니지먼트로 확장할 가능성도 있나요?
쉽게 말하면 1인 기획사인데, 제가 매니지먼트를 직접 하니까 수월한 부분이 있어요. 매니지먼트 운영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만약 리프스튜디오 출신의 선수들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매니지먼트로 확장될 거라고 여겨요.
책임감이 무겁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해 보여요.
선수 시절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조심했어요. 컨디션이 좋아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금메달 예정'이라고 기사가 나왔고 안 좋은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으니까요. 유쾌하게 지내려고 했지만 때로는 예민해지기도 했어요. 되돌아보면 여러 가지 압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지금의 삶이 좋아요. 일을 하면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긴 하지만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스트레스예요. 그동안 해보지 못한 일에 도전하는 것이 즐겁거든요.
이상형은 '대화하고 싶은 사람'
인스타그램을 보면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다양한 시도를 하는 편이에요. 꽃꽂이를 꾸준히 하고 있고 춤추는 것을 좋아해 춤도 배웠어요. 요리도 배웠는데 만드는 과정은 즐겁지만 준비와 마무리 과정은 지루하더라고요. 최근엔 베이킹에 도전했는데 재미있었어요. 기회가 되는 대로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하는데 다 잘하진 못해요. 그럴 때면 '내가 체조를 잘하는 것이었구나'라는 걸 느끼죠.
심지어 여행을 떠나서도 클래스에 참여한다고 들었어요.
여행을 다니면서 리프레시하는데 꼭 클래스에 참석하려고 해요. 마땅한 클래스가 없으면 댄스 스튜디오를 찾기도 하는데, 되도록 운동 클래스를 들으려고 하죠. 최근 미국에 가서도 요가 클래스를 들었어요.
벤치마킹하고 싶었던 곳은 없었나요?
영국의 댄스 스튜디오인 파인애플 스튜디오요. 발레·힙합·재즈·에어로빅 등 장르를 나누지 않고 모든 장르의 댄스를 가르쳐주는 곳이에요. 본인이 듣고 싶은 것을 골라 들으면 되는 시스템인데, 제가 꿈꾸는 공간이었어요. 리프스튜디오를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복합적인 문화 공간으로 만들고 싶거든요.
모든 타이틀을 덜어낸 인간 손연재는 어떤 고민을 하나요?
저 역시 다이어트가 고민이에요. 많은 분이 체조 선수는 살을 잘 뺄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데 선입견이에요. 타고난 몸이 아니라 꾸준히 노력해야 하거든요. 저 역시 식단 조절이 가장 어려워요.
다이어트 고민을 한다니 믿기지 않아요.
무엇보다 옷을 입을 때 스트레스 받아서 다이어트를 하려고 해요. 옷이 끼면 핏이 예쁘지 않고 움직이기 불편하잖아요. 최근엔 피부 관리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갑자기 피부가 건조해진 게 느껴져 일주일에 한 번씩 피부 마사지숍에 가려고 노력해요.
여느 20대와 같은 고민을 하는군요?
저도 또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살찌는 음식도 좋아하고 친구도 좋아해요.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떨고 맛집도 찾아가고, 때로는 술을 마시기도 하고요. 주량요? 분위기를 맞출 정도인 것 같은데 술맛은 모르겠어요.
한창 연애에 관심이 많을 나이예요. 연애는 안 해요?
좋은 분을 만나면 연애를 하겠죠. 그런데 공개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요. 연애가 알려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상대방이 불편할 것 같아요.
이상형은 어떤 스타일인가요?
편하고 문화적인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래야 대화할 수 있는 주제가 많을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운동선수와 연애를 한다고 가정하면, 굳이 묻지 않아도 상대방이 쉬는 날 어떤 생각을 할지 알 것 같아요. 저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테니까요. 그러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무거운 책임감의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대화를 나누고 나니 평범한 소녀 같아요.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 슈트도 입고 스타일도 바꿔봤는데 잘되지 않는 것 같아요.(웃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겠죠? 분명한 것은 리듬체조로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점이에요. 제가 만드는 새로운 콘텐츠를 기대해주세요.
인터뷰 말미에 손연재는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를 보고 '올라프'에 반해 인형뽑기 기계에서 올라프 슬리퍼를 뽑았다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토록 천진난만한 소녀는 오랜 고민 끝에 제일 자신 있는 분야로 돌아왔다. 손연재의 도약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