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전성기
정확히 2006년, 허영만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타짜>가 개봉했다. 화투라는 영화의 소재는 익숙하지만 신선했다. 개봉 20일 만에 관객 수 500만 명을 기록한 그 영화는 각종 개그 프로그램과 광고를 통해 온갖 패러디를 쏟아냈다. 고니, 짝귀, 아귀, 평경장, 정 마담 등 영화 속 캐릭터들의 대사는 물론 사소한 행동과 표정까지 오랜 시간 회자됐다. 수많은 명장면과 어록을 탄생시킨 <타짜>는 그렇게 국민 영화가 됐다. 그로부터 13년 뒤, <타짜>가 부활했다. 이번엔 단 10분 남짓 출연한 배우 김응수가 그 중심에 섰다. 올해 3탄 격인 <타짜: 원 아이드 잭>이 개봉했는데 오히려 원작의 곽철용 캐릭터가 더 주목받는 현상이 벌어졌다. “묻고 더블로 가”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등 ‘곽철용(김응수 분)’의 모든 멘트는 신드롬이 됐다.
“<타짜>가 한순간 다시 관심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개봉 이후 관심이 끊임없이 이어져온 결과죠. 13년간 이토록 충성 팬을 거느리는 영화도 없을 거예요. 매년 열 번 넘게 본다는 분도 있고, 영화 대사를 다 외울 만큼 즐겨 본다는 친구도 있고요. 실제로 젊은 친구들을 마주치면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저도 기억 못 하는 대사까지 줄줄 다 외우고 있어서요.”
<타짜>는 이상한 영화다. 결말을 아는데도 긴장되고, 매년 봐도 새롭다.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촌스럽지도 않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관객과 함께 늙어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강제 전성기가 비단 영화 자체의 힘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요즘 유튜브다 뭐다 영상의 힘이 엄청나잖아요. <타짜> 충성 팬들의 사랑이 그런 영상의 발달과 함께 신드롬을 만들었다고 봐요. 예전에는 영화를 다시 보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던 팬들도 직접 움직이게 된 거죠. 팬들이 직접 곽철용으로 변신해 영상에 출연하고, 만들고 편집하면서 새로운 ‘팬 문화’를 만들어냈어요. ‘우리도 <타짜>를 만들어보자. 우리도 타짜가 되어보자’ 하면서요. 그럼 또 누군가는 ‘너만 만드냐? 나도 만든다’면서 이렇게까지 불어나고 확산됐다고 생각해요.”
그럼 왜 하필 곽철용일까?
“극중 곽철용이라는 캐릭터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시기적절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또 건달이지만 정의롭고 신사적이죠. ‘올림픽대교가 막히는 데요’란 말에 ‘마포대교는 무너졌냐?’고 맞받아칠 줄 아는 남자, 화투판 위에서 큰돈을 잃어도 ‘묻고 더블로 가!’라고 외칠 줄 아는 남자요. 요즘 먹고살기 팍팍한 세상이잖아요. 속 시원히 국민들의 ‘한 방’을 대신해주는 곽철용이 젊은 친구들의 센스와 만나 위트 있는 캐릭터로 재탄생했다고 생각해요.”
알고보니 촬영 시작 일주일 전에 합류한 작품이었다. 곽철용은 김응수가 직접 고른 배역이다.
“최동훈 감독과 친분이 꽤 있었어요. <타짜> 촬영 전 시나리오를 주더라고요. 직접 마음에 드는 역할을 한번 골라보라고. 그렇게 시나리오를 쭉 읽게 됐는데, 그중 곽철용이 눈에 띄었죠. 중심을 딱 잡고 끌고 가는 역할로요.”
그가 출연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 속 최주동 검사의 인기도 심상치 않다.
“누군 깡패 수사 안 해본 줄 알아, 인마?” “너 최형배랑 최익현이 집안사람인 거 알고 있었어?” 등 주옥같은 대사가 <타짜>와 함께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요즘은 고속도로 휴게소나 식당에 가면 또래보다 ‘자식뻘’ 팬들의 반응이 더 뜨겁다. 멀리서 달려와 그의 필모그래피 속 영화 대사들을 줄줄 읊는 것도 어렵지 않게 겪는 일이다. 갑작스러운 인기에 가끔 불편할 때도 있지만 세대에 연연하지 않고 나이 든 ‘아재 배우’를 좋아해주는 팬들이 그저 감사하다.
“급하게 가야 하는데 사인이나 사진을 요청하면 난감할 때도 있죠. 그렇지만 그분들이 제 상황을 아는 건 아니잖아요. 좋은 마음에 표현하시는 건데 안 해드릴 수도 없고요. 당황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것마저 좋습니다.”
나도 순정이 있다
건달 곽철용은 말한다. “화란아, 나도 순정이 있다. 적금 붓고 보험 들고 그러고 산다.” 냉철하고 무정해 보이는 자신을 어필하는 곽철용식 표현이다. 차가워 보이지만 사랑 앞에선 따뜻한 남자. 배우 김응수도 마찬가지다.
“와이프가 첫사랑이자 첫 여자친구였어요. 그때 그 시절 시골에서는 뭐, 저 같은 놈이 많았을 겁니다. 지금은 순정남이다 뭐다 치켜세우지만 먹고살기도 바쁘고, 별 관심도 없어서 아내 말고 다른 여자는 만나본 적도 없어요.”
그는 촬영장이나 아침 산책길에, 예쁜 풍경을 발견하면 아내에게 사진으로 찍어 보낸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나 그림처럼 맑은 하늘은 꼭 아내와 공유하고 싶다.
“저녁도 가능하면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가려고 해요. 늦은 시간에 식사 준비랑 설거지까지 하게 만드는 게 싫어서요. 나만 늙는 거 아니잖아요. 서로 배려할 수 있는 부분은 배려하면서 살아야지요.”
그는 ‘사랑꾼’이라는 표현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부부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일 뿐. 아내도 마찬가지다. 무명 시절부터 그의 아내는 배우로서의 성공을 바라며 조급해하거나 재촉한 적이 없다.
“연극배우로 수입이 거의 없어도 절 지지해줬죠. 제가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기 위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니까.”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인 김응수는 1981년 극단 목화 단원으로 연극계에 입문했다. 연극배우 시절, 연봉은 30만원이었다. 힘들고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니까 저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늘 당당했어요. 오히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죠. 연기에 대해 하나하나 습득해가는 배움의 과정이었으니까요. 혼나기도 하고,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도 많이 했지만 매일이 성장의 연속이었어요. 지금은 내가 연기를 잘하든 못하든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가끔은 내가 틀린지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돈은 못 벌어도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선배들이 있고, 뭐든 도전할 젊음이 있는 시절이었다. 당시 김응수의 꿈은 무한했다. 그는 약 10년간의 연극배우 생활을 뒤로하고 연출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는 신문 배달을 하며 어학원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뒤 이마무라 쇼헤이의 일본영화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한 그는 이후 국내에서 영화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가 처음 출연한 한국 영화는 일본에서 촬영한 <깡패수업>이었다. 처음엔 일본영화학교 선배인 이상국 조감독의 권유로 연출부에 합류했다. 촬영 도중 클럽의 웨이터가 필요했는데, 웨이터 의상이 맞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단역으로 출연하게 됐다. 정말 우연이었다. 그는 대답만 하면 되는 장면에서 번뜩이는 재치로 애드리브를 했다. 감독과 조감독들이 웃겨서 난리가 났다.
“(명)계남이 형이 ‘너 왜 손님들에게 외상을 주고 그래. 외상 주지 마’라고 대사를 하면 ‘네, 네’라는 대답만 하면 되는 신이었어요. 근데 한마디 더 쳐주는 게 맛깔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술 먹고 돈이 없다는데 어떻게 하냐’고 애드리브를 해버렸죠. 그날 촬영장 스태프들이 빵 터진 겁니다.”
이후 큰아이가 태어나며 그는 한국에 돌아왔다. <깡패수업>에서 함께 작업했던 스태프들이 그때의 인연으로 불러주면서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리고 38년간의 긴 연기 활동. 그러나 연출은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다.
“요즘은 나이도 들고 힘이 빠지니까 연기를 하면서 연출까지 도전하긴 힘들더라고요. 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체력이 됐죠. 하지만 연출의 꿈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에요. 마음속으로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어루만지고 다듬고, 물도 주고 영양가도 주고 있어요.”
연기적으로는 더 다양한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다. 판사, 검사, 기업 대표 등 50대 이상 배우가 맡는 역할은 너무 한정적이라 아쉽다.
“들러리가 아닌 50~60대가 메인인 멜로를 해보고 싶어요. 외국에서는 60대도 70대도 당당히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되잖아요. 우리나라도 중년 배우들의 연기 폭이 넓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장르가 사랑받으면 좋겠어요.”
저는 ‘수처작주’라는 말을 좋아해요. 꿈을 크게 가지면 노예로 사는 거예요. ‘내년에 무조건 대스타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5년 뒤 스타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봐요. 스타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멋진 시간이 될 테니까.
꼰대로 늙지 않는 법
김응수는 촬영 현장에서 만나는 젊은 배우들과의 관계에 각별히 신경 쓴다. 일명 ‘꼰대’로 늙지 않기 위해서다.
“후배들이 얼마나 어려울지 먼저 생각해요. 제가 그들을 대하는 것보다 그들이 절 대하는 게 더 어렵잖아요. 그래서 인사만 받고 거리를 두기보다는 작품 이야기나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누려고 노력해요. 내가 선배고 넌 후배라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는 같은 동지고, 협력자고, 창조자라는 생각으로요. 연기는 팀워크가 좋으면 결과물이 훨씬 더 좋으니까요. 산 세월은 제가 더 많아도 젊은 친구들에게 배울 점이 더 많을 수 있어요.”
그는 후배들에게 ‘벽’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다. 스스로 만든 벽에 갇혀 나만의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무엇보다 미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를 막론하고 다 함께 친구가 되는 문화. 그게 바로 ‘꼰대 아닌 어른’ 김응수가 원하는 세상이다. 후배들의 세계에 대한 관심도 많다. 요즘 젊은 연기자들은 어떤 연기를 하고, 어떤 작품을 선호하는지 자주 접하고 가까이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두 딸에게도 친구 같은 아빠다.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며 크게 간섭하지 않는 부녀지간을 유지 중이다.
“자취하는 큰딸, 유학 중인 둘째 딸 모두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중이에요. 나도 내 인생이 있고, 아이들도 아이들의 인생이 있으니까요. 물론 둘 다 알아서 잘하는 아이들이니까 덜 걱정되는 것도 있고요. 딸들도 그게 더 편할 거예요.”
38년 차, 59세 배우의 뒤늦은 전성기는 많은 무명 후배에게 귀감이 됐다.
“국민 타자 이승엽도 9회 말까지 타석에 고작 많아야 네 번 나옵니다. 그렇다고 네 번 다 홈런을 치지도 않아요. 그래도 이승엽은 최고의 선수잖아요. 배우도 같다고 생각해요. 기대보다 잘 안 되는 작품도 많고, 아쉽게 마무리되는 작품도 있겠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 이승엽의 홈런처럼 크게 한 방 맞는 날이 오는 겁니다.”
그는 모두가 각자 서 있는 그곳에서 ‘지금, 현재’ 최선을 다하면 그게 최선의 노력이라 말한다.
“저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을 좋아해요. 꿈을 크게 가지면 노예로 사는 거예요. ‘내년에 무조건 대스타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5년 뒤 스타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봐요. 스타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멋진 시간이 될 테니까.”
김응수는 요즘 진정한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90세 노모와 마주 앉은 밥상 위, 바로 거기에 삶의 이유가 있다.
“어머니께는 제가 어떤 작품으로 사랑받고 어떤 유행어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제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말씀해주시죠. 제가 세계적인 톱스타가 되면 뭐 합니까. 바빠서 어머니랑 밥도 한 끼 못 먹을 텐데요. 저는 어머니와 밥 한 끼 함께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할 뿐입니다.”
오랜 시간 다져온 ‘인생 내공’ ‘연기 내공’ 덕분에 그의 ‘강제 전성기’는 꽤 오래 이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