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9.1%(닐슨코리아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SBS 드라마 <VIP>에서 돌연 휴직하고 비밀을 간직한 채 돌아온 VIP 전담팀 과장 '이현아'로 활약 중인 이청아는 자신이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영민한 배우예요." 소속사 관계자가 그녀를 설명한 한마디처럼, 아주 영민하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때 행복하다. 핑크빛 치마에 스틸레토 힐을 신었을 때보다 시크한 블랙 팬츠에 스니커즈를 매치했을 때가, SNS보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손으로 일기를 쓸 때가 더 행복하다. 또 여행을 떠나선 쇼핑몰보다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 도시에서 제일 큰 책방을 찾아가는 게 좋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댄서 혹은 '자우림'의 김윤아 같은 로커가 되고 싶다는 그녀는 '표현'과 관련된 것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VIP>의 인기가 뜨거워요. 그중 '현아'에 대한 관심도 상당하고요.
드라마를 하면서 지인들의 메시지를 이렇게 많이 받은 게 처음이에요. 현아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강해 보이지만 상처가 많은 인물이에요. 극이 전개되면서 그녀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알려지면 더 흥미진진해질 거예요(인터뷰 당시 <VIP>는 4회까지 방영됐다). 그런 점 때문에 현아란 캐릭터에 흥미를 느꼈거든요. 현아에 이청아의 색을 입히고 싶다는 의지가 불타올랐죠.
현아의 스타일 또한 화제입니다.
한 캐릭터를 만나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할 때 제가 지닌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기분이에요. 현아라는 인물의 성격이나 트라우마를 의상에 반영하고 싶었어요. 지금의 현아는 목까지 꽉 채워지는 블라우스를 입거나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지만 과거에는 다양한 디자인에 화사한 컬러의 옷을 즐겨 입었어요. 그녀가 나중에 왜 그렇게 변했는지, 시청자들이 알아봐주시길 기대하고 있어요.
현아와 이청아의 스타일이 비슷한가요?
사실 이청아라면 소화하지 못할 옷이에요. 옷은 그 사람의 취향과 성격, 습관을 반영하잖아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스마트폰과 립스틱, 지갑만 들어가는 미니 백을 들고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처럼요.
이청아의 스타일은 어떤데요?
저는 노트, 필통, 책이 다 들어가는 백팩이 편한 사람이에요. 트렌드에 민감하진 않지만 미니멀한 스타일과 블랙을 사랑하고 입었을 때 편안한 옷이 좋아요. 내 몸이 편하게 움직이는 옷을 입어야 마음에 들어 오래 쓰더라고요. 이제 내 몸이 어떤지 알고, 어떻게 변할지도 아니까 쇼핑하는 게 편해졌어요. 과거엔 마음에 쏙 드는 아이템을 발견하면 곧바로 샀는데, 요즘엔 '내가 이 옷을 한 달에 열 번 이상 입을 수 있을까? 그렇게 입으면서 1년 이상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해요.
그렇게 되기까지 시행착오는 없었나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청아의 이미지에 맞추거나 트렌드에 따라 옷을 입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청아다운 애티튜드가 나오지 않으니 보는 사람들이 어색해했죠. 서른 살이 되고선 여성스럽게 입어야 할 것 같아 스타일을 바꿨는데 그것도 저하고 맞지 않았어요. 큰마음 먹고 예쁜 구두를 사서 신었는데 제가 좀 터프하게 걸어서인지 하루 만에 망가지더라고요. 그 후 나에게 편한 옷을 입자고 생각했어요.
나에게 맞는 스타일을 받아들이게 된 거죠.
재작년에 사용한 다이어리 첫 장에 이런 문구가 있었어요. "안 되는 것을 포기하는 지혜와 해야 할 것에 도전하는 용기를 달라." 사람의 결은 어느 정도 타고나잖아요. 나에게 안 맞는 옷을 입고 불편해하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죠. 포기할 줄 아는 게 인생의 지혜인 것 같아요.
다이어리는 매일 쓰나요?
기억하고 싶은 날에 써요. 예전엔 한밤중이나 자기전에 썼는데, 요즘엔 기록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바로 적어요. 밤에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면서 불면증이 생겼었는데 어딘가에서 하루가 못마땅한 사람들이 죄책감을 해소하려고 밤에 움직이는 거라는 말을 듣고 바꿨어요. 종이에 적는 습관도 바꿨어요.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은 종이에 적고, 아이디어는 스마트폰 메모장에, 때로는 음성 메모도 해요.
이청아는 '기록'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2014년 지병으로 별세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우연히 녹음했던 음성 메모에 담긴 목소리를 듣거나 대학 시절 처음으로 연출했던 작품에 '엄마' 역으로 출연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를 추억한다.
어머니를 추억할 기록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네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은 많은 후회가 남는 일이에요. 엄마가 여러 번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했는데,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됐어요. 그로 인해 어떤 것도 미루지 말고 하자는 교훈을 얻었어요. 또 싸울 때도, 화해할 때도, 사랑할 때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도요. 전에는 어떤 것이든 나중에 할 수 있다 여기고 열심히 하지 않았거든요. 요즘의 전 심심하지만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어요. 내 인생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걸 깨닫고 나면 약간의 초조함과 용기가 생기고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일을 실천하게 되더라고요. 어머니가 제게 주신 선물이죠.
과거의 이청아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저는 돌다리를 열심히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조심성이 많아 준비 없이 도전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외유내강, 중용과 같은 단어를 좋아했고요. 그런데 도전하는 길이 진흙탕일 수도 있지만 겪어봐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지금의 삶에 만족하나요?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걸 알았어요. 어제 한 분이 제 SNS 메시지로 어머니가 이제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으셨어요. 그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줬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제게 어느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슬퍼할 거예요.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은 강해요.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나의 마음부터 챙기세요." 저는 당시 제 마음을 돌보지 않고 저보다 5살 어린 동생이 안타깝다는 생각만 했거든요. 좀 더 나의 감정에 충실해도 된다는 걸 배웠어요.
두 번째 삶이 시작됐네요.
어떤 경험이든 의미 없는 것이 없더라고요. 저는 제가 엄마를 닮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는데, 빈소를 지키는 저를 보고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하시는 분이 많았어요. 그때부터 엄마를 닮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됐죠.
일련의 경험 때문일까요? '배우 이청아' 하면 떠오르는 작품 속 캐릭터가 바뀌었어요.
20대 땐 학생, 취준생, 사회 초년생 캐릭터를 연기했어요. 그런데 이젠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처럼 제가 맡은 캐릭터의 직급도 대리에서 과장, 이사로 올라가고 있어요. 30대가 되면서 커리어 우먼, 악역, 비밀을 지닌 여자와 같은 다양한 캐릭터로 섭외가 오기 시작했어요. 사람의 눈빛은 그 사람의 경험이나 생각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잖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눈빛이 바뀌어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좋은 일이죠.
배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직업이라 다양한 만남과 경험, 실수들이 어디서든 쓰여요. 그래서 예전에는 배역을 고를 때 '내가 이 역할을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일까?'를 고민했는데, 이젠 '내가 하고 싶은데 해야지 어떡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을 먼저 해요.
바뀐 인생은 어때요?
엉망진창이죠.(웃음) 실수가 많아서 때론 '나 인생을 이렇게 살아도 되나?'란 걱정이 들기도 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모험 없이 살아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게 인생이니 그냥 대범하게 도전하는 거죠. 그래서 작품에 출연하면서 한 번씩만 엄청 즐겁고 행복하다면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한 작품당 한 번의 행복, 너무 적지 않아요?
제 기준으로 충분해요. 인생의 행복에 대해 고민할수록 '나는 왜 행복하지 않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나는 행복을 자주 느끼진 않지만, 한 번씩 크고 깊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야'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어요. 그러고 나니까 매일 행복한 사람을 봐도 부럽지 않고, 스스로 만족감이 큰 사람이 됐어요.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20대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면서 보냈어요. 많은 사람이 '나'보다 '내가 해야 할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데, 나를 모른 채로 주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끌려가면 언젠가 되돌아가야 하는 시기가 생길 거 같았어요. 그래서 이왕이면 많이 돌아가지 않게 좀 더 나에 대해 고민하자고 다짐하고 저 자신을 지루할 정도로 깊이 파고들었어요.
이청아는 어떤 사람인가요?
20대 땐 "소녀 같다" "예의 바르다" "모범생 같다" 등의 평가에 저를 맞추려고 했는데 실제의 저는 호기심이 많아 변덕이 심하고, 털털하면서 예민하고, 소녀보단 소년에 가까운 사람이에요. 또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나, 누군가 나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을 좋아해요. 그래서 연기, 그림, 건축, 글과 같은 예술이 좋아요. 여태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과 담는 사람 중에 담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는데,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데뷔 당시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배우를 계속해도 되는지 고민했었어요.
어떤 점 때문에요?
연기자가 감수해야 할 '연예인의 특성'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영화 <늑대의 유혹>으로 갑자기 유명세를 치르고 나니 배우로서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봐 무서웠죠. '인간 이청아'는 시니컬한 표정이 편하고 싫고 좋음이 확실한 스타일인데, '배우 이청아'는 잘 웃어야 하고 호불호를 유연하게 드러내야 하잖아요. 혹시라도 어디선가 실수할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컸고 일상에서 누가 저를 쳐다만 봐도 괴로웠어요. 여름에도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채 얼굴을 가리고 다닐 정도로 대인기피증이 생겼었죠. 오랜 시간이 지나니까 연기를 하려면 유명인으로서의 생활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게 이어온 배우의 삶은 어떤가요?
재미있어요. 몇 가지 불편함 때문에 배우를 그만두기엔 연기가 즐거워요. 배종옥 선배님의 권유로 연극에 도전했었는데, 똑같은 스크립트로 50회가 넘는 공연을 하면서 매번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연기가 더 흥미로워졌거든요.
또 어떤 것에게 흥미를 느끼나요?
궁금한 것요. 연인도 서로 궁금한 점이 있어야 관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궁금증이 있어야 관심도 생기고, 좋아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어딘가에서 "좋은 인연을 만들려면 사사로운 인연을 빨리 보내는 게 하나의 방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결국엔 모든 것이 선택과 집중인 것 같아요.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돼 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것에 더 집중하려고요. 그러면 인생이 더 즐거워지겠죠.
이청아에게 오랜만에 휴가가 주어졌다. 그녀는 뉴욕에 있는 어머니의 모교를 찾을 생각이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바로 하는 것, 그녀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