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하고 냉소적인 유머
칼럼니스트 이숙명
내가 어쩌다 가난한 전업 작가 따위가 됐나 되짚어보면 2008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뉴욕에 가서 후배네 집에 몇 달 동안 빌붙었다. 후배에겐 영어 책이 몇 권 있었다. 나는 별로 할 일도 없고 가져간 놀거리도 없었으므로 영어 공부 삼아 공원에 나가 그 책들을 읽곤 했다. 그중 한 권이 루스 레이첼의 <마늘과 사파이어>였다. 레이첼은 <뉴욕 타임스> 음식 평론가, <고메> 잡지 편집장 등을 지낸 유명 칼럼니스트고, 음식 전문가다. <마늘과 사파이어>는 그가 <뉴욕 타임스>에서 일하던 시기를 기록한 에세이다. 이 책이 나온 2005년은 한국에서 ‘먹방’ 열풍이 불기 한참 전이다. 요리 전문 채널도 없고 요리사는 인기 직종이 아니었으며 외식 비평 분야는 더욱 일천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뉴욕 타임스>의 음식 평론은 기세가 대단해 레이첼은 공정한 리뷰를 하기 위해 변장하고 레스토랑을 다녀야 했다. 식당들이 그녀의 사진을 카운터에 붙여두고 혹여 방문하면 알랑방귀를 뀔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늘과 사파이어>는 당시 ‘칙릿’이란 말과 함께 유행하던 도시 여성 서사의 전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체는 밝고 쉽고 유머러스하며, 호흡이 빠르고, 뉴욕의 화려한 외식 산업과 미디어 회사가 배경으로 펼쳐지고, 주인공은 좌충우돌하면서 성장하다가 몇 가지 가슴 아픈 사건을 계기로 인생의 다음 단계로 이동한다. 하지만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내러티브 뒤에 감춰진,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결국 ‘비평이란 무엇인가’다. 일례로 주인공은 신분을 숨긴 채 고급 식당에 갔다가 종업원이 옆 테이블 젊은 손님들을 푸대접하고 식재료에 대해 거짓말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젊은 손님들은 특별한 날을 위해 돈을 모아 고급 식당을 찾은 거였고, 경험이 부족해 식당 측의 거짓말을 간파하거나 반박하지 못한 채 초라한 식사를 해야 했다. 저자가 신분을 밝히고 그 자리에 있었다면 결코 못 봤을 광경이다.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 저자는 왜 소비재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이 필요한지, 전문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왜 비평가들이 업계와 결탁해선 안 되는지 등을 보여준다. 사실 이건 외식뿐 아니라 여러 산업에 해당하는 말이다. 영화, 도서, 뷰티, 패션, 가전, IT 기기 등 우리가 무엇을 소비하든 리뷰와 비평이 넘쳐나지만 정말 믿을 만한 정보는 찾기 힘들다. 미디어든 블로그든 유튜브든 발언 창구를 가진 사람은 일반 소비자와는 다른 서비스를 제공받고, 그것을 기준으로 제품을 소개하며,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가 진다.
나는 그전에 여성 패션 잡지 피처 기자로 몇 년 동안 일했기 때문에 쉽고 재미있으면서 동시대 여성에게 유익한 글을 쓰는 법, 그에 걸맞은 아이템을 찾는 법 등에 관심이 많았고, 단지 ‘여성’과 ‘패션’이 담겼다는 이유로, 혹은 대중 잡지라는 이유로 내가 만드는 잡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하는 인간들 때문에 화가 날 때가 많았는데, <마늘과 사파이어>는 나의 여러 고민에 해답이 된 책이었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고 나서 나는 비슷한 책들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발견한 게 영미권 작가들의 에세이였다. 건조하고 냉소적인 유머로 가득 찬 빌 브라이슨, 더글러스 애덤스, 앤서니 보댕 등의 글을 끼고 살았다. 나는 글 쓰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잡지사를 뛰쳐나왔지만 한동안 이런 책들을 읽다 보니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첫 책을 썼다. 그 역시 소설처럼 내러티브가 있는 에세이였는데, 결국 책은 망했다. 그게 장르가 애매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나도 알았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하는 질문을 그 후로 10년째 나 자신에게 하고 있다. 아마도 나는 그때 그 책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