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장인 손현주. 그는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숨바꼭질>(2013), <악의 연대기>(2015), <보통사람>(2017) 등 영화와 SBS <추적자 THE CHASER> <황금의 제국> <쓰리 데이즈>, KBS2 <저스티스> 등 드라마를 오가며 독보적인 연기력과 존재감을 보여줬다. 그 세월이 올해로 29년이 됐다.
그는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KBS2 수목극 <저스티스>의 막바지 촬영 중이고,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이하 <광대들>)(감독 김주호)이 상영 중이다. <광대들>은 그가 처음 도전한 사극 영화다. 조선 팔도를 무대로 풍문을 조작하고 민심을 흔드는 광대들이 권력의 실세 한명회에게 발탁돼 세조에 대한 미담을 만들어내면서 역사를 뒤바꾸는 이야기다. 극 중 손현주는 풍문조작단의 기획자 한명회를 연기한다. 한명회는 조선 최고의 실세로 세조를 왕위에 앉히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하늘의 뜻이 임금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조선 팔도의 풍문을 조작하는 광대패 5인을 섭외하고 거대한 판을 기획한다.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편의점 막걸리와 족발 마니아라는 그는, 인간미를 폴폴 풍기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를 둘러싼 공기는 예상대로 편안했다.
근황부터 알려주세요.
드라마 <저스티스>의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에요. 다른 스케줄을 진행하면서도 짬짬이 대본을 읽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이 재미있게 봐주셔서 좋은데, 그래서 더 아쉽기도 해요. 후반부로 갈수록 촬영 일정에 쫓기다 보니 여유가 있으면 좀 더 완성도가 높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거든요.
현장 분위기는 어떤가요?
6회를 찍고 방송에 들어갔는데, 일정이 촉박하더라고요. 주 52시간제다 보니 제작 환경은 좋아졌지만 방송 일정에 쫓기고 있지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일도 일이지만 삶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요. 시스템이 정착되는 과정에선 늘 잡음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 과도기적인 시기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배우를 포함한 전 스태프들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 같아요.
'광대들'의 촬영 현장은 어땠나요.
영화다 보니 드라마와 조금 다르죠. 부드러웠어요. 다 친한 배우들이라 재미있었고, 편안했지요. 개인적으로 조진웅과는 평소에도 안부를 묻고 만나는 사이예요. 드라마 <솔약국집 사람들>에 같이 출연한 것이 인연이 됐죠. 영화는 드라마와 또 다르기 때문에 회식을 자주 했어요. 주로 지방에서 촬영을 했던 터라 아침에 막걸리 회동을 많이 했답니다. 제가 전국 각 도의 막걸리를 다 섭렵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평의 잣 막걸리를 애정합니다.(웃음) 안주는 주로 편의점을 이용했어요. 고백하건대 제가 편의점 마니아입니다. 편의점 메뉴 중에 끝내주는 술안주가 있는데, 진공 포장된 족발과 편육이에요. 모르시는 분들은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도 하는데, 안 됩니다. 차가운 채로 먹는, 꼬들꼬들한 그 맛이 일품이거든요.
건강은 괜찮나요?(웃음)
그래서 전자담배를 피우고 소주보다 막걸리를 즐깁니다. 막걸리가 여러모로 좋은 술이에요. 밥 대용으로 먹어도 든든하고요. 모든 술이 그렇지만 첫 잔이 그리 구수하고 시원할 수 없어요. 작년 여름, 그 무더위 속에서 영화 촬영을 했으니 시원한 막걸리의 첫 잔을 누가 안 비우겠어요. 사극이다 보니 분장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분장을 한 채로 며칠씩 지냈는데, 그 몰골로 편의점에 가서 막걸리를 사 왔답니다.(웃음)
후배들이 잘 따르는 선배예요.
내가 즐거우면 그들도 즐겁지 않겠어요? 저 스스로 젊게 산다고 자부하고, 외모도 나이 들어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아닌가?(웃음) 나이 차 많은 후배들과 대화하다 보면 친구 같은 생각이 들어요. 세대 차이가 났다면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거예요. 가수 보아만 봐도 어른스러운 친구예요. 오히려 제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어떨 땐 그냥 나한테 반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웃음) 혹시 보아 콘서트장에 가본 적 있으세요?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존경스럽기까지 하더라고요. 어떻게 저렇게 작은 체구의 친구가 저 큰 무대를 꽉꽉 채우지? 특별 게스트도 없이 혼자 2시간을 무대 위에서 뛰어다니는데, 대단하더라고요. 그렇게 저는 후배들에게 늘 감동하고 배우고 있습니다.
현장에선 겸손해야죠. 하기 싫으면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게 맞아요.
그래서 전 군말 안 하고 시키는 대로 잘합니다.(웃음)
연기를 하다가 부상당했다 쳐도 내가 조심했어야 하는 일이지, 그걸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어요.
버티는 것도 능력이죠.
전시,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평소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문화 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무조건 가는 편이에요. 애초에 대학로에서 공연을 했던 사람이라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해요. 최근엔 뮤지컬 고전극 <안나 카레니나>를 4번 정도 봤어요. 전율과 감동이 대단해요. 요즘엔 시간이 없어 놓친 작품도 꽤 있어요. 김성령, 김상중, 안재욱이 출연하는 연극 <미저리>도 꼭 보고 싶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은 없나요?
아마도 무대가 그립기 때문에 보는 것 아닐까요? 자꾸 봐야 낯설지 않잖아요. 갑자기 무대에 오른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서서히 눈에 익숙해져야 어색하지 않고 친숙하죠. 공연이 끝나면 일부러 무대 위에 올라가보기도 합니다. 중앙에 우두커니 서보기도 하고, 발성을 해보기도 하죠. 그럴 땐 느낌이 굉장한 신선해요. 동시에 스스로 작아지는 기분도 들고요. 예전엔 그렇게 많이 섰던 무대인데 작아지는 그 느낌은 뭐랄까, 다양한 느낌과 감정이 교차되는 곳이 무대죠.
29년간 연기를 했는데, <광대들>이 생애 첫 사극 영화 출연이라고 들었어요.
데뷔 초창기에 4부작 사극을 해봤어요. 1인 40역을 할 때죠.(웃음) 그렇게 따지면 정식 사극은 처음입니다. 그때 무척 고생을 했거든요. 그 아픔이 잠재돼 있었는지, 친한 사람들에게서 사극 섭외가 와도 어떠한 이유를 대서라도 피하게 되더라고요. 늘 사극 앞에서는 조심스러웠어요.
한데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요?
몇 년 전부터 이제 사극을 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이 작품의 섭외가 들어왔고 기존과는 다른 '한명회'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꼈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연출했던 김주호라는 감독이 어떻게 만들지도 궁금했고, 그 안에 녹아 있을 내 모습도 궁금했어요. 얼마 전에 사극 분장을 한 내 모습을 스크린으로 처음 봤는데 어색하지 않더라고요. 극 안에서 '잘 놀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주호 감독의 장점은 뭔가요?
시끄럽지 않고 조곤조곤 할 말 다하는 스타일입니다.(웃음) 현장에 가기 전 충분한 대화를 하지만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늘 변수가 있기 마련이죠.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참 좋아요. 설득하든 설득당하든 시끄럽지 않게 잘 풀거든요. 영화에 관한 한 저보다 전문가 아니겠어요? 배우들은 자기 영역보다 조금 넓게 알 뿐이지, 감독만큼 알지 못해요. 그래서 저는 나서지 않고 대부분 수긍하는 편입니다.
'연기 장인' '연기 신'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릅니다.
별 말씀을요.(웃음) 저는 그저 그 안에서 놀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안은, 시나리오예요. 감독과 마음이 맞은 상태에서, 시나리오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그 촬영장은 결국 내 세상인 겁니다. 판 깔아준 그 세상 안에서 배우는 잘 놀면 됩니다. 그럼 그게 내 것이 되더라고요.
애드리브보다는 대본에 충실한 스타일인가요?
숨소리 정도만 애드리브로 조절하는 편이고, 그 외는 대본 그대로 연기합니다. 습관을 그렇게 들였어요. 드라마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작가가 써준 대본 안에서 놀지 그 대본을 내 입에 맞추려고 하지 않아요. 한데 그 대사 안에서 놀 수 있는 게 의외로 많아요. 배우가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의미죠. 또 다른 습관 중에 하나는, 대본을 통으로 보는 겁니다. 찢어서 들고 다니거나 자기 대사만 보는 후배들이 있는데, 저는 후배들에게 통째로 들고 다니며 읽으라고 조언합니다. 그래야 흐름이 보이고 그림이 그려지죠. 통으로 대사를 외우면 내 대사는 자연히 따라오게 돼 있죠. 당연한 얘기고, 또 중요한 얘기이기도 해요.
몇 년간의 행보를 보면 대부분 남자들과 호흡을 맞춰 연기했어요. 멜로물에 대한 생각은 없나요?
한 번도 멜로를 해본 적이 없어요. 하물며 상대가 여자인 적도 거의 없었어요. 지금 촬영 중인 <저스티스>나 <광대들>도 남자들 사이에서 촬영 중이죠. 아, 영화 <더폰>(2015)에서 엄지원 씨와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데, 시간 여행을 다룬 작품이라 실제로 같이 촬영한 건 두 번 정도밖에 안 됐어요. 그래서 말인데, 저도 멜로를 해보고 싶죠.(웃음) 한데 제가 양심이 있어서, 연상의 누님들과 호흡을 맞추고 싶어요.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 아닙니까. 사랑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누님들과 예쁜 중년 멜로를 찍고 싶어요.
극 중 광대들이 조작하는 풍문은 요즘의 가짜 뉴스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연기하면서 시류를 생각하는 배우는 없을 거예요. 감독은 몰라도 배우는 짜인 시나리오 안에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표현할 것인지에 집중하기 마련이거든요. 물론 시기와 시대가 잘 맞았다면 감사한 일이지만요. 최근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도 마찬가지죠. (유)해진 씨가 지금 이 시기에 일본과 경제 전쟁을 치르게 될 줄 알았을까요?
이른바 '모셔 가는 배우'가 됐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겸손합니다.
어떤 선택이든 내가 한 선택이니까요. 물론 회사와 논의를 하지만 결국 결정은 내가 한 거죠. 하기 싫으면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게 맞아요. 내가 하고 싶어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나니까, 저는 군말 안 하고 시키는 대로 잘합니다.(웃음) 연기를 하다가 부상당했다 쳐도 내가 조심했어야 하는 일이지, 그걸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어요. 나약해지거나, 스스로 타협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에게 던졌던 말이기도 해요. 버티는 것도 능력이죠.
오랜 배우 생활의 원동력은 뭔가요?
집에 하루 종일 있을 때도 있지만, 보통 전 움직이는 스타일이에요. 다들 열일을 하고 나면 재충전하기 위해 쉰다고 하지 않나요? 그런데 전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저는 일하면서 쉰다고 생각해요. 일하는 도중에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쉬는 게 제일 큰 즐거움이거든요. 특히 후배들의 생각을 듣고 공유하다 보면 새로운 시각도 생기고요. 그런 의미에서 꾸준히 저를 찾아주는 것 자체가 감사하죠.
데뷔 29년 차 '연기 장인'인 만큼 늘 그렇듯 어렵고 무거운 역할이 주어지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최근 들어 의도치 않게 무거운 역을 많이 했어요. 이제는 조금 편안한 작품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눈싸움 그만하고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들요. 아, 물론 어떤 역할이든 최선을 다하는 건 늘 똑같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