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첫 만남은 이랬다. JTBC <밥 잘 사주는 누나>를 끝내고 모든 이가 ‘정해인홀릭’을 고백할 때였는데, 정해인은 메이크업에 헤어까지 손질하고 블랙 슈트를 입고 인터뷰 석에 앉아 있었다. 사진 촬영을 하지 않는 인터뷰라 노 메이크업에 편한 차림으로 자리해도 무방했는데 풀 세팅을 한 차림새였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라 그에게 말끔한 슈트를 입은 이유를 묻자 “마음을 다잡고 예의를 갖추고 싶어서요”라는 답변이 돌아왔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도 그의 차림은 블랙 슈트였다. 주름 하나 없는 재킷에 넥타이핀을 꽂은 넥타이도 똑같았다. 정해인이라는 배우에 대한 평가, 그의 인기 등 모든 환경이 변했지만 청년 정해인의 마음가짐, 태도만큼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제가 자주 입는 슈트예요. 편하게 입고 나올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 인터뷰할 때 슈트를 자주 입어요. 언론시사회 이후 진행된 기자간담회에 참석할 때도 같은 옷을 입었죠. 소장하고 있는 옷이라 몸에 잘 맞아서 편해요. 제가 한 옷에 꽂히면 지겹도록 입거든요. 대학 때 동기들이 ‘넌 왜 그 옷만 입어?’라고 물을 정도였어요.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여러 개를 사서 바꿔 입기도 하거든요.”
안판석 감독의 <밥 잘 사주는 누나>, MBC <봄밤>에 연이어 출연한 그는 정지우 감독이 연출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피치 못할 일로 소년원에 다녀온 뒤 내밀한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현우’ 역을 맡아 ‘미수’ 역의 김고은과 함께 ‘엇갈리는 인연’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다.
<해피엔드>(1999) <은교>(2012) 등 대중에 회자되는 작품을 만들어온 정지우 감독의 멜로 영화에서 정해인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행동이나 상황으로 현우가 처한 상황을 추측하게 만든다.
“정지우 감독님과 처음 호흡을 맞췄는데 추상적인 디렉션을 주시더군요. 여름날의 뜨거운 햇빛 같은 디렉팅이랄까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배우가 가진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하시는 것은 확고하지만 배우를 존중해주셨죠. 첫 만남에서 ‘해인 님’이라고 부르시며 인사를 하셨는데 처음엔 장난치시는 건가 싶었는데 모든 배우를 그렇게 부르시더군요. 배우 정해인뿐만 아니라 인간 정해인을 존중해주시는 거였어요. 감독님과 함께하면 촬영장에서 행복하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영화는 ‘휴대전화 없던 시절의 사랑 이야기’다. PC 통신이 막 생기고, 라디오를 챙겨 듣던 시기가 배경인데, 정해인은 경험하지 않은 시대의 감성을 세밀한 연기로 표현한다.
“라디오는 고등학생 때 야자 시간에 듣기도 했고 군대에서 많이 들었어요. 운전병이었는데 CD 플레이어가 잘 작동되지 않는 차를 몰았거든요. 라디오를 들으면 사회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가요를 들을 수 있으니까 단절됐던 것이 연결되는 기분이라 좋았어요. 또 대다수 프로그램이 시청자 사연으로 만들어지니까 소통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라디오를 즐겨 듣지 않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만큼은 익숙했다. 본래 레트로 감성을 좋아해 1990년대 음악을 즐겨 듣기 때문이다. 특히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나 이문세의 ‘소녀’, 김광진의 ‘편지’ 같은 노래가 스토리에 몰입하도록 도왔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애늙은이라고 불려요. 유년 시절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 시절을 모른다고 해서 감성을 표현하는 게 어렵진 않았어요. 1994년의 사랑과 2005년의 사랑이 다를까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은 다 똑같은 것 같아요. 그래서 실제로 제가 사랑할 때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면서 애틋한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연애는 쉬면 안 되는 것이라던 정해인은 현재는 김고은과 연애 중이라고 여긴다고 밝혔다. 촬영하면서 눈만 마주쳐도 통하는 에너지를 느끼며 행복하게 촬영했다고.
“고은 씨와는 <도깨비>에서 인연을 맺고 언젠가 같이 연기를 해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그 시기가 빨리 왔죠. 고은 씨와는 쿵짝이 잘 맞았어요. 정지우 감독님과 <은교>에서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어서 제가 현장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줬죠. 사실 저는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깊게 알아가는 편이라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은 아니에요. 그런데 손예진·한지민 선배와 호흡을 맞추다 보니 상대에게 진심 어린 마음이 있어야 멜로 연기를 잘할 수 있다는 걸 알겠더군요. 그 경험을 통해 용기를 내어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했는데 고은 씨와 호흡을 맞추면서 제가 배운 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죠.”
<유열의 음악앨범>은 제목처럼 그 시절을 상징하는 가요와 함께 주인공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린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최애곡’으로 꼽은 정해인은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음악에 더욱 밀접해졌다.
“노래를 들으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위로받는 기분이에요. 요즘엔 폴킴의 노래에 빠졌는데, 원래 김광석의 노래를 자주 들어요. 데뷔 후 쉬지 않고 작품을 했는데 촬영을 마치면 공허하고 쓸쓸할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노래를 들으면서 위로받았죠.”
음악을 좋아한다는 그는 최근 스타들이 버스킹을 떠나는 예능 프로그램 JTBC <비긴어게인>에 출연했다. 수준급 노래 실력을 보여준 정해인은 이수현과 듀엣으로 산울림의 ‘너의 의미’를 부르며 “너의 의미는 뭐야?” 라는 내레이션을 해 화제를 모았다.
“버스킹은 공포였어요. 출연진인 가수분들도 버스킹을 하기 전엔 떨린다면서 긴장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프로그램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가사를 적은 종이를 손에 쥐고 계속 노래를 연습했죠. 버스킹을 마치고 환호성이 들려오는데 소름이 돋았어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고 가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그런 제 모습을 지켜본 헨리 씨가 제가 예뻐 보였는지 촬영 후 ‘음악에 임하는 자세가 멋있었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줬죠.”
언젠가 노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느냐고 묻자 “연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오랫동안 길게 연기하고 싶다는 그는 <유열의 음악앨범>의 각본을 쓴 이숙연 작가가 집필하는 새 드라마 <반의 반>을 차기작으로 정했다. 정해인의 선택은 또 멜로다.
“사랑하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멜로 장르가 재미있어요. 그렇다고 장르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고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마음이에요. 저는 오랫동안 연기하는 것이 꿈이기 때문이에요. 중년이 돼서 멜로 연기를 하긴 어려울 테니 지금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죠. 만약 정해인의 멜로 연기가 지루하다는 평가가 나온다면 감내해야죠. 옳은 말씀을 새겨듣고 제 연기에 반영하면 된다고 생각해 고통스럽진 않아요. 사실 ‘멜로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저를 더 고통스럽게 해요. 제게 과분한 표현이라서 앞으로 더 잘하라고 채찍질해주시는 것 같거든요.”
사랑을 하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는 멜로 장르가 재미있어요.
만약 정해인의 멜로 연기가 지루하다는 평가가 나온다면 감내해야죠.
동시에 ‘멜로 장인’이라는 수식어 역시 저를 부담스럽게 해요.
제게 과분한 표현이라 더 잘하라고 채찍질해주시는 것 같거든요.
인간 정해인의 자존감
데뷔 후 쉬지 않고 활동할 수 있게 돼 감사하다는 정해인이지만 아직까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단다. 스태프들과 함께 우르르 다니면 연예인인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지 혼자 다니면 “정해인을 닮았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고.
“키가 크지 않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아서인지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모자를 쓰고 있으면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평소에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돌아다니거든요. 얼마 전 부모님과 식사를 하는데 종업원이 ‘정해인 씨 닮은 것 같아요’라고 하시더군요. 부모님은 웃음을 참으시면서 ‘네, 그런 이야기 종종 들어요’라고 하셨고, 종업원은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셨어요. 한번은 스태프들과 장어구이집을 갔는데 다들 긴가민가하셨나 봐요. 제가 먼저 식당을 나서자 CCTV를 보시면서 ‘맞네, 맞네’ 하셨대요.”
하지만 끊임없이 연기를 할 수 있기에 정해인의 연기를 보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실감하고 있단다. 그래서 더 연기에 책임감을 느끼고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밥 잘 사주는 누나>에 출연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배우 정해인을 불러주길 기다리는 입장이었어요. 작품을 하나라도 더 하고 싶은 배우였는데 이젠 많은 기회가 주어지니 감사한 마음이 크죠. 하루는 제가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를 고민해봤어요. 연기를 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더라고요. 연기라는 명함에 책임을 지려면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더군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가면서 고민이 많고 힘이 들기도 하지만 모든 순간을 즐기려고 해요. 힘든 만큼 재미있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창작할 땐 힘듦과 즐거움이 동반된다고 하잖아요.”
기계도 쉬지 않고 작동하면 망가지는 법이듯 정해인 역시 번아웃이 오기도 했다. 26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하다 보니 막연한 미래 때문에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또 데뷔 후 쉬지 않고 활동을 이어가다 보니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에 무기력함을 느꼈다는 것.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찾았단다.
“배우 정해인과 인간 정해인을 분리하려고 노력해요. 배우라는 직업은 자존감이 낮아져 멘탈이 흔들리면 우울증 같은 정신병이 올 수도 있는데,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으면 인간 정해인의 삶에 영향을 끼칠 것 같았어요. 제가 받는 평가는 배우 정해인을 향한 것임을 아는데도 인간 정해인에게 영향을 끼치더군요. 그래서 촬영장에서는 배우이지만 집에서는 저 자신이 되려고 해요. 가장 큰 힘이 되는 게 가족이에요. 아무리 캐릭터에 몰입해도 집에 가서 가족의 얼굴을 보면 자연스럽게 풀어져요. 그래서 가족에게 의지하는 편인데 부모님은 제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시고, 동생은 공감을 해줘요.”
7살 터울의 동생은 마냥 어리게만 보였는데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나눠 마시면서 대화를 하다 보니 그에게 쓴소리를 건네기도 할 정도로 컸단다. 동생은 그에게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된다”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조언을 했다. 최근엔 함께 여행을 떠나 힐링을 하고 왔다.
“<봄밤> 촬영이 끝나고 동생이랑 연기하는 친한 형과 함께 제주도에 다녀왔어요. 처음으로 제가 번 돈으로 호텔을 예약하고 맛있는 것을 사 먹었는데 정말 행복했죠. 한 식당에서 갈치조림을 먹었는데, 굉장히 커서 놀랐어요. 휴대폰으로 동영상 촬영을 할 정도였죠. 그리고 서핑도 했어요. 스노보드를 탈 줄 알아서 서핑도 잘할 줄 알았는데 파도 앞에서 무너졌어요. 그래도 일어선 것만으로도 재미있었어요.”
정해인은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부정적인 생각에서 멀어지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기에 대한 고민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지곤 하는데 부모님과 동생이 그를 지켜준다고.
“올해 안에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생각만 해도 행복한 시간일 것 같아요. 사실 쉬지 않고 달려오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정말 하고 싶었던 연기인데도 몸이 힘드니까 순간순간 해이해지더군요. 간절하게 바랐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저를 깨달았을 때 아찔했어요. 끊임없이 저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배우로 살고 싶어요.”
정해인은 SBS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2016)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김해숙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배우로 살아가려 한다.
“선생님이 배우를 하려면 멀리 보고 묵묵히 차분하게 작품을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주변에 변화가 많잖아요. 나 자신이 단단하지 않으면 변화에 휩쓸리겠더라고요. 변화에 임하지만 휩쓸리지 않는 배우가 되려고 해요. 건강하게 오랫동안 연기하는 게 꿈이거든요.”
영화에서 ‘현우’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저 강력한 한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정해인에게는 그를 단단하게 만드는 강력한 한 가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