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는 끝났다고 했다. 캐주얼웨어에 비해 활동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입기에도 부담스러운, 그래서 족쇄 같은 슈트는 이제 패션 역사에서 가느다랗게 숨 쉬며 겨우 연명할 거라 했다. 원래 남성 정장이었던 슈트를 여성들이 입기 시작한 건 오래지 않다. 위아래 상·하의가 분리됐지만 같은 소재로 만든(우리나라에선 흔히 투피스라 불리는) 정장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보편화됐지만 바지로 된 슈트는 1970년대에 이브 생로랑이 턱시도 슈트를 발표한 이후 본격화됐다. 이후 슈트는 1980년대 중산층 여피를 거치면서 성공한 여자의 유니폼이 됐다. 웬만한 남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것 같은 넓고 각진 어깨와 타이트한 스커트. 이는 1980년대 남녀평등을 외치는 여피들의 전투복이었다. 1990년대 들어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혜성같이 등판한 톰 포드는 여기에 섹시함을 장착한 슬림핏의 핀스트라이프 슈트로 패션계를 평정했다. 대기업의 젊은 임원이나 성공한 법조인을 연상시키던 보수적인 슈트가 톰 포드에 의해 제대로 섹시함을 장착한 새로운 시대의 전투복으로 등극한 셈이었다. 그러나 슈트의 거대한 물결은 여기까지였다.
1990년대를 휩쓴 IT 혁명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패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9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디지털 혁명과 IT 지식산업에 기반한 산업의 변화는 패션의 흐름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밀레니엄이 10년쯤 지나자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모바일 혁명은 이런 추세에 기름을 부었다. 오프라인에 기반을 둔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들과 하이 스트리트 패션, 그리고 수많은 백화점과 패션 스트리트의 대리점과 부티크가 문을 닫거나 비즈니스를 축소하고 그 자리엔 인터넷, 즉 온라인 쇼핑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아직도 건재한 건 H&M, 자라 등 SPA 브랜드뿐이다. 게다가 산업 구조와 환경도 확연하게 바뀌었다. 이제 상당수의 사람이 회사에 나가지 않는 프리랜서이거나, 일인 기업가나 서비스업 종사자거나, 하다못해 회사에 다닌다 해도 자유로운 IT 기반 회사가 대부분이다. 몇 년 전엔 페이스북 CEO인 마크 저커버그가 자신의 옷장 사진을 공개하며 “새해엔 뭘 입고 출근할까”라고 코멘트를 달아 화제를 모았었다. 그 옷장 사진엔 색상도 디자인도 똑같은 10여 장의 회색 티셔츠가 전부였으니까.
그렇다. 4차 산업혁명을 코앞에 둔 시대엔 슈트가 필요 없었다. 대기업 오너도 티셔츠를 입는 세상이 됐다. 놈코어(‘노멀’과 Nomcore, ‘하드코어’의 합성어로 약간의 스타일 변화를 준 미니멀 룩)와 고프룩(GORP Look, 그래놀라·오트밀· 레이즌(건포도)·피넛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신조어로 야외 활동 시 즐겨 먹는 간식을 줄여 아웃도어 룩을 지칭하는 용어가 됐다)에 이어 최근엔 한 술 더 떠 ‘고프코어 룩’이 대세다. 고프코어는 아웃도어 의류를 지칭하는 ‘고프(GORP)’와 핵심·가치·중심을 의미하는 ‘코어(core)’의 합성어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아우르는 중요 핵심 트렌드다.
못생김과 고급스러움의 사이, 최근 불어닥친 뉴트로 열풍은 다소 투박하고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고프코어 룩을 유행시켰고 어글리 프리티, 대디 룩, 오버사이즈 룩이라는 신조어를 양산하며 최근 가장 뜨거운 패션의 핵으로 등장했다. 오죽하면 오래된 점퍼에 흰 양말을 신고 포멀한 구두를 신은, 또는 오래된 재킷에 낡은 옛날 운동화를 신은 아저씨 모습으로 대변되는 우리나라의 ‘동묘 패션’이 파리나 뉴욕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까지 파급되며 화제가 됐을까! 우리나라에선 이미 ‘혁오밴드’의 오혁이나 ‘잔나비’의 최정훈을 필두로 걸 그룹에까지 확산되는 추세다.
이미 베트멍으로 이런 유행을 선도했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가 발렌시아가의 디렉터가 되면서 고프코어는 고급 럭셔리 시장에까지 세력을 넓혔다. 크리스토퍼 베일이 떠나자 버버리도 이런 트렌드에 가세했다. 구찌는 1960~70년대 레트로풍에 이런 고프코어 룩을 가미해 역대 최고 매출을 경신하고 있다. 루이비통은 힙합 스타 카니예 웨스트의 비주얼 디렉터 출신 버질 아블로가 남성복 디자이너로 오면서 클래식과 고프코어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이렇듯 경계가 애매한 패션, 쫄쫄이와 오버사이즈를 넘나들고 캐주얼과 아웃도어, 클래식이 혼재된 세상, 마구잡이로 막 섞어 입어 믹스매치를 떠나 믹스 크레이지인 세상에서 최근 다시 슈트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007 스카이폴>에서 ‘제임스 본드’가 슈트를 입고 날아다니며 고난도 액션 신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건 톰 포드가 만든 최첨단 하이테크 소재의 신축성 뛰어난 슈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흡한속건’ ‘흡습속건’ 등을 자랑하는 쿨맥스 원단 같은 기능성 소재들은 이제 아웃도어뿐 아니라 슈트에도 적용되고 있다. 텐슬이나 텐셀 등의 보급으로 울이나 코튼 같은 전통적 자연 소재도 기능성을 탑재하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번 시즌 구찌의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고프코어 감성이 녹아 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슈트들을 보라. 캐주얼도 아니고, 클래식도 아니고, 아웃도어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슈트 룩. 이것도 아니라면 고전적인 생로랑의 턱시도 슈트는 어떤가!
이번 시즌 샤넬, 알렉산더 맥퀸, 지방시 등 수많은 디자이너 브랜드가 슈트 룩을 발표했다. 각자 브랜드 이미지에 맞는 다양한 스타일이지만 하나의 코드가 있다면 바로 뉴트로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를 관통하는 복고적 감성, 그리고 여기에 기존의 클래식을 살짝 비튼 위트까지! 선택은 이제 우리 손으로 넘어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랫동안 옷장에서 잠자고 있던 낡은 슈트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스타일링 방식에 따라 세상 새롭고 쿨한 느낌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고프코어와 클래식이 혼재하는 이 시대의 슈트 유행이 반갑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