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안에서의 김규리는 강하다. 어떤 역할이든 자기만의 색깔로 표현할 줄 알고, 똑 부러지게 연기하며,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질 줄 아는 배우라는 말이다. 아마도 지난 22년 동안 스스로 갈고닦은 내공일 것이다. 카메라 밖의 그녀는 조금 다르다. 자기 사람을 챙길 줄 아는 배려가 눈에 띄었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건강한 마인드가 예뻤다. 여러 번의 상처와 위기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녀와의 대화는 꽤나 진솔하게 이어졌다.
근황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
최근에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촬영을 마쳤어요. 무더위 속에 촬영하느라 힘들었지만 잘 마무리한 것 같아 뿌듯하고 기분 좋습니다. TBS 라디오 <김규리의 퐁당퐁당>을 진행 중이고요. 아침 방송이라 일찍 일어나는 게 고되지만 이젠 적응됐어요. 청취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수다 떠는 그 기분이 좋아요. 10여 년 전에도 라디오 진행을 했었는데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죠. 그땐 '진행'을 하는 거였다면 지금은 함께 '호흡'할 줄 알게 됐달까요?
쉬는 날이 거의 없겠어요?
라디오를 고정적으로 진행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스케줄이 없어요.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을 땐 주로 숲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친구, 스태프 등 좋은 사람들,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을 초대해 집 근처 가까운 숲부터 지방의 깊은 숲까지 찾아 떠나요. 대관령 소나무 숲은 특히 사랑하는 곳이에요. 둘러보면 도심에도 아름다운 숲이 있어요. 살면서 위로를 받고 싶을 때, 힐링하고 싶을 때 찾으면 여유로워지죠. 요즘 주말마다 숲을 찾는 게 일이자 취미예요.
주변에 배우 김규리에 대해 물어봤어요. '똑똑한 배우' '철저하고 예민한 배우'라는 평가가 많더군요.
똑똑하다는 평가는 듣기 좋네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똑똑한 척하는' 배우인 것 같아요. 부족한 게 많아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스타일이거든요. 덕분에 할 줄 아는 게 많아졌고 취미도 많죠. 그래서 저를 똑똑하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예민하다는 평가엔 어느 정도 동의해요. 배우로서 스스로를 예민하게 만드는 편이에요. 사람을, 상황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야 어떤 캐릭터를 만났을 때 그 감정과 감성을 잘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일부러 예민해지려고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데뷔 초에는 더 예민했어요.(웃음)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잘 몰랐으니까 사람들의 반응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지금은 그때보다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예민한 편이죠. 음… 배우도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어느 날은 여렸다가, 어느 날은 강했다가, 또 다른 어떤 날엔 마음이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하죠. 보통 사람들처럼 날씨에 따라 기분이 오락가락하기도 하고요.
배우도 사람입니다. 어느 날은 여렸다가, 어느 날은 강했다가, 또 다른 어떤 날엔 마음이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하죠.
저도 보통 사람들처럼 날씨에 따라 기분이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외모를 가꿔야 한다는 강박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선 털털한 편이에요. 저도 처음엔 선글라스에 모자, 마스크까지 쓰고 다녔죠. 그런데 그런 게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무장해도 알아보시는 분은 알아보시고, 오히려 더 눈에 띄는 역효과가 나타나죠.(웃음) 이젠 그냥 사람 김규리로 사는 게 좋아요. 카메라 앞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돌아서면 일상으로 돌아올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길도 혼자 걸을 수 있고, 배고프면 혼자 밥을 먹을 수도 있고, 공원에 누워 책을 읽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서의' 김규리요.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꽤 오래전이었어요. 메이크업을 안 하고 밖에 나갔는데 마치 발가벗은 기분이 들었어요. 은행에 가서 일을 보는데 어색하더라고요. 그때 '아,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죠. 정상적인 삶이 아니잖아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노력했어요. 더 민낯으로 다니려고 했고, 더 걸어 다니려고 했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매니저를 시키지 않고 스스로 하려고 했어요. 해보니까 괜찮던데요? 재미도 있고요.
평범하고 싶은가 봐요.
사실 전 이제 평범할 수 없어요. 22년을 배우로 살아온걸요. 그래서 이젠 즐기기로 했어요. 지나가면 사람들이 인사해주시잖아요. 그분에게는 나의 1분이 평생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나는 평생 특별한 기억을 주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니까 더 친절하게 되고, 한 번 더 웃게 돼요.
짧은 시간이지만 마인드가 건강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스스로 숨고, 고립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 역시 그런 적이 있고요. 그래서 더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저 스스로 깨달은 부분이 있으니까요. 자신 속에 사랑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물론 아직도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지만요.
배우라는 직업… 어때요?
축복이에요. 간접적으로 무언가를 경험할 수도 있고 그걸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그런 재미있는 작업을 통해 돈을 벌잖아요. 저의 작은 움직임에 사람들이 반응하고 좋아해주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럼 '여배우'라는 타이틀은 어떤가요?
'여배우'란 것도 참 매력적이에요. 물론 항상 완벽해야 하고 예쁜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건 힘들죠. 조금만 소홀히 관리해도 '주름이 생겼다' '피부가 안 좋다' 등의 안 좋은 평가가 쏟아지니까요. 외모에 대한 강박은 있지만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날개를 단 듯 행복한 직업이에요. 여배우…. 얼마나 멋진 타이틀이에요.
자기 직업을 사랑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모습도 없죠.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고 초반에 이런 고민을 했어요. 라디오에서 여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게 뭐가 있을까? 한참 고민하다 드레스를 입기로 했어요. 드레스를 입고 방송할 수 있는 건 여배우뿐이잖아요. "저 드레스 입고 왔어요. 드레스 입고 싶은데 입을 자리가 없어요"라고 말했어요.(웃음) 여배우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짧으니까 이왕이면 즐겁게 지내는 게 좋잖아요?
오래전 민낯으로 외출을 했는데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어요. 은행에 가서 일을 보는데 어색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 노력했어요. 일부러 민낯으로 다니려고 했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려고 했어요. 해보니까 괜찮던데요?
조금 어려운 질문이에요. 궁극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나요?
어렸을 때 와 닿았던 글귀가 있어요. "웃음이, 웃음만 있으면 가볍다. 그러나 백번의 울음을 참고 웃는 웃음은 진정 값진 것이다." 그땐 머리로만 '아, 그렇겠구나' 했었는데, 실제로 삶을 지나오면서 겪어보니까 그 말이 맞더군요. 진정으로 웃고 싶어졌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느낀 거겠죠?
억울했죠. 뭔가 강탈당한 것 같은 느낌이 강했어요. 스스로에게 "주인공병에서 벗어나라"고 말했어요. 인생을 사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들도 한두 가지씩 억울한 일을 마음에 품고 살잖아요. 모두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즐겁고 힘차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겨냈어요.
하필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은 없었어요?
물론 그런 생각도 했죠. '왜 하필 나야?'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힘들었던 날도 있어요. 그런데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저는 연기자잖아요.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배우니까 알아야 하는 감정이 많잖아요. 더 깊은 연기를 하라고 가르침을 주신 것 같아요. 만약 제가 겪지 않았더라면 다른 누군가가 겪었어야 하는 일인데, 그럴 거면 차라리 제가 겪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어떤가요?
너무 건강해요.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일상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됐죠. 친구들과 수다 떨러 가는 기분이라니까요.(웃음) 초반엔 실수를 너무 많이 했는데 청취자들에게 "여러분, 그냥 받아들이세요. 여러분 옆에 마음은 좋은데 부족한 친구 한 명씩은 있잖아요. 그게 저예요"라고 말했어요. 그러고 나니까 조금 편해지더라고요.
김규리는 김규리가 좋은가요?
저는 지금의 저도 좋고, 과거의 저도 좋고, 앞으로의 저도 좋아요. 치열했던 과거도, 그 과거로 인해 만들어진 현재도, 그리고 현재의 내가 만들어낼 미래도 모두 저 자신이니까요. 만약 제가 또 다른 누군가로 살았더라도 좋았을 거예요.
스스로를 사랑하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살면서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배우에겐 특히 더 중요한 면모인 것 같고요. 사진과 영상을 통해 대중과 만나는데 내 안에 사랑이 없다면 부정적인 모습이 카메라 안에서 드러날 거예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김규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저도 제가 어떤 김규리가 될지 참 궁금하고 기대돼요. 다만 스스로 확신하는 건 지금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게 언젠가는 보상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에요. 음…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여자로 살면서 아기는 낳아보고 싶어요. 여자만 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막연하게 계획하고 있는 건 내 아이에게 나의 자취를 남겨줄 일기를 써주는 거예요. 이를테면 "감기에 걸리면 마스크를 쓰고 자보렴. 엄마는 목이 안 좋아서 잘 때 마스크를 끼고 자는데, 아침이면 꼭 벗겨져 있더라." 이런 식으로요.
상상해보니 참 예쁜 엄마의 모습이네요.
제가 20대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땐 어려서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삶이 참 가여워요. 엄마가 남겨준 자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내 아이에게 일기를 써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죽고 없어도 일기의 흔적은 남잖아요.
그녀는 "치열하게 살았다"고 했다. 이제는 조금 내려놓고 싶다지만 아마도 앞으로도 치열할 것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김규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