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을 곱게 하고 예쁜 옷을 입고 군무를 추는 ‘소녀시대’ 윤아는 첫 주연으로 나선 영화 <엑시트>에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청년 백수인 ‘용남(조정석 분)’과 함께 원인 모를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심을 탈출하는 비상 상황을 그린 재난 탈출 액션영화 <엑시트>에서 그녀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온몸에 쓰레기봉투를 휘감고 거침없이 달린다. 얼굴을 구기며 눈물을 흘리는 능청스러운 모습에 ‘우리가 알던 윤아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모습은 신선하다. 팍팍한 현실을 사는 연회장 직원이지만 재난 현장에서 매뉴얼대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책임감을 지닌 ‘의주’를 천연덕스럽게 그리는 윤아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엑시트>는 개봉 7일 만에 3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올 초 천만 영화에 등극한 <극한직업>이나 유아인을 톱스타 반열에 올린 <베테랑> 등 대박 흥행작들과 닮은꼴 흐름이다. 이로써 윤아는 영화를 흥행으로 이끄는 주연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 모양새다.
“우리 영화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시사회에서 처음 봤는데 보는 내내 촬영 현장이 생각났어요. ‘아, 저런 장면이 있었지’ ‘저 장면을 촬영할 땐 어땠는데’와 같은 생각을 했죠. 상황과 감정에 충실하면서 의주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관객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궁금해요.”
영화 <공조>(2017)로 스크린에 데뷔한 윤아는 두 번째 영화에서 100억대 제작비를 들인 대작의 주연 자리를 꿰찼다. 게다가 클라이밍이나 달리는 장면이 많아 극한의 체력도 필요했으니 부담감이 상당했을 터다.
“저는 여전히 이 영화가 얼마나 큰 영화이고 얼마나 흥행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요. 주변에서 ‘대작’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어안이 벙벙해요. 의식하면 압박이 커질 것 같아서 저 자신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고 촬영했어요.”
‘소녀시대’ 데뷔와 동시에 드라마 <9회말 2아웃>(2007)으로 연기를 시작한 윤아. 그 후 일일 드라마 <너는 내 운명>을 비롯해 미니시리즈 <총리와 나> <THE K2>, 사극 <왕은 사랑한다> 등을 통해 차곡차곡 내공을 쌓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의 시선에 휩쓸리지 않고 꾸준히, 열심히 해나가는 것이 걸 그룹 출신 연기자의 방도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중이 저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요. 이번 영화에서는 무엇보다 동료 배우, 촬영 현장, 캐릭터 등 주변과 잘 어우러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비주얼이 망가지는 것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죠. 그보다는 체력적인 부담이 컸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고도의 집중력으로 촬영에 임했죠.”
윤아는 극에서 원인 모를 유독가스를 피하기 위해 벽을 타고 오르고 건물에서 건물로 뛰어넘으며 더 높은 건물로 향한다. 그녀는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몇 개월간 클라이밍 스쿨에 다니며 암벽등반의 기술을 익히고 체력을 단련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액션 신을 직접 소화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그냥 매일 뛰었던 기억만 있어요. 하루는 공사판에서 뛰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다리근육이 뭉친 상태라 몇 번 뛰지 않았는데도 힘이 금방 빠지더라고요. 감독님의 “컷” 소리가 들리자마자 주저앉아 울었어요. 도저히 걸을 수 없어 앉아 있는데 몸이 힘든 것보다 또 뛸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어요. 잘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속상하더라고요.”
“우리 영화 어떻게 보셨어요?”
<엑시트>에 함께 출연한 조정석은 ‘소녀시대’가 아닌 ‘배우’로서의 윤아를 이렇게 말했다.
“굉장히 영민하고 똑똑해요. ‘소녀시대’ 윤아로서 망가지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작품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걸 안다는 것에서 똑똑한 배우라고 느꼈죠.”
관객 역시 거침없이 망가지는 윤아를 보고 놀랐다는 반응이 상당수다. 이에 대해 그녀는 배우 윤아가 됐을 때만큼은 예뻐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비주얼에 대한 부담은 없어요. 스크린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아주 오래전에 버렸거든요. 사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의식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젠 남들이 윤아에게 원하는 모습보다 제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에 주력하고 싶어요. 연기를 하면서 제가 아닌 캐릭터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제 안의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시기인 것 같아요.”
이런 이유로 윤아는 캐릭터 선택에 특별한 제약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찰나 ‘의주’를 만났고 ‘소녀시대’ 윤아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란 설렘을 안고 출연을 결심했다.
“의주는 윤아라면 생각만 했을 것들을 실천하는 인물이에요. 겁이 많은 저와 달리 용감하고 능동적인 의주가 멋있게 느껴졌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했지만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완주하고 나면 성취감을 느낄 것이란 확신도 있었고요.”
극에서 의주는 국문학과 출신으로 교사 임용고사를 준비하다 연회장 부매니저로 일하고 있고, 용남은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는 청년 백수다. 두 캐릭터는 취업의 벽 앞에서 힘겨워하는 청년 세대를 대변한다. 극을 연출한 이상근 감독 역시 유독가스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현시대의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18살에 연예계에 발을 들여 최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그녀가 이런 상황을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터다.
“물론 제가 취업을 준비하거나 직장 생활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친구들에게 연예인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해 묻기도 했고요. 저는 큰 목표를 세우기보단 눈앞에 놓인 과제를 하나씩 해나가는 스타일인데, 그러면서 눈앞이 깜깜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공감하는 게 어렵진 않았죠. 지금 가장 큰 고민은 <엑시트>에 대한 반응이에요.”
자신에게 주어진 걸 하나씩 해나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연기를 한다는 그녀는 걸 그룹 출신 배우 윤아의 매력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중이다. 매 작품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며 대중의 반응을 기대한다는 것.
“데뷔할 때부터 가수와 배우를 병행하겠다고 마음먹진 않았어요. 운이 좋게 데뷔 직후 <9회말 2아웃>이란 드라마에 출연하게 돼 시작한 거죠. 예전엔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생각만 했어요. 요즘엔 어떤 것이든 기회가 주어지면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한 드라마든, 어떤 장면이든 현재 상황에 몰입하는 거죠. 이렇게 경험을 쌓아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가수와 배우 활동을 병행하며 연기 경력 역시 꽤 쌓였지만 아직까지 연기는 어렵고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다.
“출연한 작품 수가 늘어날수록 시각이 달라지는 느낌이에요. 예전엔 제가 어떤 것을 해야 대중이 좋아할지 고민했다면, 요즘엔 제가 보여주고 싶은 걸 선택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제가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여겨요. 결과보다는 작품과 캐릭터를 통해 제가 느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제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에 중점을 두죠. 차기작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오래전부터 팬들이 원해온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의주와는 정반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꾸민 부잣집 딸 역할요.”
비주얼에 대한 부담은 없어요. 스크린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오래전에 버렸거든요.
예전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윤아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젠 제가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서른 살에 찾은 여유
<엑시트> 촬영을 끝내고 휴식기를 가진 윤아는 ‘워라밸’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바쁜 스케줄 탓에 하지 못했던 친구들과의 기차 여행이나 운동, 요리를 하며 사소한 일상을 즐겼다. 20대를 워낙 바쁘게 보내 휴식을 즐길 틈이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도 부족했다.
“10대에 데뷔해 20대를 ‘소녀시대’로 보냈어요. 중·고등학생 땐 점심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음악을 소개하고 싶어 방송반 활동을 꼭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죠. 대학 땐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추억을 만들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 다른 학과 학생들이 와서 보고 그랬거든요. 물론 좋은 시절을 겪은 덕분에 지금 더 행복하고 여유롭죠.”
하지만 문득 20대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정작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데뷔 후 바쁘게 살면서 사춘기를 지내 서른을 앞두고 ‘인간 임윤아’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웠다는 것.
“흔히 ‘아홉수’라고 하잖아요. 29살에 특히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막상 그 나이가 되니 진짜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아홉수’란 말을 들어서 힘든 건지, 아니면 진짜로 이 시기에 맘고생을 겪고 지나가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너무 늦게 사춘기를 겪은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소녀시대’가 함께했기 때문에 20대에 만든 좋은 추억이 많다. 어린 나이에 만나 사회생활을 함께하면서 멤버들과 경험한 새로운 일들과 팬들과 쌓아 올린 추억이 있어 행복하다는 것.
“‘소녀시대’에 대해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을 함께한 친구이자 동료니까요.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지내고 나니 어떤 땐 친구 같다가 언니 같기도 하고 가족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우리 마음을 아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것 같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어요. 얼마 전 데뷔 12주년이었는데 우리가 굉장히 멋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녀시대’에 대한 자부심과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높아졌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JTBC 예능 <캠핑클럽>을 보고 멤버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JTBC 예능 <효리네 민박>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출연했던 터라 방송을 챙겨 봤는데 시대는 다르지만 걸 그룹으로서 느끼는 것들을 공감할 수 있었다고.
“방송을 보면서 ‘소녀시대’ 단체 카톡방에 ‘우리 회장님이 나오는 방송을 봐줘’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미 다들 보고 있더라고요. 방송을 보면서 언젠가 멤버들이 다 같이 캠핑을 떠나자고 이야기했죠. 우리는 캠핑카는 안 되고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것 같아요.”
혼돈의 시기를 지나 서른 살이 되고선 여유를 찾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잘하겠다는 생각의 무게를 덜고 최선을 다했다면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예전엔 완벽하게 하고 싶어 사소한 것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제 자신을 괴롭힌 적도 많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유를 갖게 됐어요. ‘최선을 다했다면 괜찮아. 조금 부족할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일까요? 예전엔 주변을 의식해 프라이빗한 곳에서만 밥을 먹었는데 요즘엔 편하게 다니는 편이에요. 이번에 영화를 촬영하면서도 다른 생각들이 개입하지 않아 좋았어요.”
윤아는 앞으로도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며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다. 화려하게 보낸 20대를 지나 맞은 30대엔 그 시기에 맞는, 한 단계 높아진 다른 무언가를 얻고 싶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윤아라는 이름이 또 보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꿈꿔요. 혹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요. 차근차근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려고요.”
데뷔 12년 차에 접어든 윤아는 아직도 새로운 경험이 즐겁다. 무대 위 요정의 타이틀을 벗고 신인의 마음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다는 것. 서른 살의 윤아는 아직 보여줄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