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역 인근에 위치한 회사에 다니는 김민정 씨는 최근 1년간 퇴근 시간의 풍경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오후 6시에 삼성역에 나가면 퇴근하는 사람들이 물밀듯이 넘쳐나 넓은 대로가 꽉 차는 모습을 봅니다. 퇴근 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무리예요. 예전에는 야근을 하는 사람도 많아 퇴근 시간이 들쑥날쑥해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지 1년, 이를 적용한 300인 이상 기업에서는 회사 분위기가 바뀌고 퇴근 후 삶이 정착되는 등 ‘워라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83개 기업 근무자에게 노동시간 단축 시행으로 인해 발생한 변화에 대해 묻자, 전체의 44.6%가 ‘정시 퇴근 분위기 정착’이라고 응답했고, 그다음으로 일하는 방식 개선으로 업무 집중도 향상(28.9%), 시차 출퇴근제 등 유연 근무제 정착(18.1%)의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한국노동연구원)
‘칼퇴’, 저녁 있는 삶의 실현
주 52시간의 근무시간을 초과하지 않기 위해 기업에서는 정해진 근무시간이 지나면 강제로 직원의 사무용 PC가 꺼지도록 한 ‘PC 오프제’를 실시하거나 사무실 조명을 소등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나타났다. 업무 처리 단계를 단순화하거나 불필요한 회의를 줄이는 식이다. 회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알람 시계를 배포하고 회의를 서서 하는 등 다양한 방식이 선보였다. 또한 형식적인 PPT를 없애고 워드 1장 분량으로 요약하거나 전자결재를 도입하는 등의 방식도 많다. 특정 시간을 집중 근무시간으로 정해 업무 이외 일을 차단하거나 자신이 근무하는 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하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는 회사도 생겼다.
광화문에 있는 대기업에 다니는 오영희 씨는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해졌어요. 제일 좋은 건 퇴근이나 연차, 휴무 문제로 눈치 보는 일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또 생각보다 일이 넘치거나 무리하게 되지는 않고 퇴근 시간이 일정해지니 일을 집중해서 하게 되더라고요”라고 밝혔다. 회사에 따라 다르지만 워킹맘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에 다니는 최정원 씨는 눈치 보는 일이 없다고 좋아했다. “업무 시간의 변동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요. 6시면 반드시 일어나는 규칙이 정해진 것 같아 좋습니다. 만일 5시에 일을 시키면 ‘내일 할게요’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어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명암 차
그러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명암 차는 존재하며 업종별로도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고 고용주와 근로자의 입장 차도 있다. 업종과 산업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적용에 따른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후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는 답변 역시 42.2%의 응답률을 보였다.
A씨는 “도입된 이후 시행하려는 듯 폼만 잡다 결국 지켜지는 것은 없었다”면서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야근이 없다고 업무량이 줄어드는 건 아니에요. 일이 많아 퇴근을 하지 못하죠. 일 프로세스나 시스템, 인력, 전결 규정 등 회사 시스템이 개선돼야 효율적 업무가 가능한데, 작은 회사에서는 그게 쉽지 않아요. 아직도 장시간 노동을 해야 뭐라도 나온다는 마인드도 뿌리 뽑기 힘든 문화예요.”
또, 시간외수당이 따로 없는 포괄 임금제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고용부는 포괄 임금제 적용 근로자 역시 주 52시간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분위기다. A씨는 “사무직은 보통 야근 수당 자체가 따로 없고, ‘포괄 임금제’로 급여 안에 대략의 야근수당이 포함돼 있어 제도와는 상관이 없어요”라고 현실적 문제를 말했다.
중소기업들은 특정 기간의 근무시간을 연장하는 대신 다른 기간의 근무시간을 단축해 평균 근무시간을 법정 근로시간 내로 맞추는 탄력 근로제 단위 기간을 문제 삼고 있다. 물류나 생산 등 업무량이 주기나 계절적으로 유동적인 기업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데 아이스크림이나 음료 생산 업체들은 당장 7~8월 성수기에 인력 운영하는데 현행 탄력 근로제 기간인 3개월은 짧다는 것. 이들은 다위 기간을 최대 1년까지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노동계는 탄력 근로제를 확대하면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의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현재 노사정은 협의하지 못한 채 처벌을 유예하는 계도 기간을 수차례 재연장 중이다.
노동환경 개선 효과 보여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노동환경은 개선되는 분위기다. 장시간 노동의 대표 주자로 거론됐던 게임업계의 엔씨소프트, 넷마블 등에서는 포괄 임금제를 폐지했다. 또 이미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한 회사들에서는 불필요한 야근이 줄고 업무 효율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자체적으로 내놓고 있다. 지난해 7월 300인 이상 사업체 약 3,600곳을 대상으로 시작된 주 52시간 근무제는 지난 7월 1일부터 도입 시 배제됐던 300인 이상 금융, 노선버스, 방송 등 21개 특례 업종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추가 도입됐다. 또 내년 1월부터는 50인 이상 사업장으로, 2021년 1월에는 5인 이상 사업장까지 단계적으로 도입된다. 2017년 2,024시간으로 OECD 국가 중 연간 노동시간이 가장 긴 국가 2위에 이름을 올린 한국이 2022년까지 연간 노동시간을 1,800시간대로 줄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무엇이 바뀌었나요?
7월 3일부터 9일까지 <우먼센스> 독자 116명이 주 52시간 근무제로 인해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응답자의 절반이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었으며, 그로 인해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