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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패션에 빠진 밀레니얼 세대

패션의 암흑기로 치면 1980년대 못지않은 2000년. 섀기 커트에 브리지를 넣고 건빵 바지, 본 더치 티셔츠를 입은 싸이월드 미니홈피 사진은 모두에게 지우고 싶은 흑역사이다. 그런데 그때 학창 시절을 보낸 밀레니얼 세대는 2000년의 어글리 패션에 다시 한 번 열광하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왜?

On August 2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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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마지막이자 1000년 만에 연도의 앞자리가 바뀐 2000년. 어렸을 때부터 줄기차게 들어온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Y2K 문제(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금융, 군사, 의료 등 사회 시스템이 오작동해 마비될 수 있다는 경고), 인류 종말에 대한 유언비어, 정체 모를 공포와 혼란이 가득한 터널을 무사히 통과한 뒤 우리 모두는 연도의 무려 세 자리 숫자가 0으로 리셋 되는 짜릿하고도 황홀한 순간을 맞이했다.

1990년대 말을 대혼돈으로 빠져들게 한 IMF 금융위기와 벤처 기업의 버블 붕괴 등 불안한 세기말을 가까스로 마무리하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시점. 1999년에 국내에 시작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200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자리 잡아 모뎀을 기반으로 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 통신 동호회를 대신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서비스가 확대됐다. 그래서 모두가 애용한 싸이월드! 미니홈피, 일촌, 파도타기, 도토리, 투멤, 브금 등 새로운 용어가 탄생하고, 싸이월드 속 얼짱과 스타일 아이콘들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냈다.

이는 1950년대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이 탄생해 상류층이 아니고서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중에게 새로운 패션의 기회가 생긴 이후로 50년 만에 또 한 번 탄생한 패션 전복의 타이밍이었다. 유행이 위에서 아래로, 즉 런웨이에서 리얼웨이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동의와 공감을 기반으로 스트리트에서 자생했다. 인터넷 쇼핑몰이 생겨났고, 값싼 SPA 브랜드가 패션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밀레니얼 세대가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지금, 스트리트 패션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2000년대가 새로운 뉴트로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럼 조금 더 옛날 얘기를 해볼까? 바뀐 연도의 앞자리처럼, 기존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규칙이 세팅되기 시작한 2000년은 여성에게도 절호의 찬스였다. 1999년, 삼성 컬러 프린터 광고에서 하얀색 민소매 상의와 바지를 입고 테크노댄스를 춘 전지현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느낌대로 마음껏 춤을 추는 이 여자아이는 누구? 때마침 사회적으로 '엽기적'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2001년 전지현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 출연해 순종적인 여성이 줄 수 있는 매력은 과거의 유물일 뿐임을 '참교육'했다. 강한 여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은 욕망이 모두에게 이글거릴 때, 유행어인 '엽기적'이라는 수식어가 그녀의 일탈을 사회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해외에서는 틴에이저 팝스타들이 유행을 리드했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브리트니 스피어스, 에이브릴 라빈이 주도한 틴팝 열풍이었는데, 이들 역시 터프하고 도발적인 스타일을 즐겼다. 비행기 정비사들이 입는 워크웨어의 전형인 카고 팬츠(일명 건빵 바지), 허리선이 배꼽보다 한참 아래까지 내려가 홀쭉한 배와 섹시한 치골을 드러내는 로 라이즈 진(기억나나? 트루릴리전)에 가슴을 간신히 가리는 크롭 톱을 입는 것이 그들의 패션 공식이었다. 조금 싸구려같이 보이는 통굽 슈즈나 새천년을 상징하는 PVC 소재의 젤리 슈즈를 신고, 헤어스타일은 수사자의 갈기 같은 섀기 커트 혹은 울프 커트에 알록달록 브리지와 염색을 넣어 강렬한 인상을 줬다.

국내에서는 백지영, 소찬휘, 김현정, 왁스, 서인영 등이 이런 스타일을 즐겼다. 한편, 제니퍼 로페즈 같은 라틴계 걸크러시들은 아마조네스 여전사 같은 매력을 뽐냈다. 그녀가 43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착용한 베르사체의 트로피컬 드레스는 가슴부터 배꼽까지 노출하는 과감함으로 화제를 모았다. 부지런히 패션쇼와 파티를 다니며 얼굴을 알린 힐튼그룹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도 빼놓을 수 없는 2000년대 아이콘. 오컬트 문양을 즐겨 사용한 본 더치 티셔츠와 벨벳 소재의 쥬시 꾸뛰르 트랙 슈트, 핑크색 시폰 원피스와 1999년의 영화 <매트릭스>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스포티한 고글 등, 어울리지 않는 투머치 믹스매치로 비호감의 전형이 된 그녀는 '욕하다 정든다'는 대중 스타의 새로운 공식을 만들어냈다. 갖은 욕을 먹으며 일단 얼굴을 알린 뒤에는 자신의 유명세를 사업에 이용하며 비즈니스 우먼으로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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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앵클 스트랩 웨지힐 플랫폼 샌들 가격미정 마이클 마이클코어스. 2 스웨이드 소재의 플랫폼 샌들 4만9천원 버쉬카. 3 심플한 디자인의 카고 팬츠 15만9천원 앳코너.

1 앵클 스트랩 웨지힐 플랫폼 샌들 가격미정 마이클 마이클코어스. 2 스웨이드 소재의 플랫폼 샌들 4만9천원 버쉬카. 3 심플한 디자인의 카고 팬츠 15만9천원 앳코너.


똑똑하고 힘 있는 여자들의 시대 2000년대. 그녀들은 자신을 위한 선물을 과감히 지를 줄 알았고, 명품 브랜드는 그들의 요구를 정확히 읽어냈다. 그리하여 그녀들을 위한 선물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잇 백'이다. 프라다, 루이비통, 구찌, 펜디, 디올, 샤넬, 클로에, 마크 제이콥스 등 당시 명품관의 중심에 있는 브랜드들은 로고나 심벌을 크게 강조해 최대한 눈에 띄게 만들고, 어지간한 보석 못지않은 가격으로 이를 판매해 여성들을 열광하게 했다. 당시 유행한 HBO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주인공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펜디 바게트 백, 디올 새들 백 등은 강도를 당할 때도 절대 빼앗길 수 없고, 남자친구보다 훨씬 더 여자를 위로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의 로고 스타일이 요즘 디팝(depop) 등 리셀 플랫폼에서 인기리에 거래되고 있다는 점이다. 벨라 하디드, 켄달 제너, 리타 오라 같은 유명인을 비롯해 패션 인플루언서인 아데노라 등 잇 걸들도 2000년대의 빈티지 제품을 애용하고 있다. 아마도 한 시대를 풍미한 센 캐릭터에 대한 존경심도 있지 않을까? 알렉산더 왕과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 등 밀레니얼 세대 디자이너들은 2000년대에서 영감을 받아 2019년 S/S 시즌 런웨이를 선보이며 뉴트로 트렌드를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이동시키고 있다. 사카이, 마르타 야쿠보프스키, 베르사체 등은 로 라이즈 팬츠를 대거 선보이며 배꼽 위까지 올라간 팬츠의 허리선을 다시 배꼽 아래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루이비통, 펜디, 발망, 발렌시아가, 마린 세르 등은 런웨이에 사이버틱한 퓨처리즘 트렌드를 소환해 얼굴의 반 이상을 덮는 고글 선글라스와 PVC 재킷 등을 선보이며 2000년대 패션을 새롭게 해석했다. 에나멜 소재의 트래커 재킷, 우주선 승무원을 연상케 하는 괴상한 점프슈트, PVC 등 싸구려 소재로 번쩍거리는 옷 등 2000년대의 유행은 패션의 암흑기라 불리는 1980년대 못지않게 이상하다. 이 촌스러운 옷이 고급스러운 새틴 드레스를 입고 레드 립을 바른 채 출세한 남편 옆에서 트로피 와이프로서의 우아함을 뽐내던 1990년대 여자들을 깔깔 비웃으며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당당한 감성이 요즘 밀레니얼 세대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이참에 조신한 룩에서 벗어나 주머니가 잔뜩 달린 카고 팬츠를 입고 강한 면모를 한번 뽐내보는 것은 어떨까?

CREDIT INFO
에디터
정소나
명수진(패션 칼럼니스트)
사진
쇼비트, 스플래시 뉴스
2019년 08월호
2019년 08월호
에디터
정소나
명수진(패션 칼럼니스트)
사진
쇼비트, 스플래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