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에서 주얼리 디자이너로
그녀 이름은 우노초이. 19살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만화가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모델이 됐다. 신비하고 우아한 동양계 모델로 주가를 올렸고, 13년간 유명 멀티숍의 전속 모델로 활동했다.
결혼 후엔 주얼리 디자이너로 전업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 숱하게 착용했던 장신구, 앤티크 액세서리 등이 그녀의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
지금 그녀는 60대를 지나는 중이다. 꽃다운 나이는 바로 지금이다.편안하고 우아한 의상을 입은 그녀는 노출에도 흔들림이 없다. 여성의 몸은 이토록 세월을 머금고 더할 나위 없이 아티스틱할 뿐이다.
“모델이라는 직업은 옷에 대해 선택권이 없어요. 아무거나 입고 그럴듯하게 소화를 해야 하죠. 그래서 어떤 옷이든 거부 반응이 없어요. 오늘 입고 온 옷도 시장에서 산 드레스를 줄여서 입은 거예요. 그래도 동네에서 ‘옷 예쁘게 입는 아줌마’로 소문이 나 있어요.(웃음)”
그녀의 라이프는 단순하다. 일할 때 외엔 집과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행복을 찾는다.
“집이 제게 만족을 주고 행복을 주는 공간이에요. 내 단골집이 우리 집이고 내 맛집이 우리 집이죠. 저는 그런 저를 참 사랑해요.”
그녀는 서울과 샌타모니카를 오가는 삶을 살고 있다. 요즘은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
“이곳에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동네 꽃집에 꽃을 사러 가요. 그러곤 동네 한 바퀴를 쭉 도는 거죠.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집에서 지내요. 저는 혼자 밥 먹을 때도 예쁜 그릇에 담아 먹어요. 집이지만 마치 호텔처럼 지내죠. 사치스러운 게 아니고 제게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예요. 많은 사람이 생산적인 걸 원해요. 뭘 했어? 뭘 만들었어? 무슨 요리를 했어? 근데 저는 노는 것도 일이에요. 낮잠도 잘 자요. 이런 말을 사람들이 이해하려나.(웃음) 집에서 놀 때도 너무 바빠요.”
현재 그녀의 삶은 70%가 서울에 있다. 미국에서의 삶을 완전히 정리하진 못했다.
“‘동네’가 참 그리웠던 것 같아요. 제가 가회동에 사는데 저희 동네엔 마켓도 있고 떡집도 있고 세탁소도 있고 꽃집도 있죠. 미국은 어딜 가도 차를 타고 나가야 해요. 동네의 소소함이 없죠. 요즘 유행하는 말로 ‘소확행’이라고 하죠? 저는 예전부터 그 사소함이 좋았어요.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나를 즐겁게 했어요. 저는 시골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꿈 같지만 집 밖에 나가면 할머니들이 평상에 앉아 있고, 오고가며 인사도 나누고…. 시골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사는 가회동이 그렇게 ‘소담소담’해요. 골목으로 내려가면 진짜 할머니가 앉아 계세요. 그럼 저는 말도 걸어보고 인사도 하죠. 저, 동네에서 얘기 잘하는 아줌마예요. 할머니들, 슈퍼마켓 주인 어르신, 청소하는 아저씨한테도 인사 잘하는 아줌마요.”
작은 꽃. 큰 꽃, 화려한 꽃, 소박한 꽃…, 이렇듯 다양한 꽃이 있는데 어떻게 18살만
꽃일 수가 있어요. 마흔을 닮은 꽃도 있고, 예순을 닮은 꽃도 있죠. 나이도 똑같아요.
이 꽃이 더 예쁘고 저 꽃이 덜 예쁘고가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꽃다운 나이죠.
그녀에게 서울과 샌타모니카의 추억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그녀에게 서울은 바쁜 곳이다. 내가 집에 있어도 밖은 늘 바쁜 도시. 미국에서는 바닷가에 오래 살았다. 시야가 넓고 한가하다. 근데 그 한가함이라는 게 조금 다르다. 미국은 침범당하지 않는 적막함이라면 서울은 언제든 노크당할 수 있는 적막함이랄까.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어요.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식구가 없는 거죠. 근데 서울은 친구도 있고, 인연도 더 있으니 서울로 많은 걸 옮겨 왔어요. 부모님이 안 계시니 원점으로 돌아온 거죠.”
그녀의 남편은 ‘가회동 집사’라는 수식어를 가진 빈센트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오고, 미국의 유명 기업에 다녔던 빈센트는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줄곧 미국에서 살았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동네 친구’였고, 10년 뒤 다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죠.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남편이 무슨 얘기 끝에 ‘내가 없으면 보고 싶지 않아?’ 하고 묻는 거예요. 사실 저는 보고 싶고 그립기 전에 아쉬움이 먼저예요. 아, 남편이 있었으면 이 상황에서 이걸 했을 텐데, 하는 거요. 나에게 사랑은 그런 거예요. 조금 쌀쌀맞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남편에게 감추지 않고 다 말해요.(웃음)”
그녀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언제나 꽃다운 나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다들 열여덟 살이 꽃다운 나이라고 말하죠. 유치하지만 어쩌면 그 말에 대한 저항이에요.(웃음) 작은 꽃. 큰 꽃, 화려한 꽃, 소박한 꽃…, 이렇듯 다양한 꽃이 있는데 어떻게 열여덟 살만 꽃일 수가 있어요. 마흔을 닮은 꽃도 있고, 예순을 닮은 꽃도 있죠. 나이도 똑같아요. 이 꽃이 더 예쁘고 저 꽃이 덜 예쁘고가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꽃다운 나이죠.”
우노초이 인생에서 꽃이란? “나! 하하.”
그녀가 밝게 웃는다.
“낭창낭창한 꽃을 좋아해요. 오래 사는 꽃, 확 폈다가 확 지는 꽃을 좋아하진 않아요. 시들어도 잎이 후루룩 떨어지지도 않고 조용히 깔끔하게 시드는 꽃을 좋아해요.”
그녀의 하루 일과는 화병에 물을 갈아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손님을 위해 꽃을 꽂지 않고 자신을 위해 꽂는다. 그렇게 꽂은 꽃을 현관문에서도 들여다보고 거실에서도 들여다본다. 마치 혼자만의 중요한 의식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꽃은 오래간다. 정성을 쏟으니까.
“사실 나는 무뚝뚝한 편인데, 주변에서 ‘천생 여자’라는 말을 많이 해요. 아마도 환경적인 것 때문일 거예요. 나는 집에서 억척스럽게 나서서 하는 게 없어요. 손님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요. 어딜 가도 주도해서 나서는 게 없죠.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게 몸에 뱄어요.”
언제나 꽃다운 나이다
그녀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직업만큼은 다이내믹하게 바뀌었다. 만화가에서 패션 모델, 그리고 디자이너까지. 다음 스텝은 뭘까?
“한 번도 계획하고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어떤 직업을 힘들게, 버텨가며 한 것도 없고요. 모델이 너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하다 보니 다들 잘한다고 하니까 잘하는 줄 알았죠. 난 그냥 오늘 <우먼센스>와 인터뷰를 잘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살았어요. 순간에 집중하면서요.”
그녀는 모델로 전성기를 구가할 때 첫 결혼을 했고, 이후 미련 없이 은퇴했다. 그녀는 당시 13년째 유명 멀티숍의 전속 모델이었다.
“이혼하면서 미련 없이 그만뒀어요. 이혼했기 때문에 그만둔 게 아니고 그냥 그만두고 싶었거든요. 난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백인들 사이에서 모델 활동을 할 때도 ‘쟤네들보다 내가 더 특별해’라고 생각하며 일했어요. 태도가 항상 뚜렷했죠. 동양인이 드물었기에 늘 내 외모는 그들의 관심 대상이었고, ‘넌 쌀부대를 입어도 예쁘구나!’’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죠.”
그녀는 모델 일을 할 때도 유명세에 집착하지 않았다. 늘 내가 있는 자리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현실에 만족했다. 그래서 오히려 조건이 까다로운 모델이었다.
“이탈리아 컬렉션의 섭외가 들어오면 비행기 왕복 티켓, 호텔, 모델료 등등 내가 원하는 조건일 때만 움직였어요. 출연료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내가 편한 것에 포커스가 맞춰 있는 거죠.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도 없었어요.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내 인생 전반의 애티튜드가 그랬어요.”
되돌아보면 20대는, 반짝반짝거렸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그때 사진을 보면 빛이 난다.
“유명 모델로 활동하면서 온갖 좋은 곳은 다 다녔어요. 철부지였고 동양인이었지만 그 누구도 날 함부로 대하지 않았죠. 일을 많이 하지도 않았어요. 매사에 안달복달하지 않았죠, 그런 애티튜드 때문에 모두 나를 특별하게 대했어요. 제 20대는 그랬어요.”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40대를 맞았다. 방황했던 시기다. 인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아,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했던 순간이었다.
“부모님이 반대하던 결혼을 했고, 결국 이혼을 했어요. 그 당시에 부모님이 ‘네 선택이니 후회하거나 울지 말라’고 하셨기에 그럴 수가 없었죠. 한데 내 성격답게 오랫동안 방황하지 않았어요. 지금의 남편인 빈센트를 만나 바로 동거를 시작했거든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죠.”
그랬기에 특별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젊은 친구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부모’라는 존재에 많이 흔들리죠. ‘내가 너를 어찌 키웠는데’라는 말을 한 번씩은 다 들어봤을 거예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엄마의 고민이지 내 고민이 아니었어요. 난 학교를 중퇴하고 결혼했어요. 사랑에 빠졌거든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사랑과 학교 중 학교를 선택했을까요? 아니에요. 또 사랑을 선택했을 거예요. 엄마의 고민과 내 고민, 그 경계를 정확히 알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돼요. 그래야 인생에 업 앤 다운이 덜해요. 다 흡수하면 평온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리고 60대에 들어섰다.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예전보다 모든 게 귀해졌다. 이렇게 촬영 현장에서 좋은 에너지를 받는 것도 좋고, 새로운 인연도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자신에게 집중하기보다 모든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나이 들어서 유해지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묘미죠.” 그녀가 웃었다.
인터뷰 말미에 물었다.
“개인적으로 ‘롤모델’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허황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난 롤모델이 없어요. 다르게 말하면 롤모델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멋지게 소화한 여자를 보면, 그 순간 롤모델은 그 여자인 거예요. 내일의 롤모델은 또 달라지죠.”
그녀의 60대는 서울에서의 새로운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다. 수십 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서울의 사계절을 경험하는 중이다. 마치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19살로 돌아온 기분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내가 꿈꾸던 ‘동네’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죠. 그럴 때면 문득 내가 인생을 잘 살았나, 싶을 정도로 이 순간이 썩 괜찮게 느껴지기도 해요. 미국에서의 시간도 좋았지만 지금도 또 좋아요.”
인생은 ‘묘미’ 투성이다. 이렇듯 아름답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