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에서 '흥미로운 시대'느끼기
세계 최고의 예술 축제라 불리는 베니스비엔날레의 2019년 주목할 만한 경향을 소개한다. 베니스비엔날레 시즌을 겨냥해 아르세날레(Arsenale)와 자르디니(Giardini) 파빌리온 외에도 도시 곳곳에서 국제적 전시가 열리고 있어 반갑다. 지난 5월 11일 시작된 베니스비엔날레는 오는 11월 24일까지 열린다.
1 한국 여성 작가의 힘
이번 베니스비엔날레에선 한국 여성 작가 군단의 파워를 실감할 수 있었다. 5인의 심사위원으로 광주비엔날레 김선정 대표가 선정되고, 본전시 참여 한국 작가 이불, 아니카 이, 강서경 모두 여성이었다. 한국관의 김현진 예술감독과 정은영,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 작가 역시 여성이라는 것이 우연이라면 우연이다.
이불 작가는 GP를 해체할 때 나온 여러 종류의 잔해물을 녹여 4m 높이의 건축물을 만들었다. 가장 위에서 빛나는 전구는 과거 선박의 항해 시그널, 중간의 전구는 무전용 신호, 가장 밑의 깜빡이는 신호는 모스 부호로 "그런 것 같다"는 철학적 답변을 관객에게 보내고 있다. 강서경 작가는 '땅, 모래, 지류' 연작과 '할머니의 타워' 연작을 선보였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작품들로 총감독 랄프 루고프(Ralph Rugoff)에게서 "나의 할머니가 생각난다"는 찬사를 받았다. 현재를 가늠하며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조용한 작품은 슬픔이라기보다는 모두가 맞이해야 하는 미래에 대한 강하고 아름다운 태도를 보여준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설치 작품으로 종이 풍경화가 아닌, 일상에서 비롯된 현대 회화를 보여준다. 아니카 이는 인간의 세균을 배양한 작품으로 대형 설치 작업을 선보였는데, 해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답게 대단히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본전시 79팀의 참여 작가는 모두 아르세날레에 1점, 자르디니 파빌리온에 1점을 전시하고 있어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본전시 작가 중 42명이 여성이다.
90개 국가관 중 아시아에서는 한국관과 일본관만이 메인 전시장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관의 작가들은 여성국극, 성소수자, 바리공주, 국경을 넘나드는 무용수 최승희 등 힘든 삶을 살았던 세계의 여성을 영상 작품에 담았다. 특히 한국계 덴마크인인 제인 진 카이젠 작가는 작품 일부에 직접 출연해 입양아로서의 아픔을 승화했다. 제주 무당의 품에 안겨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는 작가의 모습이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2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번 '국가관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투아니아관에서는 예술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국관과 같은 메인 장소에 있지 않기에 수상 전만 해도 리투아니아 전시를 본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수상 이후 좁은 골목에서 아침부터 줄을 서며 인산인해를 이룬 '태양과 바다'는 영국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루시아 피트로이스티(Lucia Pietroiusti)가 예술감독을 맡은 일종의 뮤지컬이다. 주제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다. 1층은 모래사장으로 이뤄져 20명의 배우가 노래하고 휴양하며, 관람객은 2층에서 이를 내려다보는 형식이다. 배우들은 마이크를 차고 누워 순서대로 영어로 노래하며, 중간중간 작은 개와 어린아이도 의사 표현을 한다. 회화도, 조각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미술 작품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창밖으로 보이는 베니스 풍경과 상반된 해변의 풍경을 하루 종일 볼 수 있어 재미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끊임없이 노래하고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의 삶이 예술로 인해 오히려 고달파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3 제3세계의 축제
이번 비엔날레의 수상자를 살펴보면 일련의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모두 아프리카나 국제적 파워가 부족한 제3세계 출신이다. 우선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아서 자파(Arthur Jafa)가 황금사자상을 품에 안았다. 거대한 타이어에 체인을 감은 설치 작품은 미국의 쇠퇴한 자동차 산업과 이에 따라 일자리를 잃은 흑인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보여준다.
역량 있는 젊은 작가를 위한 은사자상은 키프로스 공화국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하리스 에파미논다(Haris Epaminonda)가 받았다. 조각난 추억, 역사 및 상상 속의 연결에서 만들어진 이미지, 대상, 텍스트, 형태 및 색상을 신중하게 구성한 설치 작품으로 개인과 역사가 강력하면서도 느슨한 웹으로 압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본전시의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은 멕시코의 테레사 마르골레스(Teresa Margolles),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오토봉 은캉가(Otobong Nkanga)가 수상했다. 테레사 마르골레스는 마약 중독자가 우글거리고, 폭력에 노출된 멕시코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총탄이 박힌 초등학교 콘크리트 벽을 통째로 전시장으로 가져왔다. 오토봉 은캉가의 메인 작품은 토지, 신체 및 시간의 정치에 대한 탐구를 담은 세로로 긴 26m의 대리석 작품이다.
4 거장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베니스비엔날레 시즌을 겨냥해 선보이는 위성 전시는 주로 거장들의 회고전이다. 우선 베니스에서 첫선을 보인 우리나라 윤형근 화백의 전시를 꼽을 수 있다. 베니스 포르티니 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정식으로 초청받은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의 수출 전시이기도 해 관심을 끈다. 포르투니 미술관장 다니엘라 페레티는 윤형근의 열렬한 팬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의 전시가 성사될 수 있도록 밀어붙였다고 한다. 윤형근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처음 본 현지인과 세계 각국의 관람객들은 낯선 이름의 작가이지만 대단히 감동적이라는 호평을 쏟아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회고전 역시 압권이다. 거꾸로 그려진 인물 회화들의 초창기부터 최근작까지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크고 작은 나무 조각들도 출품돼 바젤리츠의 모든 것을 감상할 수 있어 반갑다.
그리스 출신의 미술가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의 프라다재단 미술관 회고전도 호평 일색이다. 설치미술의 거장으로, 1960~70년대 아르테 포베라(가난한 미술) 운동의 주역이었던 그의 대표작 '무제'도 아름다운 첼로 연주와 함께 재연됐다.
팔라초 그라시에서 열린 뤽 투이만(Luc Tuymans), 팔라초 프란체티의 프랑스 거장 장 뒤뷔페(Jean Dubuffet) 전시 등도 빼어나다. 비엔날레가 막을 내린 이후 세계 순회 전시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현지인처럼 베니스 즐기기
베니스를 여행하는 전형적인 순례는 이제 그만. 현지인에게 물어본 베니스의 정취를 만끽하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1 이탈리아 유일의 필립 스탁 디자인 호텔
팔라치나 그라시(palazzina grassi)
베니스에는 크고 작은 호텔이 아주 많다. 이 호텔 중에 어디로 갈 것인가? 유서 깊은 역사와 전통의 베니스에서 오히려 현대적 디자인을 가미한 호텔에 묵어보는 것은 어떨까?팔라치나 그라시는 이탈리아 유일의 필립 스탁(Pilippe Starck) 디자인 호텔이다. 스위트 룸에서는 베니스의 랜드마크인 대운하(Grand Canal)의 전망을 바라다보며 베네치안의 휴식을 누릴 수 있다. 주니어 스위트 룸, 디럭스 룸, 슈페리어 룸에서는 베니스 특유의 장밋빛 지붕을 조망할 수 있다. 16개의 객실과 6개의 레지던스 스위트 룸, 레스토랑, 테라스, 라운지가 있다. 베니스의 낭만을 담은 5성급 호텔답게 아침 식사는 느긋하게 낮 12시까지 할 수 있으며, 와인을 곁들인 룸서비스를 주문하는 것도 여유롭다. 일종의 유머를 더한 필립 스탁 특유의 가구도 들여놓았다. 샹들리에와 오브제는 이탈리아 무라노섬 유리 공예의 정수다. www.palazzinagrassi.com
2 베니스 셰프의 베네치안 요리
리스토란테 산타 마리아 포모사 (Ristorante Santa Maria Formosa)
베니스에서 태어난 셰프 안젤로 판타시아(Angelo Fantasia)의 자신만만한 고향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 역사를 담은 포모사 교회 광장에 위치한다. 추천 요리로 '오늘의 생선' '오늘의 파스타' '오늘의 리소토'가 별도로 준비돼 있어 처음 방문한 이들도 마음 편히 주문할 수 있다. 생선은 매일 종류가 달라진다. 잘생긴 웨이터가 생선뼈를 직접 발라준다.
베니스의 파스타는 꼬들꼬들하게 씹히는 알 덴테(al dente)로 조리되므로 한국인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소화시킬 자신 없는 이들은 주문하면서 미리 푹 삶아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리소토는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2인분 이상부터 주문 가능하므로 꼭 확인할 것! 이곳은 디저트도 훌륭하다. 아침에 구운 블루베리 케이크, 초콜릿 범벅의 사랑스러운 쇼콜라, 푹신한 티라미수가 기분까지 달콤하게 해준다. 점심 세트도 주문 가능하며 15유로다.
Castello, Campo Santa Maria Formosa, 5245, 30122 Venezia VE, Italy / ristoranteformosa.com
3 나무로 만드는 모든 것
시뇨르 블룸(Signor Blum)
베니스는 무라노섬으로 대표되는 유리 제품으로 유명하다. 곳곳에 가득한 유리 제품 말고 나무 공예를 보고 싶다면 바로 이곳을 방문해보자. '시뇨르 블룸'은 베니스 도르소두로(Dorsoduro) 지구에서 1978년에 설립됐다. 장인들이 직접 만든 목제 선물용품 및 가구 소품을 생산한다. 상점과 공방 모두 베니스 중심가에 있다. 베니스의 풍경, 비행기, 풍선, 무지개, 동물, 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독창적인 문양이 시계, 자석, 실루엣, 책갈피의 형태로 만들어진다. 퍼즐 모델도 있다. 나무 위에 물감으로 채색되며 온라인으로도 주문 가능하다. 특별 주문으로 원하는 디자인을 직접 의뢰할 수도 있다. www.signorblum.com
4 치케티+ 스프리츠
칸티네 델 비노 지아 스키아비(Cantine del Vino gia Schiavi)
스페인에 핑거 푸드 '타파스'가 있다면, 베니스에는 '치케티'가 있다. 곤돌라 뱃사공이 피로를 풀기 위해 마셨다는 베니스 전통 칵테일인 오렌지색 스프리츠(Spritz)도 맛봐야 한다. 독일 추상주의의 거장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개인전이 열리는 아카데미아 미술관 인근의 현지인도 좋아하는 치케티 맛집을 추천한다. 대부분 치케티는 빵 위에 각종 재료를 듬뿍 올려서 먹는다. 엔초비, 치즈, 살라미, 소시지, 달걀, 새우, 고추, 심지어 티라미수까지 올려진다. 이곳은 와인과 각종 술도 저렴하게 판매하며, 낮에는 가게 안 좌석이 부족해 거리에서 치케티를 맛보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베네치안은 치케티를 파는 치케테리아를 옮겨 다니며 칵테일과 핑거 푸드를 즐기기도 하는데, 이를 '바카로 투어'라고 한다. 집집마다 다른 치케티를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Fondamenta Nami, 992, 20123 Dorsoduro, Venezia (+39 041 523 0034)
5 당신의 눈동자에 프로세코 건배!
리스토란테 오페라 (ristorante L'OPERA)
윤형근 작가의 전시가 열리는 포르투니 미술관 근처에 위치한 운치 있는 레스토랑. 바닷가에 위치한 베니스의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로 만든 음식을 추천할 만하다. 만찬의 시작은 베니스 사람이라면 늘 그렇듯이 프로세코(Prosecco)나 스프리츠로 해야 한다. 프로세코는 베네토 지방의 프로세코 포도 품종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다. 가볍고 상쾌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마시기 좋다.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답게 와인은 매그넘 사이즈로도 판매하는데, 인원이 많은 경우 큰 사이즈를 주문해도 좋다. 메인 요리로는 모둠 생선구이나 오징어튀김, 스테이크를 곁들이면 좋다. 여러 생선과 새우로 구성되는 모둠 생선구이는 가격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시가에 따라 결정되기에 미리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한국에 비해 많이 비싼 것은 아니다. 리소토와 파스타도 맛깔스럽다.
San Marco 3567/8/9 (campo sant'Angelo) 30124 Venizia (+39 041 241 2651)
6 선박 전문가의 스튜디오
질베르토 펜초(Gilberto Penzo)
배가 없으면 다닐 수 없는 베니스! 예로부터 배와 베니스는 불가분의 존재였다. '질베르토 펜초'는 선박 전문가 질베르토 펜초가 운영하는 목공 스튜디오다. 그는 뛰어난 고대 선박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아소차치오네 아르차나(Associazione Arzana)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첸트로 리체르케 나발리(Centro Ricerche Navali)>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베니스 전통 배를 체계적으로 연구했기에 선박 공예에서 건축 기술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나눌 수 있다. 그는 수백 종류의 베니스 보트에 대해 연구서를 작성했으며, 선박 복원 작업을 수행하며 항해가 가능한 보트도 생산한다. 이 목공 스튜디오에서는 그 유명한 곤돌라와 바포레토(수상버스), 대형 선박, 요트 등 100여 개의 배를 나무 모형으로 만날 수 있다. 실제 배와 같은 재료로 작은 모형을 만든다니 흥미롭다. 직접 배를 만들어볼 수 있는 조립식 키트도 구입 가능하다. www.veniceboa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