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아빠, 그리고 풍상이
KBS2 드라마 <왜그래 풍상씨>는 유준상의 24번째 드라마다. 숫자가 주는 부담도 있었지만 그 자체로 고민이었다. “역할이 파란만장하니 각오하라”는 문영남 작가의 엄포, 완성된 연기를 요구하는 제작진…. 그들 앞에서 한없이 부족함을 느껴 아찔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촬영을 마치고 문 작가에게 따로 방과 후 수업을 받았을 정도였다. 드라마가 22.7%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릴 수 있었던 데는 작품을 허투루 대하지 않은 유준상의 진심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울고불고하면서 연습한 것도 참 오랜만이었어요. 자연스럽게 연기에 앞서 무장이 되더군요. 나 말고 다른 배우들도 그랬을 테니 당연히 촬영은 순조로웠죠. 우리도 놀라고 연출진도 놀랄 만한 결과물이 탄생했어요. 서로가 서로를 기특해했고, 결속력이 다져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유준상은 배우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다. 한 여자의 남편이고 두 아들의 아빠, 부모님에겐 착실한 아들, 그리고 믿음직한 사위다. 요즘은 아내의 기분을 챙기고, 두 아들의 미래를 이끌어야 하고, 부모님의 노후와 안락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임무가 있다. 배우라는 꼬리표를 떼고 보면 그도 아주 평범한, 어쩌면 자기에게 주어진 다양한 역할 속에서 고달픈 삶을 사는 한 남자일 뿐이다. 유준상은 ‘가족은 힘인가, 짐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현시대 가족상을 투영한 이 드라마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처음 대본을 봤을 때 공감됐던 건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사과했던 일이에요. 가족에게, 그것도 아들에게 사과하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거든요.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혼내는 날이 많았는데, 돌이켜보니 이 녀석들이 어른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어찌나 미안하던지요. 그때 진심으로 사과했죠.”
극 중 유준상이 맡았던 ‘이풍상’이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장면, 동생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그가 배우로서, 남자로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지극히 공감했던 장면이다.
“풍상이는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키운 장남이기 때문에 동생들에게 보상 심리가 있는 인물이었어요. 간암에 걸렸을 때 동생들이 당연히 간을 이식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상심하죠. 그런데 사실 풍상이가 동생들에게 헌신한 건 순전히 그 자신을 위한 거였거든요. ‘나 좋자고 그런 걸 마치 너희들을 위해 그런 거라고 착각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너무 공감했죠. 가족에게 헌신하는 게 마치 추후에 보상 받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가족을 사랑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건 순전히 자신의 행복을 위한 거예요. 말 그대로 가족은 내가 살게 하는 힘이죠.”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도 이풍상과 비슷하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포기하지 않는 굳은 심지, 긍정적인 마인드, 스스로를 되돌아볼 줄 아는 마음의 여유 같은 것 말이다.
“풍상이가 간암에 걸렸잖아요. 실제로 제 은사님이 간암으로 투병하다 기증을 받으셨어요. 친척 형님이 간암에 걸리셔서 둘째 아들이 간을 준 적도 있고요. 힘든 일을 이겨내는 주변 지인들을 보면서 저도 변했죠. ‘내일 일은 모르는 거구나’ 생각했달까요. 그 후론 역경을 고스란히 바람 맞듯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유준상은 1995년 SBS 5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후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을 거쳐오면서 단단해졌지만 이번 작품은 좀 더 특별하다고 했다.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영화<신과 함께> 등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은 또 다르더라고요. 스스로도 그동안 없었던 얼굴을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작가님과 감독님이 잘 만들어주신 덕분이죠. 특히 박인환 선생님께 정말 많이 배웠어요. 그 연세에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는 걸 보고 자극받았달까요. 후배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화장실에서 몰래 대본을 외우시는 모습이 감격스러웠죠. ‘나도 저런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기도 했고요. 선생님이 ‘너희들한테 많이 배웠다. 너희들이 독기를 품고 하니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시는데….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에요.”
그에게 자극이 됐던 건 혈기왕성한 후배들의 재기발랄한 끼가 아니다. 수십 년을 연기판에서 살아온 선배들의 뜨거운 열정이었다.
“(이)보희 선배님은 말할 것도 없어요. 환갑인 나이에 그 많은 욕을 먹으면서도 현장에서 감독님께 ‘저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괜찮나요?” 물으시더라고요. 물 한 번 뒤집어쓰고 또 뒤집어쓰기 위해 다시 말리고 분장하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불평 없이 준비하는 걸 보면서 후배로서 자극이 됐어요. <왜그래 풍상씨>는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웃음)”
이번엔 극 중 부부로 호흡을 맞춘 배우 신동미에 대한 칭찬이 시작됐다. 진짜 부부라 해도 믿을 정도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던 두 사람. 그 안엔 서로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있었다.
“동미 씨는 제 얼굴만 쳐다봐도 울었어요. 동생들 뒷바라지만 하다가 간암에 걸린 비운의 남편 곁을 지키는 아내 역할에 완벽히 몰입한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엔 저도 동미 씨를 보면 눈물이 나더라고요. ‘우리가 호흡이 좋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그동안 극 중에서 여러 사람과 부부로 호흡을 맞췄지만 이번엔 진짜 부부 같았달까요. 사실 진짜 부부가 어떻게 매일 사이좋을 수 있겠어요. 맨날 서로 구박하고 욕먹고 그러다가 위기의 순간엔 챙겨주는 게 부부거든요. 동미 씨와 저의 그런 모습들이 실제처럼 보였던 것 같아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실제 아내 홍은희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유준상과 홍은희는 드라마 속 연인으로 만나 결혼에 골인해 17년째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은 손톱에 낀 때(분장)를 지우지 못한 채 집에 들어간 적이 있어요. 처음엔 안쓰러워하다가 나중엔 거의 신경도 안 쓰더군요.(웃음) ‘자랑스럽게 생각하세요. 이것 때문에 풍상 씨 역할을 잘할 수 있는 거예요’ 하는 응원의 말이 힘이 됐어요. 드라마 때문인지 두 아들이 ‘아빠가 간암에 걸리면 내가 간 드릴게요’ 하더라고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웃음)”
작품이 끝난 후 인터뷰를 하면 방송 중엔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깨달음을 얻어요.
그러면서 그 작품과 이별하죠. 캐릭터를, 작품을 진짜로 떠나보내는 저만의 방식이 인터뷰예요.
열정 충만한 국민 배우
유준상의 필모그래피는 조금 특이하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그것도 모자라서 앨범, 그리고 책까지 출간했다. ‘제이앤조이 20’이라는 밴드의 메인 보컬이자, 음악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님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그는 ‘아티스트’다. 그중 첫손으로 꼽는 것은 당연하게 드라마다.
“영화를 안 찍는 것도 아닌데 드마라에서 유독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감독님, 작가님들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넝쿨째 굴러온 당신> <풍문으로 들었소> <피리부는 사나이> <조작>, 그리고 <왜그래 풍상씨>까지…. 운이 좋았어요. 저의 캐릭터를 잘 파악해서 드라마 속 캐릭터로 잘 녹여주시는 감독님과 미친 필력의 작가님들을 만났죠. 모든 게 다 감사해요.”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드라마는 대중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왔다면 영화에선 또 결이 다른 행보를 보였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등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도 서슴지 않았다.
“저는 이야기를 선택해요. 스토리, 그러니까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해서 작품을 선택합니다. 드라마는 전 연령이 보는 거니까 당연히 대중적인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죠. 반면에 영화는 타깃을 조금 좁혀도 되잖아요. 그런 환경적 구조 안에서 작품 속 메시지를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둡니다. 그렇다 보니 영화는 조금 낯설어도 도전적인 걸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더라도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그걸로 됐죠, 뭐.”
드라마와 영화 사이에서 널을 뛰면서도 뮤지컬 출연을 빼놓지 않는다. 후일담이지만 뮤지컬 스케줄에 드라마 스케줄을 맞출 때도 있다. 그만큼 뮤지컬에 대한 애정이 크다는 말이다. 대표작은 <삼총사>와 <그날들>이다.
“<삼총사>는 벌써 10년 됐네요. 얼마 전에 10주년 공연을 했으니까요. <그날들>은 벌써 다섯 번째 공연을 하고 있어요. 두 작품 다 창작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기획 단계부터 제가 깊숙이 관여해 캐릭터를 구축하고 대본을 쓰거든요. 자식과 같죠.(웃음) 그러니까 놓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5년 후쯤엔 그 역할을 하지 못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지금, 할 수 있을 때 더 열심히 해야죠.(웃음)”
한 편의 작품이 끝나면 지칠 만도 한데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생기를 되찾는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열정이 부러울 정도다.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연기의 시작을 무대에서 했어요. 그래서 무대의 소중함과 관객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아요. 사람들이 제 연기를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그것만으로 큰 힘이 돼죠. 제가 좋은 작품을 선택하고 관객, 시청자들이 즐겁게 봐주시면 그걸로 됩니다. 관객은 무대 위 배우가 진짜로 모든 걸 다 쏟아붓는지 아닌지 정확히 알아요. 그러니까 우리는(배우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노력해야 해요. 그런 생각이 제 연기의 원동력이죠.”
음악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열정과 우정으로 탄생한 밴드에서 메인 보컬이자 작곡가이자 맏형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듯 그의 예술 활동과 고민은 무궁무진하다. 자는 시간마저 아깝다는 유준상에게 이 세상은 상상하는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넓은 캔버스다.
“놀라지 마세요. 국악 앨범을 만들었어요. 녹음이 완료된 상태고, 앨범 발매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프리카 방문 당시 만들었던 곡도 있고요. 저는 ‘언젠가 누군가 듣겠지’라는 생각으로 곡 작업을 합니다.(웃음) 올해엔 영화도 선보일 예정이에요. 배우 김서준 씨와 함께한 영화 <스프링 송>을 편집 중이죠.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자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요.”
인상적인 건 유준상은 작품이 끝난 후엔 꼭 인터뷰를 한다는 거다. 모든 작품이 그랬다. 전작에서 인터뷰를 했다면 다음 작품은 건너뛰는 보통의 배우들과는 다르다. 작품에 대한 애정, 연기에 대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행보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기는 해요.(웃음) 작품이 끝난 후 인터뷰를 하면 방송 중엔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깨달음을 얻어요. 그러면서 그 작품과 이별하죠. 캐릭터를, 작품을 진짜로 떠나보내는 저만의 방식이 인터뷰예요. 또 기록으로 남겨지니까 좋죠. 훗날 인터뷰를 보면서 ‘그땐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며 돌아볼 수 있잖아요.”
인터뷰 말미에 ‘어떤 배우,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물었다. 유준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고민해왔다는 뜻이다.
“배우로선…. 선배, 후배와 함께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배우가 되려고 해요. 그게 더 좋은 연기가 나오는 밑천이거든요. 사람으로선…. 늘 배우고 싶어요.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게 있고, 노인에게도 배울 점이 있죠. 언제 어디서고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한마디로 ‘꼰대’는 되기 싫습니다.(웃음)”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말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말에 어떤 기교를 넣지 않아 더 담백하다. 유준상은 그런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