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경은 조금 독특한 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시절 피아노를 전공했고, 대학 진학을 앞둔 스무 살 때 어머니의 권유로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출전했다. 경험 삼아 올랐던 무대에서 관계자들의 눈에 띄면서 자연스럽게 연예계에 입문했다. 그러다가 2014년에 SBS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출연하면서 배우로 전향했는데 그녀만의 독보적인 개성으로 대체 불가한 스타로 발돋움했고,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닥터스> <역도요정 김복주>를 거쳐 영화 <걸캅스>의 주연까지 꿰찼다.
갑작스러운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이었던 걸까. 이성경은 최근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다고 한다. <걸캅스>를 만나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다는 그녀. 지금부터 배우 이성경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첫 주연 영화를 찍은 소감은 어떤가요?
이틀 동안 잠을 못 잤어요. 드라마도 많이 하고, 영화도 많이 해봤지만 이번처럼 떨린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선배님들한테 그랬어요. "이렇게까지 긴장되는 걸 어떻게 매번 하세요?"라고요. 관객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제 눈엔 부족한 것투성이인데 말이죠.
데뷔 후 빠른 속도로 성장했어요. 주연작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주인공을 하고 싶었다기보단 시나리오가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시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져 주인공을 거머쥘 수 있었죠. 거기다 (라)미란 선배님이 출연한다고 하니 저로선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라미란 씨 역시 첫 주연 영화죠.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시너지가 넘쳤을 것 같아요.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한 예를 말씀 드리면, 대기실에서 노래가 끊이지 않았죠. 미란 선배가 노래를 시작하면 제가 흥을 돋우는 편이었어요. 선배가 1절을 다 부르면 제가 2절을 마저 불렀죠. 그러니 신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현장 나가는 게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전 겉모습과 달리 상대방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에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저 사람이 싫어하진 않을까' 하는 눈치요. 그런데 미란 선배는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파악하고 오히려 더 편하게 대해주셨죠. 최고의 선배님이에요.
라미란 씨에겐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일 것 같아요.
진심이에요. 이번 작품도 선배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전 후배로서 늘 부족하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더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쩔쩔맸죠.
톡톡 튀는 성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론 깍듯하네요.
실제로 놀라워하는 선배님이 많아요.(웃음) 현장에서 선배님들께, 또 스태프들께 잘하고 싶다는 강박이 있어요. 선배마다, 사람마다 성격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잖아요. 저 사람은 나의 이런 모습을 싫어할 수도 있고, 누군 좋아할 수도 있고…. 그런 것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더 흥을 내는 경우도 있죠. 밝은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흥부자라는 별명이 그래서 생긴 거군요?
촬영장에 갈 땐 일부러라도 더 기분을 '업'하려고 해요. '성경이가 왔구나' 싶을 정도로 저 멀리서부터 크게 인사하고 들어가죠. 또 촬영장에 가면 실제로 흥이 많이 나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편으론 저의 그런 밝음이 누군가의 집중력을 흩뜨리는 건 아닌지 하는 눈치도 보여요.(웃음)
실제 성격은 다를 수 있겠네요.
실제론… 좀 조용한 편이에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죠. 연달아 드라마에 출연해서 그런지 쉬는 시간이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 언제부턴가 쉬는 날에도 시간을 쪼개 쓰고 있더라고요. 일어나서 운동 가고, 운동 끝나면 영어 공부 하고, 틈 나면 작품 찾아 보고…. 강박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있더군요.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축 늘어지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요즘엔 집순이예요. 집에 있으면 할 일이 많아요. 고양이 목욕도 시켜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가끔 집 구조를 바꾸기도 하고요. 살림이 얼마나 바쁜데요.(웃음)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나 봐요.
근 몇 년간 쉬지 않고 일했더니 '나의 감성'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쳇바퀴 도는 일상을 살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다 보니 어느 순간 감성을 잃었더군요. 이젠 이성과 감성, 일과 나 자신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고 해요. 그래서 조금 모험적인 것도 그냥 해보려고요. 이를테면 그동안은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면 이제는 조금 실수를 하더라도 과감하게 행동해보려고 해요.
생각이 많아 보여요.
원래는 이런 생각 자체도 안 했었는데….(웃음) 요즘엔 '행복'의 의미를 생각해요. '내가 정말로 행복하게 노래를 부른 것이 언제였던가' '공연을 보고 그 후유증에 며칠이나 앓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이런 것들요. 참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별거더군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제 모든 게 다 부족한 것 같아요. 스스로 보이는 단점도 많고 걱정과 욕심이 많아져 한꺼번에 몰리니 정신이 흔들렸죠. 한마디로 침체기, 슬럼프를 겪고 있어요.
'부족하다'고 생각하다니…. 의외예요.
<걸캅스> 찍을 때가 절정이었어요. 제가 연기를 너무 못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좌절했고, 심적으로 힘들었죠. 배우는 감성으로 일하는 사람인데, 그게 흔들리고 이성이 (저를) 지배하다 보니 혼란기, 과도기가 온 거죠. '못 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니까요. 감독님이 길을 잘 잡아주셨어요. "이렇게 이렇게 해보자"고 지시해주셨고, "하고 싶은 데로 연기하라"고 하시기도 했죠. 감독님만 따라 연기했더니 조금 알겠더라고요. 다시 기본부터 하나씩 만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다행인 건 스스로 부족한 걸 알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에 만족하고 안주하면 발전이 없을 테지만 이제부터라도 노력한다면 좀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주문이 배우 입장에서 더 어렵고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전에는 "마음대로 해, 자유롭게 해" 이러면 너무 신났을 것 같은데, 이번엔 "마음대로 하라고요? 제 마음이 뭐죠?" 이 정도였어요. 그만큼 고민이 많은 시기였죠. 고민도, 어려움도 많은 사춘기 같은 시기에 그걸 빨리 헤어나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게 해준 건 모두 <걸캅스> 덕분이에요. 어떻게 보면 <걸캅스>는 첫 주연 영화이기 이전에 치유의 영화예요.
공교롭게도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버닝썬 사태'와 비슷한 소재예요.(<걸캅스>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다루고 있다.)
시기가 우연히 맞물렸을 뿐 의도한 건 아니에요. 디지털 성범죄는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에요. 저도 영화를 찍기 전에는 무심하게 '이런 문제들이 있구나' '이런 기사가 났네'라고 했는데 이젠 경각심을 갖게 되고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됐어요. 사람들도 이 영화를 통해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쳇바퀴 도는 일상을 살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다 보니 어느 순간 감성을 잃더군요.
그래서 조금 모험적인 것도 해보려고요.
몸매 관리는 어떻게 해요? 혹시 타고난 건가요?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저 정말 많이 먹어요. 건강 때문에라도 잘 챙겨 먹으려고 하거든요. 근데 그만큼 운동도 많이 해요. 건강한 음식을 많이 먹고, 매일 운동을 하죠. 운동을 오랫동안 했더니 이제는 감이 와요. '이만큼 먹었으니 이 정도 운동하면 되겠다' 싶은 느낌이랄까요. 저도 사람인지라 운동하기 싫은 날이 있어요. 그럴 땐 그냥 가벼운 스트레칭 정도로 끝내요. 운동은 강도보다 빈도라고 생각하거든요.
여배우라서 가꿔야 한다는 강박이 만든 습관이겠죠?
때론 관리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기도 하지만 너무 매이지는 않으려고 해요. 대신 건강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어요.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거든요. 없던 알레르기가 생기기도 했고, 몸이 많이 붓기도 하고 쓰러질 것 같은 경험을 하면서 '내 건강은 내가 챙기자'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 더 관리를 하는 것 같아요.
모델을 권유했던 부모님은 요즘 어떤 반응이세요?
아직도 얼떨떨해 하세요. <걸캅스> 시사회 때 제 얼굴이 나온 포스터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시면서 '가문의 영광'이래요. 아직도 TV나 스크린에 나오는 제 모습을 신기해하시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더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죠. 부모님이 많이 여리셔서 걱정이에요. 저 때문에 상처받으실까 봐 걱정도 되고요. 건강하게 계셔주시기만 바라요.
실제론 어떤 딸인가요?
애교 많은 딸? 어버이날엔 여동생이랑 서프라이즈를 해드릴 거예요.(웃음)
'배우'라는 직업, 어떤가요?
처음에 피아노를 그만둘 땐 아쉬움이 컸어요. 10년 넘게 하나만 바라보고 피아노를 쳤으니까요. 모델로 데뷔해 연기를 해보니까 매력 있는 직업이라는 건 확실해요. 어렵고, 헤쳐나가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건 어떤 직업이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라는 아주 좋은 직업을 운 좋게 만나서 행복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감사하고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슬럼프는 극복 중인가요?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는데 회복 중이에요. 예전엔 칭찬을 받아도 '나는 이런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어, 좋은 마음으로 봐주시니까 하는 칭찬일 거야'라는 마음이 컸다면 지금은 '그래도 조금 나아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단계까지 왔죠.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어요.
이성경은 어떤 배우가 될까요?
나중에 늙어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금 이 시기를 돌이켜봤을 때 '후회 없이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하고 싶어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가 되고 싶달까요. 그러려면 제 안에 다양한 모습이 있어야겠죠? 그런 생각을 하니 작품 하나하나에 신중해져요. 단순히 미래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 재미있다고 무작정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죠. 내가 잘할 수 있는지, 열정을 가지고 매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고, 거기에 작품이 주는 메시지도 무시할 수 없죠. 아무튼 분명한 건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자 이성경, 사람 이성경은 어떤 길을 걷고 싶나요?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제가 생각했던 대로 이룬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당장 내일 어떤 작품에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한마디로 자신의 삶을 예상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김혜자 선생님께서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으로 하셨던 말씀처럼 오늘을 살려고 해요. 지금을 즐기고,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고, 지금 최선으로 잘하는 것. 그래서 나중에 어떤 여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이성경이 되려고 해요. 후회하지 않도록요.
성장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혹독한 성장통을 치른 이성경은 분명 성장해 있을 것이다. 이젠 그걸 증명해 보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