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은 두 거장의 별세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칼 라거펠트, 그리고 알레산드로 멘디니. 1931년에 태어난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는 올해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밀라노 폴리테크니코 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한 그는 하나의 디자인 아이템과 같은 건축, 또는 건축물처럼 견고한 디자인 아이템을 알레시(Allessi), 스와치(Swatch), 마지스(Magis) 등의 브랜드와 함께 만들었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최고의 디자인 스쿨인 도무스 아카데미(Domus Academy)의 공동 설립자였으며, 1970년부터 <모도(Modo)>, <카사벨라(Casabella)>, <도무스(Domus)> 등 3대 건축 잡지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 ‘아틀리에 멘디니(Atelier Mendini)’를 건축가인 동생과 함께 운영하며 한평생 가구, 건축, 순수 예술을 아우르는 작품 활동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개척자
1960년부터 이탈리아의 선구적인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은 기능주의의 한계에 반대하는 디자인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알레산드로 멘디니다. 그는 기능성과 상업성을 내세운 기존 디자인에 반기를 들며 더 이상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것을 중단하고 기존 상품을 재활용하자는 취지를 담아 1978년에 ‘프루스트(Proust, 멘디니가 평소에 좋아하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체어를 만들었고 이는 전 세계에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바로크 양식의 고전적인 앤티크 체어에 폴 시냐크(Paul Signac)의 점묘법처럼 수많은 컬러의 점을 찍는 과정으로 탄생한 이 의자는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멘디니의 말과 함께 디자인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 뒤로 프루스트 체어를 청동, 플라스틱, 세라믹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거나 다른 패턴의 패브릭으로 커버링하고 축소하거나 확대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주었고,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카펠리니(Capellini)와 함께 기하학적인 패턴의 ‘프루스트 지오메트리카(Proust Geometrica)’ 체어를 출시하기도 했다. 2015년, 서울 동대문 DDP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당시 우리나라의 조각보 장인인 강금성 작가와 협업해 ‘한국판 프루스트 체어’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후로도 4가지 색을 균일하게 나눠 균형미를 살린 ‘마카오네(Macaone)’ 테이블, 4개의 다이닝 체어 시리즈, 자노타(Zanotta)의 ‘자브로(Zabro)’ 책상 겸 의자 등 컬러를 아름답게 조화시킨 가구를 많이 선보였다.
수많은 스테디셀러를 만들다
멘디니의 대표작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제품은 단연 1994년에 출시된 알레시의 ‘안나 G(Anna G)’일 것이다. 기지개를 켜는 여자친구의 동작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는데 마치 발레를 하듯 우아하게 와인 마개를 열어준다. 이후 안나 디자인은 와인 캡, 샴페인 캡, 페퍼밀, 쿠킹 타이머 등으로 다양하게 출시됐다. 2003년에는 안나의 짝꿍이자 남성 모양의 오프너, ‘알레산드로 M(Alessandro M)’을 선보였는데 이름으로 알 수 있듯 멘디니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멘디니는 알레시를 위해 이들 외에도 모카 에스프레소 커피메이커, 앵무새 모양의 ‘패롯(Parrot)’ 와인 오프너, 하트 모양의 ‘러브(Love)’ 스푼을 디자인했다.
멘디니가 직접 만든 조명 브랜드, 라문(Ramun)에서 2010년에 출시한 ‘아물레또(Amuleto)’ 스탠드도 멘디니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손자와 빛에 대해 얘기하던 중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이 스탠드는 태양, 달, 지구를 3개의 원으로 표현한 디자인으로, 원형의 구조는 시력 보호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디자인이라고 한다. 어린이들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부드러운 관절 구조로 돼 있어 손자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는 제품이다. 멘디니는 시계 브랜드 스와치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는데, 1990년 파산 위기에 놓인 스와치가 그를 아트 디렉터로 초빙해 매장 인테리어를 전부 바꾸고 근엄하고 묵직했던 기존 시계의 개념을 탈피한 ‘오롤로지오(Orologio)’ 시리즈를 선보여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1995년 국내 전시 때는 멘디니 특유의 도트 패턴이 돋보이는 ‘스폿 더 도트(Spot the Dot)’ 컬렉션 시계가 공개되기도 했다. 멘디니는 국내 브랜드와도 많은 협업을 해왔다. 1990년대 말 한샘과 주방가구 디자인을 함께한 것을 시작으로 LG디오스 김치냉장고, LG하우시스의 바닥재부터 한국도자기의 지오메트리카 세트, 삼성전자 기어S2의 워치페이스와 시계줄, 롯데카드의 새 카드 디자인, 배스킨라빈스 코리아의 아이스크림 패키지, 퍼시스의 디자인 암체어 ‘뚜따(Tutta)’ 등 다양한 제품을 디자인했다.
건축가로서의 멘디니
멘디니는 제품 디자이너 이전에 건축가로 오래 활동했으며 히로시마 파라다이스 타워, 알레시 본사를 비롯해 수많은 건축물을 디자인했다. 특히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 선정된 네덜란드 흐로닝언에 위치한 흐로닝어 뮤지엄(Groninger Museum)은 ‘입체의 향연’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시선과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를 보는 재미가 있다. 그는 알레시의 본사를 리디자인하기도 했는데 기존의 평범한 현대식 건물 외벽에 밝은 에메랄드 컬러를 칠해 거대한 장난감처럼 보이게 했고, 건물 위에 2개의 뿔을 설치해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더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차병원과 함께 청담동의 차움, 판교의 차바이오컴플렉스 건물을 설계하기도 했다. “디자인이란 사람들에게 미소와 낭만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 알레산드로 멘디니. 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의 디자인은 영원히 사람들에게 미소와 낭만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