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우가 군 소집해제 후 첫 번째 드라마로 SBS <해치>를 선택한 건 조금 의외였다. MBC <해를 품은 달>과 SBS <야경꾼 일지> 등 그동안 몇 편의 퓨전 사극을 해온 터라 이번엔 트렌디한 현대물을 고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했었다. 게다가 <해치>는 조선 시대 영조가 대권을 쟁취하는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닌가. 다소 무거운 소재의 정통 사극을 정일우가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애정 어린 걱정도 있었다. 2년 만에 돌아온 정일우는 세간의 우려를 보란 듯이 씻어냈다. 연기는 더 안정적이었고, 눈빛은 더 살아 있었다. 덕분에 <해치>는 월화 드라마 중 1위를 기록하며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예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인상적이에요.
제 인생은 군 입대 전과 제대 후로 나뉘는 것 같아요. 노인요양원에서 2년간 대체복무를 하면서 정말 많은 걸 깨달았거든요. 치매에 걸린 노인분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는데,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 이별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현재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강하게 박혔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일에 의연해지자'는 생각이에요. 20대에는 알지 못했던 삶의 한편을 알게 된 아주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대체복무 기간이 정일우의 인생에 아주 큰 획을 그은 시간이었겠네요.
제 삶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됐어요. 함께 복무한 20대 초반의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해보며 '내가 참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싶기도 했고요. 세상은 바뀌었는데 왜 나는 멈춰 있었나 놀라며 생각도 많이 열린 것 같아요. 20대에는 지금의 인기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과 조급함이 있었어요. 매사에 너무 조심하기만 했고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지금은 그런 것을 조금 내려놓았죠.
막상 복귀하니 어떻던가요?
힘들던데요.(웃음) 2년의 공백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빡센' 스케줄이었어요. 아마도 20대와는 체력이 달라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 헤르페스바이러스가 와서 입술이 부풀어 오르는데 항생제 주사를 맞으면서 버텼어요. 너무 피곤하니까 성대결절까지 오더군요. 나중엔 '영조도 이런 위기를 극복해나갔듯이 나도 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했다고 할까요.
복귀작으로 <해치>를 선택한 건 조금 의외였어요. 당연히 미니시리즈를 선택할 줄 알았거든요.
복귀작에 대한 고민은 소집해제 전부터 시작됐어요.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좋은 스태프가 정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죠. 좋은 작가님, 좋은 감독님과 함께하고 싶었어요. 스태프가 좋으니 대본과 캐릭터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고요. 쉬었다 나와서 그런지 방송 초반에 연기가 어색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감독님이 방향을 잘 잡아주셔서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것 같아요.
정일우의 인생작은 뭔가요?
당연히 MBC <거침없이 하이킥>(이하 <하이킥>)이에요.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데뷔시켜준 고마운 작품이죠. 그 작품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을까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하이킥>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강박이나 부담은 없나봐요.
어렸을 땐 있었어요. 어떤 작품을 해도 결국 <하이킥>을 이야기하니까…. 거기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려고 엄청 노력했죠. 비슷한 캐릭터를 제안받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그것도 나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요. 사랑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그 사랑을 누리면서 살려고 해요.
스무 살에 데뷔해 10년 넘게 배우 생활을 하면서 사건 사고 하나 없는 '청정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땐 술도 한 잔 못 했고, 특별히 어디 나가서 노는 것도 별로 안 좋아했어요. 친한 사람들과 카페에서 커피 마시면서 두세 시간씩 수다 떠는 게 전부인, 어쩌면 재미없는 삶을 살았죠. 이순재 선생님이 <하이킥> 때 귀가 닳도록 하신 말씀이 있어요. "안주하지 말고 대중의 사랑을 갚으면서 살라"고요. 돈 많이 벌었다고 우쭐대거나 자만하면 안 된다고 충고하셨는데,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려고 해요. 허튼짓하지 않고 연기만 하면서 말예요.
중간엔 잠깐 공백기도 있었어요.
20대 중반엔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리고 잘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작품을 고르고 또 골랐죠. 자연스럽게 공백이 생겼어요. 지금 생각하면 가장 후회하는 일 중에 하나예요.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데 영영 기회를 놓친 셈이잖아요. 그래서 앞으론 공백 없이 활동하려고 해요. 30대에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테니까요. 작품의 성패와 상관없이 다작으로 필모그래피를 많이 쌓으려고 합니다. 그게 또 제 밑거름이 될 테니까요.
주인공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물론 주인공이면 더 좋겠죠. 하지만 역할 크기와 상관없이 하겠다는 마음이에요. 제가 지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 캐릭터면 오케이입니다. 언젠가는 자비에 돌란 감독의 작품처럼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도 해보고 싶어요. 배우로서 무게를 지니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때로는 깨지고 욕을 먹더라도 부딪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륜이 쌓여야 가능하겠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요?
걷는 걸 좋아해요. 산티아고 순례길에 두 번이나 다녀왔을 정도예요.
슬럼프나 권태기도 걸으면서 극복하는 편인데 힐링이 되고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죠.
오로라를 보러 가는 것도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예요.
정일우를 자극하는 건 뭔가요?
우리나라에 연기 잘하는 배우가 왜 이렇게 많은 거예요? 정문성 형님은 정말 '미쳤어요'. 악역을 그렇게 잘 소화하는 배우는 또 처음 봤죠. 그 형님은 실제로는 약간 '초딩' 같은 면이 있는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돌변해요. 꼭 한 번 같이 작품을 해보고 싶은 선배예요.
연기할 때 마인드 콘트롤은 어떻게 해요?
<하이킥>에 출연했을 땐 갑작스러운 관심과 사랑이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스무 살이었으니 얼마나 어렸겠어요. 그 후 작품이 잘 안되면 다 저 때문인 것 같아 힘들었죠. 그런 과정을 여러 번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시청률 때문에 상처받지는 않는다고 할까요. 그 작품을 통해서 얻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려고 해요.
쉴 땐 뭐 하며 지내요?
걷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죠. 산티아고 순례길에 두 번이나 다녀왔어요. 처음엔 교통사고로 몸을 다쳤을 때 지인의 추천으로 다녀왔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생각을 정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한 번 더 다녀왔죠. 인터뷰 일정을 모두 마치면 다시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에요. 요리하는 것도 좋아해요. 쉴 때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먹는 걸 즐기죠. 가끔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하고요. tvN <스페인하숙>이 방송됐을 때 너무 아쉬웠어요. 저와 딱 맞는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순례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바로 저거든요.(웃음)
최근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크리빗>을 창간했어요.
말주변도 없고, 그래서 1인 방송을 하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요즘 트렌드를 무시할 순 없고. 제 감성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 선택한 게 잡지예요. 창간호에선 나문희 선생님을 인터뷰했어요. 제가 인터뷰어가 되어 다른 배우를 인터뷰해보니 기자들의 고충을 알겠더라고요. 바쁜 와중에 잡지를 만들면서 '내가 이걸 왜 했지?' 싶기도 했지만 아직까진 재미있어요.
다양한 걸 많이 하는 독특한 배우네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요?
저를 떠올렸을 때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일단 <하이킥>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이룬 셈이겠죠? 또 대중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배우로 남고 싶어요. 배우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 좋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한 영향력이라….
이를테면 이런 거죠. 저를 보고 꿈을 키운다거나, 제가 출연한 작품을 보고 마인드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거요. 어찌 됐든 중요한 건 제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 건강한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앞으로의 계획은요?
차기작을 고민 중이에요. 올해 안에 작품을 한 편 더 하는 게 목표거든요. 어떤 작품이 될지는 모르지만 단역이어도 상관없어요. 분명히 저를 성장시킬 테니까요.
정일우는 인터뷰를 마친 직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40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또 얼마만큼 성장해 있을까. 다음 만남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