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시작으로 <운빨로맨스>, 예능 <꽃보다 청춘> 영화 <더킹> <택시운전사> <독전>…. 그리고 1월 30일 개봉한 영화 <뺑반>까지. 류준열은 지난 4년 동안 빠르게 달려왔다. 의도한 건 아니다.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됐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웃으며 연기할 수 있었던 이유다.
류준열의 열다섯 번째 영화 <뺑반>은 경찰 내 최고 엘리트 조직인 내사과 소속 경위 '은시연(공효진 분)'이 뺑소니 전담반으로 좌천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에서 류준열은 차에 대한 천부적 감각을 지닌 에이스 순경 '서민재' 역을 맡았다. 전작들과 다른 점을 하나 꼽으라면 '안경', 그리고 숨겨진 사연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 영화엔 울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그걸 지켜보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아무튼 분명한 건 그는 뒷모습마저 연기하는 천생 배우라는 거다.
지난해 봄부터 여름까지 무더위와 싸우며 찍은 영화가 드디어 개봉했어요.
(류준열은 한숨부터 쉬었다.) 아…. 내 연기를 본다는 게 왠지 부끄러워 못 보겠더라고요. 공포 영화 보듯 눈 가리고 봤어요.(웃음) 모든 작품이 그래요. 늘 후회스럽죠. 항상 '저 장면에선 이렇게 해봤어도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해요. <뺑반>을 선택한 건 시나리오가 재미있었고, <사이코메트리>와 <차이나타운>을 만든 한준희 감독님과 작업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미팅이 확정되고 감독님과 작품 및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코드가 정말 잘 통했어요. 감독님과 많은 부분 대화를 통해 캐릭터를 만들어갈 수 있었죠.
여러 인터뷰에서 감독님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어요.
감독님이 "나한테 이런 시간을 내줘 고맙다"고 하셨어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배우들의 청춘, 황금 같은 시간을 감독님을 위해 써줘 고맙다고 생각하셨대요. 어렸을 때부터 눈칫밥 먹으며 커서 그런지 혹시나 남들이 불편해하면 어쩌나 싶은 우려가 있는데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해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어렸을 때부터 눈칫밥을 먹었다니요?
우리 집은 밝은 분위기였지만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어요. 가훈이 '분수대로 살자'였죠. 아버지는 늘 "있는 만큼 쓰고 절약하면서 쓰자"고 하셨어요. 어렸을 땐 그 말이 바보같이 느껴졌는데,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욕심이 크지 않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음식점에 가면 메뉴판에 있는 비싼 메뉴는 고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소소하지만 그런 눈칫밥이 있었죠.(웃음)
준열 씨의 과격하고 빠른 카체이싱 장면이 인상 깊어요. 평소에도 운전을 즐긴다고 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차를 좋아했어요. 지나가는 차 이름을 모두 외울 정도였으니까요. 자동차 모델도 하고 있고요.(웃음) 그만큼 차에 대한 애정이 있죠. 영화 속 운전 스타일은 저와 완전히 달라요. 저는 느긋하게 운전하는 스타일이에요. '뭐 그렇게 급한 일이 있나' '조금 빨리 간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죠.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클랙슨을 울리지도 않아요.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끼어드나 보다' 싶어 그냥 끼워줘요.(웃음)
활동하다 보면 운전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은근히 많아요. 운전이라는 게 단순히 이동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집 외에 혼자만의 공간이거든요. 그 공간을 좋아해요. 혼자 노래 부르고, 대사도 연습해보고, 전화도 하고요. 저는 운전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래서 누굴 데려오고 데려다주는 게 좋아요. 퇴근한 동생을 데리러 가기도 하고, 데려다주기도 하고요. 혜리와의 데이트를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짧게 말씀드릴게요. 잘 만나고 있습니다(류준열은 최근 공개 열애 중인 혜리와 결별설에 휩싸인 바 있다).
저는 성격이 드라이한데다 감정기복도 별로 없어요.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속상하다' 정도로 끝나죠. 친구들은 불같이 화내는 일도 저는 무덤덤해요. 그래서 주로 중재자 역할을 많이 맡죠. 꺼이꺼이 울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네요.
경찰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어땠어요(영화 속 류준열은 속을 알 수 없는 경찰을 연기했다)?
사실 이 영화는 경찰 영화예요. 경찰의 윤리 의식을 조명하죠.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친한 형 중에 경찰이 있어요. 들어보니 경찰이라는 직업은 참 독특하더라고요. 도덕적인 잣대가 엄격하고, 뭐든지 스스로 판단해야 하죠. 우리가 아는 경찰이 범인을 잡고, 응징하고 그런 느낌이라면 실제 경찰은 또 다른 고민을 갖고 있어요. 특히 지구대나 파출소에서 일하는 경찰분들은 일반 시민의 민원을 해결하는 데 에너지를 다 쏟는데,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갈등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모두에게 친절해야 하니까…. 심하면 트라우마를 겪는 경찰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가까운 지인에게 들으니까 속상하더라고요.
모두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건 어떤 면에선 배우라는 직업과 닮은 부분인 것 같아요.
글쎄요…. 전 배우로 살면서 모두에게 친절하기 위해 친절한 적은 없어요. 예의 없는 사람들에겐 절대 친절하지 않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런데 다행인 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고 친절했다는 거예요. 그분들이 친절한데 제가 친절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영화를 보고 안경이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안경을 벗은 지 10년 정도 됐어요. 스물다섯 살까지 안경을 썼다고 하면 다들 놀라시더라고요. 처음 감독님에게 안경을 끼겠다고 했을 땐 의아해하셨어요. 이런저런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았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악역으로 나온 조정석 씨가 맡은 역할도 잘 어울렸을 것 같아요.
제가 <뺑반>을 찍는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그럼 네가 뺑소니범이냐"고 묻더라고요.(웃음) (조)정석이 형이 경찰이고 제가 뺑소니범인 줄 알아요. 그런데 감독님은 그렇게 뻔한 걸 싫어하셨어요. 배우에게 작품과 캐릭터는 운명적인 거예요.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죠.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해요. 그래서 전 작품이나 캐릭터에 욕심부리진 않아요. 정석이 형이 맡은 역할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대본 리딩 현장에서 정석이 형이 만들어 온 캐릭터를 보고 깜짝 놀랐죠. '이렇게 준비하셨구나' 싶었거든요. 형도 저를 보고 그랬대요. 그렇게 서로에게 호기심이 생겼고, 그러면서 친해졌던 것 같아요.
'서민재'라는 인물과 류준열이라는 사람이 비슷한 점은 뭔가요?
서민재는 굉장히 무미건조한 인물이에요. 아무도 그의 속을 모르죠. 전 그런 서민재가 좋아요. 저도 그처럼 드라이한 편인 데다 감정 기복도 없거든요. 화가 잘 안 나요.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속상하다'는 정도로 끝나는 편이죠. 그렇다 보니 잘 울지도 않아요. 꺼이꺼이 울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날 정도로요. 저도 서민재처럼 격정적이었던 적이 별로 없어요.
화가 안 나요?
잘 안 나요. 친구들과 있을 때 알았어요. 어떤 상황이 생겼을 때 친구들은 분해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럴 수도 있지 않아?' 싶었어요. 누구나 사정은 있는 거고, 그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또 이해가 되거든요. 사람이 살다 보면 말이 오가고, 그러면서 이야기가 와전되고, 오해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평소에 중재자 역할을 많이 맡아요. 친구들이 싸우다가 저를 쳐다보죠. 판결을 내려달래요.(웃음) 예전엔 고민 끝에 해결책을 제시하곤 했는데 요즘엔 양쪽 입장을 모두 공감해줘요.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해결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감정 기복이 없는 성향의 배우는 연기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아요. 다행인 건 제가 추구하는 연기가 절제된 연기라는 거예요. 그렇게 연기해도 관객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사람들의 삶도 저와 비슷하지 않나요? 얼마 전 본 영화 <스타 이즈 본>에서 브래들리 쿠퍼가 만신창이가 돼 꺼이꺼이 우는 장면이 나왔어요. 엄청 슬프게 우는데 정작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더라고요. 전 그 장면이 너무 공감됐어요. 하도 많이 울면 눈물이 마른다는 걸 보여준 것 같아 너무 좋았죠. 같이 본 친구도 그랬다고 하는데, 이젠 일반 관객도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는구나 싶어 큰 힘이 됐어요. 사실 전 시나리오에서 '운다' '오열한다'는 대본이 있어도 크게 와 닿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 감독님들도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을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저로선 다행이에요.
절제된 연기가 어렵기도 하죠.
혹시 영화 <데몰리션 맨> 보셨어요? 첫 장면에서 와이프가 죽어요. 남편은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해요.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물이 나지 않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상한 남편이라고 수군거릴지 몰라도 전 이해가 됐어요. 아내의 죽음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남편은 울 수가 없는 거예요. 울면 인정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연기하는 배우가 참 멋있고 똑똑해 보이더라고요. 마른 장작 같은데 그 슬픔이 느껴지도록 연기하는 것.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연기예요.
그런 연기관에 영향을 준 건 뭔가요?
삶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음…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을 땐 이른바 '철학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같은 고민을 해도 좀 더 영양가 있는 고민을 하려고 하고, 그게 연기적으로 영감을 받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생각에 맞다 틀리다는 없잖아요. 그냥 내가 좋아하고 선호하는 걸 공략하려고 해요.
2년 전 인터뷰에서 '오래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오래 하고 싶은 이유는 별거 없어요. 연기하는 게 행복하니까 행복하게 연기하다 보면 오래 할 수 있고, 그렇다 보면 또 좋은 결과가 있겠죠. 지금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연기가 있듯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는 연기가 또 있을 거예요. 하다 보면 매일매일이 새로울 것이고, 그렇다면 질리지 않고 오래 연기할 수 있을 거예요.
2년 전과 대답이 다르지 않아 좋아요. 변함없다는 뜻이겠죠.
변하지 않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낭만적인 건 변하지 않는 건데….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바뀌기 위해 바뀐다거나, 불안하고 초조해서 바뀌고 싶진 않아요. 의도적으로 변화를 꾀하고 싶진 않다는 말이죠. 근데 또 제 생각이 언제 어떻게 바뀔진 모르겠어요. 오늘 이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다른 생각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인터뷰할 땐 항상 조심스러워요.
지난 4년, 너무 빠르게 달려왔다는 생각은 안 해요?
빠르긴 빠른 것 같아요. 왜냐면 전에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잘 안 나거든요. 하루하루 스케줄을 소화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그날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그게 속상하면서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제가 바보스럽기도 해요. 지금의 이 속도를 의도한 건 아니에요. 의도했다면 오히려 천천히, 쉬엄쉬엄해야겠죠. 그냥 일이 즐겁고, 현장이 재밌고, 연기할 때 행복하니까 그걸 쫓아오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참, 최근엔 예능 프로그램을 찍었다면서요?
새 예능 프로그램 <트래블러> 촬영차 쿠바에 다녀왔어요. 혼자 떠난 배낭여행이었죠. 방에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잠들기 직전까지 스스로 제 모습을 찍는데 혼잣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방송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어요. 쿠바 사람들이 케이팝(K-POP)을 듣고 즐기는 걸 보고 놀랐어요. 한국어도 알더라고요. '엑소(EXO)' 팬들도 있고 'BTS(방탄소년단)'라고 새겨진 모자를 쓴 아저씨도 있었어요. 그 아저씨가 저를 툭툭 치더니 모자를 가리키시더라고요. 자기가 'BTS' 팬이래요.(웃음)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사실 여행을 많이 다녀봤다고 자부했어요. 추운 곳도, 더운 곳도, 여기저기 많이 가봐서 그런지 여행에 무뎌지고 있었죠. 한데, 쿠바는 굉장히 신선한 나라였어요. '흥부자' 국민들, 친절하고 긍정적인 사람들, 인생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좋았죠. 실제로 칵테일 같은 술, 살사, 룸바 등이 다 그 나라에서 시작됐다고 하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이 쿠바에 다녀오고 나서 제 표정이 밝아졌대요.
앞으로의 계획은요? 드라마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작품이나 캐릭터는 운명 같은 거라서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좋은 작품으로 인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까슬까슬한 옆머리에 난 새치 몇 가닥이 보였다. 왜 염색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멋있잖아요. 해야 할 때가 되면 하겠죠 뭐." 하여튼 이 남자, 참 꾸밈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