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는 1990년 KBS 22기 성우로 데뷔했다. 1년 후 연기자로 전향한 걸 보면 배우가 되기 위해 우회한 것으로 보인다. 우연한 기회에 영화 <접속> <초록물고기> <넘버3> <쉬리> 등에 출연했는데 그게 대박이 났다. 그렇게 그는 199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배우가 됐다.
올해로 데뷔 30년 차, 영화만 24편을 찍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선 착한 청년, <초록물고기>에선 어수룩한 막둥이, 드라마 <서울의 달>에선 백수…. 이번 영화 <우상>에선 자신의 욕망을 위해 비열함의 끝을 보여주는 도지사 역을 맡았다. <우상>은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상황을 맞은 남자 '구명회(한석규 분)', 아들을 잃고 진실을 찾아가는 남자 '유중식(설경구 분)', 사고 당일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여자 '최련화(천우희 분)'가 저마다 맹목적으로 지켜내려고 했던 우상을 좇아 폭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렇듯 한석규는 매번 다른 역할을 선택해왔다. 자신의 연기엔 불가능도, 한계도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우상>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받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늘을 기다렸어요. <한공주>로 실력을 인정받은, 영화에 미쳐 사는 이수진 감독의 신작…. 그러니까 이 좋은 영화를 하루빨리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거든요. 어떻게 하면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받았던 감동을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할수만 있다면 시나리오를 공개하고 싶을 정도죠.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요?
이런 얘길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이런 얘기가 있어요. '한 부자가 있다. 그 부자는 자기 재산을 투자해 더 큰 재물을 얻고 싶었다. 마르지 않는 재산으로 창고에 가득 담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 죽었다.' 예수가 했던 얘기예요. 다 부질없다는 의미겠죠? 평소에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였을까를 생각해왔어요. 그래서 이 정곡을 찌르는 비유, 뒤통수를 후려치는 이야기, 이걸 하고 싶었어요. <우상>이 딱 그랬습니다. 죽을 위기에 놓인 사람이 죽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서 살아남지만 그날 밤 죽었다… 뭐 이런 이야기요.
영화가 조금 어렵다는 시각도 있어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저도 시나리오를 보면서 '과연 이걸 어떻게 연출할까'가 궁금했었거든요.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를 두고 이수진 감독과 옥신각신하기도 했죠. 결과적으론 만족합니다. 자세히 보면 그 안에 다 퍼즐이 있어요. 귀띔하자면 마지막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에요. 조심스럽지만 엔딩은 히틀러를 상상하며 연기했어요. 히틀러의 연설법을 생각하며 연기했죠. 엔딩에서 했던 '미친' 대사는 전부 제 애드리브였고요. 이수진 감독은 후시 녹음 때 개 짖는 소리를 한 번 해달라고 했어요. 그건 너무 센 것 같아서 안 넣었는데, 넣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광기 어린 모습이라….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겠네요.
그동안 작품을 통해 보여준 모습은 거의 비슷했어요. 점잖거나 근엄하거나. 평소에 좀 비열한 역할을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왔죠. 오랜만에 재미있었네요. 이젠 상반되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인간의 치졸함, 지질함을 보여줬으니까 다음엔 인간의 위대한 모습을 연기해보고 싶달까요? 이를테면 용감하게 죽으려고 하는 사람요. 그런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공부하면서 기다릴 겁니다.
설경구 씨와의 연기 호흡은 어땠나요?
그 친구, 참 발광하며 살았더군요. 연기에 몰입한다고 말이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메소드 연기가 유행했던 시대에 살았고, 또 그렇게 연기해야 하는 거라고 믿었거든요. 생각해보면 저도 별 발광을 다 했었네요. 경구 씨와 저는 그런 점이 비슷해요. 작품이나 캐릭터를 대하는 포인트가 비슷하다 보니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천우희 씨와는 어땠나요?
세월이 지난 후에 돌이켜보면 우리는 동시대를 살았던 배우가 될 거예요. 그녀와 함께 거론되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친구더군요. 이번 영화에서도 어려운 역할을 아주 잘 해주었어요. 어느 날 눈썹을 밀고 나타나서 깜짝 놀랐죠. "와 대단하다" 했어요.
이수진 감독이 천우희 씨에게 "한국에서 중국어를 가장 잘하는 배우가 돼달라"고 부탁했다죠?
연기자 입장에선 미치는 주문이죠. 중국 사람 되라는 거잖아요.(웃음) 자칫하면 밑천이 다 드러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주 멋있게, 보란 듯이 잘해낸 우희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대한민국에서 여자 연기자로 산다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인데 정말 괜찮은 여배우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몰입 좀 그만하라"고 조언했다고 들었어요.
우희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역할에 아주 많이 집중하는 스타일이에요. 평소에도 영화 속 캐릭터로 사는 걸 보고 "몰입 좀 그만하라"고 다그쳤죠. '몰입'이란 개념에 속아 사기를 많이 당했기 때문에 썩 좋아하지 않거든요. 아마 우희는 출발 단계라 몰입을 요하는 작품들만 해온 것 같은데, 당분간은 좀 가벼운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어요. 밝은 모습이 많이 등장하거나 전혀 몰입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도 괜찮고요.
이수진 감독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기본적으로 전 신인 감독들을 좋아해요. 모든 걸 걸고 하니까. 전작인 <한공주>를 감명 깊게 봤어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스토리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해서 좋았죠. 이 감독과 약속을 했어요. "세 번째 작품도 같이 해보자"고요. 시나리오도 안 보고 하겠다고 했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제가 이 감독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그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요?
일단 소신이 있습니다. 작품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나 타협이 없어요. 그런 '줏대'가 가장 좋았어요. "관객들에게 조금 힌트를 주자"고 말했더니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고 하더군요. 타협이 안 됐던 거죠. 이런 감독이 주저앉으면 아깝잖아요. 빨리 다음 작품 시나리오 작업을 하라고 재촉하고 있어요.(웃음)
다음 작품인 영화 <천문>에선 최민식 씨와 호흡을 맞췄죠. <쉬리> 이후 처음인가요?
형을 1983년에 처음 만났으니까, 햇수로 36년째네요. 형과 연기하면 좋은 게 그의 연기에 반응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워낙 잘하니까…. 우리가 인터뷰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벌써 기대돼요. 아마도 만담 같지 않을까요?(웃음) 민식이 형은 저에게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에요. 정작 성향은 다른데,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잘 통하죠. 존중을 넘어 존경해요.
김혜수 씨와의 친분도 화제가 되곤 합니다.
혜수와 함께 찍었던 <이층의 악당>은 지금 봐도 웃겨요. 내가 출연한 영화를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랄까요. 아마도 혜수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연기의 재미와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준 후배죠. 고마운 마음에 줄곧 언급하는 것 같아요. 그때 그 스태프, 배우들과 또 한 번 연기하고 싶어서 손재곤 감독에게 전화했어요. 동물 탈 쓰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길래 "그 탈 줘봐. 내가 써볼게"라고 했죠.(웃음)
젊은 시절엔 연기에 몰입하겠다고 발광하며 살았습니다. '몰입'이라는 개념에 속아 별 발광을 다하며 살았네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몰입하는 연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이번엔 한석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한석규는 어떤 배우인가요?
연기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때가 있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점점 건강하지 않은 연기를 해온 것 같아요. 그래서 의미를 찾기보다 처음으로 돌아가기로 했죠. 연기와 영화를 통해 제가 원하는 건 초심이에요. 연기가 미치도록 하고 싶었던 그때의 마음과 감정을 오랫동안 보전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연륜이 쌓이는 게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더군요. 나이를 먹을수록 무의식적으로 초심과는 멀어지게 되잖아요.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걸 퇴화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래서 늘 자신을 다그치고, 공부하고, 새로운 걸 찾아 나섭니다. 배우는 '배우는' 직업이거든요.
연기관도 바뀌었을까요?
예전엔 연기는 곧 액션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때 '한다'는 행위에 정신이 팔려 내 연기 순서만 기다린 적이 있었죠. 그래서 상대의 연기를 보지 못했고,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제 연기는 한정적이었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연기는 왜 하는가, 연기로 뭘 얻으려고 하나, 왜 시작했나, 어떻게 해야 하나 등 쉽게 답이 안 나오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봤죠. 결국 연기는 리액션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연기가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평생 반응, 즉 리액션하면서 살잖아요. 건강하게 반응하면 건강한 인생을 사는 것이고, 불온한 반응을 하면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거죠. 그걸 깨닫고 부터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연기…. 왜 해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꿈이었고, 연기할 때만큼은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요? 연기를 하게 된 건 어머니와 둘째 형의 영향이 컸어요. 7살 즈음부터 어머니와 극장에 자주 갔어요. 덕분에 감수성도 풍부해졌던 것 같고, 자연스럽게 영화를 해석하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건 16살 때였어요. 윤복희 선생님이 출연하셨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초연을 보고 압도적인 느낌을 받았죠. 어떤 전율 같은 걸 느꼈달까요. '이거다!' 했던 것 같아요. 왠지 모를 자신감도 있었고요.
둘째 형과의 에피소드도 궁금해요.
형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덕분에 어릴 때부터 명화집이나 화집을 많이 접했죠. 그림 그리는 사람이니까 좀 예민했겠어요? 형의 예민한 기질, 예술적인 감각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 같아요. 대학교 실기 시험 보러 갈 때도 형이 함께해줬죠. "이다음에 어떤 직업으로 살고 싶냐"는 심오한 질문을 해준 사람이기도 하고요. 연기자가 된 후에도 형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마다 아주 큰 영감을 받았어요.
어떤 연기가 끌려요?
캐릭터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테마의 주제가 중요하죠. 스토리가 별로면 끌리지 않아요.사람들은 변신이라고 말하는데, 전 사실 변신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어요. '난 오래 연기할 텐데 뭐'라는 생각이거든요. 꼭 지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솔직히 한 작품 안에서 변신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요.(웃음)
궁극적으로 어떤 연기를 하고 싶나요?
한석규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걸 다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그것도 아주 진솔하게 말이죠. 젊었을 땐 조금 필터가 씌워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최대한 가림막 없이 전부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다행인 건 스스로 생각하기에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대학 시절을 포함하면 근 40년을 연기했는데 그동안 하나도 발전하지 않았다면 너무 절망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어떤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꾸준히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요. 죽을 때까지 말이죠.
한석규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유난히 머리를 긁적였다. 고민, 또 고민…. 그는 아직도 배우는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