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캐릭터, 플롯을 끊임없이 변주하며 실험에 도전하는 송재정 작가의 필모그래피는 그녀의 드라마만큼 남다르다. 10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품 시트콤으로 거론되는 <순풍산부인과>(1998),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 <똑바로 살아라>(2002), <거침없이 하이킥>(2007) 등이 모두 그녀 손을 거쳤다.
이후 드라마 작가로 전업하고 내놓은 작품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회자됐다. 신인 작가 시절 선보인 <인현왕후의 남자>(2012)는 반전을 거듭하며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통통 튀는 로맨스가 결합돼 판타지 로맨스 장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일컬어진다. 꼭 봐야 하는 타임슬립 드라마로 두고두고 거론되는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2013)은 tvN 웰 메이드 드라마의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6년 만에 지상파에서 집필한 <W>(2016)는 웹툰과 현실을 오가는 설정으로 매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그로부터 2년 만에 그녀가 내놓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투자회사 대표 ‘유진우(현빈 분)’가 비즈니스로 스페인 그라나다에 방문해 ‘정희주(박신혜 분)’가 운영하는 오래된 호스텔에 묵으면서 기묘한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그리는데 시놉시스에서는 크게 특별할 게 없지만, 국내 드라마 최초로 증강현실(AR) 게임을 소재로 활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목받았다. 스마트렌즈를 눈에 끼면 가상의 적이 실물처럼 나타나 대결을 펼치는 증강현실 게임이 주요 소재다. 유저끼리 게임을 하다 죽으면 실제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 버그가 생기고, 렌즈를 끼지 않아도 게임에 자동 로그인이 되는 오류도 생기면서 각종 사건이 펼쳐진다. 다시 한 번 송재정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움을 유발하는 부분이다.
“<인현왕후의 남자> <나인>을 잇는 작품을 만들어 타임슬립 3부작을 완성하고 싶었어요. 미래에서 현재로 온 남자 ‘유진우’를 만들었고 호텔에서 낯선 자의 총을 맞고 시작되는 스토리 라인도 정해져 있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욕구가 생기지 않았어요. 소재에 대해 고민하던 중 ‘포켓몬고’ 열풍이 불었는데 호기심에 여의도 광장에서 포켓몬을 잡아봤죠. 그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실제와 가상 이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게임이 출시되면 현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으로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떠오르더군요. 또 일상 현실에 아이템을 CG로 더하면 드라마에서도 구현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타임슬립을 버리고 증강현실로 돌아섰어요.”
서사의 시작, 포켓몬고
송재정 작가는 길거리를 걸으며 포켓몬고를 하다가,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증강현실을 구현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친구도, 애인도 필요 없는 시대가 도래할 것 같았다.
“상상하다 보니 위압감이 느껴졌어요. 만약에 직장 상사나 싫어하는 친구와 결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죠. 개인이 갖고 있는 분노와 살의가 표현되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어요. 그게 유진우와 ‘차형석(박훈 분)’의 서사가 시작된 지점이에요. 살의를 갖고 공격했는데 실제로 죽어버리니까 공포를 느끼죠.”
학창 시절 만화책을 좋아하고 공상을 즐기는, 눈에 안 띄는 ‘안’ 모범생이었다고 스스로를 표현한 송재정 작가는 어려서부터 게임을 좋아했다고 고백했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마의 게임으로 알려진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심시티’ ‘대항해 시대’와 같은 전략 게임을 즐겼고, 모바일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도 섭렵했다. 스마트렌즈 기술이 구현 가능한지 공학박사에게 자문을 구하긴 했으나 워낙 게임을 즐기는 타입이라 대본을 위해 추가로 취재를 하진 않았다. 실제로 극에서는 크리(치명타), 던전, 퀘스트, 레벨업 등 게임 용어가 그대로 사용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극 중 게임 시스템이 어설프게 묘사됐다며 게임을 잘 모르고 대본을 쓰는 것 같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게임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시청 타깃으로 두고 최대한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증강현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려면 그래야 한다고 여겼죠. 그래서 1~2화에 유진우가 그라나다 광장에서 게임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려고 했어요. 제 경험이 깃든 장면이니까 대본을 쓸 때 굉장히 신났고, 제작진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시청률 그래프를 보니까 그 장면에서 시청자 이탈이 굉장하더군요.”
유진우의 라이벌로 그와 게임 속에서 싸우다 실제 죽음에 이르는 차형석의 아버지이자 제이원(유진우의 투자회사) 이사회 이장 ‘차병준’ 역으로 출연하는 배우 김의성도 1회 대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출연 제의를 받고 대본 3회분을 먼저 받아 읽은 그는 깜짝 놀랐다며 부탁을 해서라도 꼭 출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유진우에게만 죽은 유저가 게임 속 캐릭터로 나타난다거나, 가상의 캐릭터 NPC(Non-Player Character)와 싸우다 죽어도 살아 있었던 유진우와 달리 ‘서정훈(민진웅 분)’이 그라나다에서 NPC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 규칙적이지 않은 버그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으로 이해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규칙적인 버그가 아니라 하나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손쓸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나가는 거죠. 전제적인 규칙을 물으신다면 ‘전염성이 있는 바이러스’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유저가 살의나 분노를 갖고 싸우면 버그가 시작되고 점점 확대되는 거죠.”
제 대본에 규칙이 없다고 하는데 단 하나의 원칙은 있어요.
인간 감정의 리얼리즘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에요.
신의 한 수, 현빈
드라마는 게임을 하다 특정할 수 없는 이유로 버그를 만난 유진우가 버그를 해결하려고 고군분투하는 판타지물인 동시에 주인공이 게임 개발자 ‘정세주(찬열 분)’의 누나 ‘정희주(박신혜 분)’와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와 맞물린다. 그런데 문제는 순수한 20대 여인이 2번의 이혼 전력이 있는, 자신밖에 모르는 직선주의자인 재벌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제가 생각해도 여러 면에서 희주가 왜 그런 남자를 만나서 사서 고생하나 싶어요. 사실 초기에는 멜로가 없었거든요. 시니컬한 남자의 이야기였고 희주와는 영화 <레옹>의 주인공들처럼 사랑과 우정을 넘나드는 관계라는 설정이었어요. 그런데 캐스팅이 되고 나니 현빈과 박신혜 씨의 미모가 아쉽더군요. 두 사람의 ‘케미’를 활용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 멜로를 넣었어요.”
송재정 작가는 현빈의 캐스팅이 신의 한 수였다고 덧붙였다. 액션과 멜로 연기를 잘하고 재벌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면서, 전사와 싸울 수 있는 신체 조건을 지닌 배우는 현빈밖에 없었다고. 대본 속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해줘서 감동할 정도란다. 그녀의 말처럼 현빈은 이 드라마를 통해 <시크릿 가든>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연기면 연기, 외모면 외모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기 때문. 그에 반해 박신혜의 캐릭터에는 아쉬움이 많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여주인공임에도 특별히 활약이라고 이야기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혜 씨를 캐스팅할 때 처음부터 양해를 구했어요. 드라마가 히어로물의 구성을 띠다 보니 여주인공이 수동적인 캐릭터이고 비중이 적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도 1인 2역이라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엠마’의 중요한 기능이 드라마 말미에 등장할 거예요. 역할이 끝난 게 아니라 서사의 끝까지 보여드리지 않은 거죠. 왜 희주가 엠마여야만 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끝까지 지켜봐주세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펼쳐진다. 한때 유럽에 진출했던 이슬람 왕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과 가톨릭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대립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그라나다의 역사처럼, 드라마에서 그라나다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어우러지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름에 걸맞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클래식 기타 선율이 드라마의 시그너처다.
“초기에 타임슬립 드라마를 만들려고 했을 때 음악을 매개체로 하고 싶었어요. <인현왕후의 남자> 때는 부적이, <나인> 때는 향이 매개였던 것처럼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 연주곡을 쓴 이유는 특별할 게 없어요. 그라나다에 여행을 간 작가들과 포루투갈에서 만나 함께한 적이 있는데, 작가 친구들이 알함브라 궁전에 갔다가 일사병에 걸려 예민해져서 싸웠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알함브라 궁전에 갔다 일사병에 걸린 기타리스트가 가이드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는 시놉시스도 만들었어요. 결론적으로 그 캐릭터는 희주가 됐죠.”
일상에서 마주한 사건으로 통통 튀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재주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독창성의 근간을 묻는 질문에 송재정 작가는 평소 스토리텔링이 있는 책보다는 인물평전이나 인문 서적을 즐겨 보고, 잡지나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포스트’를 즐겨 본다고 이야기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스토리를 보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고. 유진우는 미국 테슬라모터스의 대표 엘론 머스크의 자서전을 읽다가 영감을 얻었고, 로마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서사를 엮었다.
그녀에게서 태어난 드라마의 대표적인 특징은 예상되는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 ‘예상을 뒤엎는 전개’ ‘반전의 반전’ 등이 송재정표 극본에 붙는 수식어. 그녀의 작품 속 세계관을 분석하는 이들은 ‘무규칙의 세계관’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특별히 이야기하고 싶은 세계관은 없어요. 제 머릿속에선 타당한 플롯이라고 생각하는 흐름으로 대본을 쓰고 있거든요. 그런데 사실 신인 작가 시절인 <인현왕후의 남자>를 쓸 땐 구박을 많이 받았어요. 어떤 박사님은 제게 판타지에서 필요한 장치가 빠졌다며, 판타지의 구조를 무시하고 기본을 모른다고 평가했어요. A에서 B, C가 아니라 E, F로 간다고 이야기하는데 당시엔 누가 기준을 정했느냐는 반발심이 생겼었죠.”
현실보다 리얼한 판타지
그녀는 시트콤과 예능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 게 그 이유 같다고 덧붙였다. 정통 드라마가 가진 규율에 따르지 않는 이야기를 짜는 게 익숙하다는 것. 30분 내에 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같은 인물로 다음 회에 다른 이야기를 펼치는 시트콤의 구조를 따라 드라마 대본을 쓰다 보니 남들과 다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드라마 대본을 쓸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16개의 엔딩을 정하는 거예요. 16회짜리 서사를 정하는 게 아니라 엔딩이 정점을 찍는 1시간짜리 영화를 만들면서 전개를 이어가는 식으로 작법을 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당황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인간 감정의 리얼리즘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원칙은 있어요. 그래서 유진우가 증강현실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극복하는 과정에 집중하는 거예요. 유진우가 갖고 있는 꼬인 실타래를 풀어야 희주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 두 사람의 멜로가 늦어졌고요. 감정이 흘러가는 과정이 중요해요.”
송재정 작가는 남자 주인공을 험하게 굴리기로 악명이 높다. 명성에 걸맞게 유진우 역의 현빈은 드라마가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험한 여정을 걷고 있다. 유진우는 결국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 분노에서 시작된 복수 때문에 쌓인 업보로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고 사랑까지 쟁취한 진정한 히어로로 거듭날 것이다. 판타지에서 시작됐지만 이 드라마가 어떤 리얼리즘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감정의 서사가 섬세하기 때문이다.
송재정 작가에게 다음엔 여자 주인공을 ‘굴리는’ 드라마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자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규칙의 그녀가 언제, 어떤 소재로 드라마업계를 뒤흔들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