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는 이유
최근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에세이를 출간한 그는 걷기 예찬론자다. 요즘도 하루 평균 3만 보씩 걷는다. 걷는 이유는 간단하다. 걷다 보면, 기도하고 생각하고 자신감도 생긴다. 하정우의 이번 작품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PMC: 더 벙커>(이하 <PMC>)다. 전쟁도 비즈니스라 여기는 글로벌 군사 기업 'PMC(Private Military Company)'를 다룬 영화로 마치 게임 화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오락 액션이다. PMC 내의 팀 '블랙리저드'의 캡틴 '에이헵(하정우 분)'과 동료들이 미국 CIA의 의뢰로 DMZ 지하 벙커에서 북한의 최고 권력자 킹을 납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눈여겨볼 것은 하정우가 이 영화의 제작자 겸 주연 배우라는 것이다. 게다가 <더 테러 라이브>(2013)를 함께 했던 하정우와 김병우 감독이 다시 의기투합한 작품이기도 하다. <PMC: 더 벙커>는 두 사람이 지난 5년간 동고동락한 결과물인 셈이다.
이번 영화에 남다른 애착이 있다고 들었다.
지난 5년간 김병우 감독이 고통을 받으며 시나리오를 쓰는 걸 목격했어요. 설정부터 시나리오까지 함께 논의하며 바꿔나갔기 때문에 당연히 다른 영화보다 가깝게 느껴지죠. 완성된 영화를 보고 감격스러움이 밀려오더라고요. 무조건 이 영화는 잘됐으면 좋겠어요,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끝난 뒤 당시 신인 감독이었던 김병우 감독에게 차기작을 같이 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이유가 있나?
김 감독만의 강점이 있어요. 한 컷 한 컷 촬영하는 방식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보고 어떻게 찍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질지 파악한 뒤에 찍어요. 그런 방식은 처음이었어요. 그 방식은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죠. 게다가 김 감독에게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어요. 디테일감도 어마어마하죠. 촬영 이전의 준비 과정을 굉장히 촘촘히 하는 편이에요. 그런 점 때문에 신뢰하게 됐고 차기작을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PMC>를 준비는 과정에서 강명찬 프로듀서와 함께 제작사 '퍼펙트스톰'도 차리게 됐어요('퍼펙트스톰'은 이병헌, 공효진 주연의 <싱글라이더>(감독 이주영) 등을 제작한 바 있다).
이번 영화의 관전 포인트는?
몸과 눈이 반응하는 영화예요. 편안하게 즐겼으면 좋겠어요. 내가 맡은 '에이헵'이라는 인물은 너무 멋있지도 않고 너무 착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인물이에요. 어찌 보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죠. 극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도덕적인 기준이 흔들리는데, 감독 역시 에이헵이 선인이냐, 악인이냐의 문제보다도 오락가락, 갈팡질팡 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아요. 고립된 상황에서 여러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에이헵이란 인물이 만들어지고, 이렇게 쌓이는 인물을 따라가면 에이헵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영어 대사가 대부분이다.
솔직히 그 부분이 제일 어려웠어요. 최선을 다해 발버둥쳤다는 표현이 맞을 거예요. 극 중 에이헵은 영주권이 없는 용병이에요. 감정을 실으면서 자유자재로 영어를 핸들링하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해야 했죠. 더불어 <PMC>에는 많은 외국 배우들이 출연해요. 일정이 워낙 타이트해 내가 영어를 버벅거리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완벽하게 준비하면 외국 배우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겠구나 싶었어요.
POV(1인칭 시점) 캠, 프리비즈, 드론 등 여러 촬영 기법을 사용했다. 새로운 시도다. 마치 게임을 보듯 박진감이 넘쳤지만 화면이 흔들려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다.
소란스럽고 정신없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편하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끝까지 타격감 있게 볼 수 있을 거예요.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최근에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보면서, 1~2분가량 대사 없이 음악만 나오는 걸 보고 놀랐어요. <미스터 션사인>도 영상미가 영화 못지않은 수준이잖아요. 저 역시 게임을 많이 하거나 VR에 익숙한 세대가 아닌지라 이러한 화면과 형식이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해요. 너무 앞서간 건지 아니면 요즘 취향을 잘 짚어준 건지 파악 중입니다.(웃음)
주로 남자 배우들과 작업한다. 하정우의 로맨스를 보고 싶어 하는 관객도 많다.
저 역시 로맨스 영화를 하고 싶어요. 한데 결국 내가 선택 되는 영화는 남자들과 얽히는 영화더라고요. 곧 다음 영화 <백두산> 촬영에 들어가요. 수지가 아내로 나오는데, 부부임에도 만나는 장면이 없어요.(웃음) 내내 (이)병헌 형과 연기하죠. 그다음 작품이 <보스턴>인데 남자 둘을 데리고 보스턴에 가는 영화예요. 다음 작품인 <피랍>도 남자를 구하러 가는 영화랍니다.(웃음)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
시나리오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사람이 잘 맞으면 참여하고 싶어져요. 부족한 부분은 함께 발전시켜나가면 되니까요. 사람이 안 맞으면 발전시키기 힘들잖아요.
<신과 함께-죄와 벌> <1987>(2017), <신과 함께-인과 연>(2018)까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최연소 '1억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번 영화에 대한 부담은 없나?
어린 나이에 비해 작품 수가 많은 편이죠. 하긴 이제 42살이 됐으니 어리다는 말도 못 하겠네요.(웃음) 수치적으로 '1억'이구나 하는 정도지 큰 감흥은 없어요. 다만 그동안 잘해왔고, 잘 버텨왔다는 생각은 들어요.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원한다고 이뤄지는 것도 아닌데 운이 좋았죠. <PMC> 시사 후 한강변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마냥 연승을 할 수 있겠어요. 패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에요. 영화에 승패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했고요. 내려놓게 되는 거죠. 하지만 작품에 임할 때는 엄청나게 긴장되는 건 사실이에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팀에 대한 문제이니 부담이 없을 수 없죠.
하정우는 배우, 감독, 제작자, 작가, 화가 등 많은 일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 썩 잘 해낸다.
누구나 다 비슷할 거예요. 어느 날은 힘들어서 다리에 힘이 풀리기도 하지만 어떤 계기로 다시 일으켜 세워 나아가잖아요. 배우라서 특별할 것도 없어요. 단지 직업이 배우일 뿐이죠. 영화를 만드는 게 나의 달란트이고, 그 달란트로 살아가는 거죠. 그냥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듯이 저도 마찬가지예요.
부지런하지만 꽉 막힌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아요.
촬영을 마치고 지인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것도 즐기고, 끊겠다는 담배도 아직 즐겨 피우고 있거든요.(웃음)
올해 마흔둘, 결혼 안 하세요?
'열일'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휴식에 대한 갈증은 없나?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어요. 다만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못 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가만히 있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해요. 늘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하고 그래서 걷기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연기라는 게 알아갈수록 어렵고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인데 걷기를 하면서 기도도 하고 생각도 정리되거든요. 다행인 건 그런 성격 때문에 외롭거나 지루할 틈이 없어요. 외로움을 느끼기 전에 지쳐 잠드니까요. 하루에 3만 보를 걸으면 오후 10시에 졸음이 밀려온답니다. 그래서 자정 전에는 무조건 집에 들어갑니다. 부지런하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삶을 살지는 않아요. 촬영을 마치고 저녁 식사 시간에 지인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는 것도 즐기고 끊겠다는 담배도 아직 즐겨 피우고 있거든요.(웃음)
안티가 없는 연예인이기도 하다. 왜 대중은 하정우를 좋아할까?
있는 만큼 보여주고 아는 만큼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대중이 내게 좋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간혹 놀랍고 무섭게 느껴지는 건, 스크린에서 어떤 배우를 보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받는 거예요. '어색하네' '좀 이상하네' '어울리네' '안 멋있네' 하는 느낌요. 나 역시 예전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아닌 것도 그럴싸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애초에 못하는 것을 잘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게 잘못된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 과정에서 '좋은 연기' '설득력 있는 표현 방법'에 대해 생각도 하게 됐고요. 가장 확실한 건 아는 만큼 표현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눈물을 줄줄 흘려도 그 슬픔이 전해지지 않는 배우가 있어요. 안구건조증이 있는 배우라면 굳이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슬픔이 전해질 수 있다는 거죠. 진심만 있다면요.
최근 대작 영화에만 출연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근래에 그 질문을 많이 받고 있어요. 변명일 수도 있지만 영화 산업의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변해가고 있고 어찌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저는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 <러브픽션> <멋진 하루> 같은 소소한 작품을 통해 성장한 배우예요. 그 애정은 변함없어요. <싱글라이더>의 제작에 참여한 것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요즘 고민이 있나?
연기를 하면서 어느 순간 공포감이 들 때가 있어요. 관성적으로 연기하는 나를 발견하면 무섭죠. 어떻게 늘 깨어 있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느끼지 않고 생각만 한다고들 하잖아요. 왜 그렇게 될까? 겨울이지만 따뜻한 온도, 여름이지만 시원한 온도에 살면서 감각을 잃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추위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제가 걷는 이유가 그것이기도 해요. 감각을 유지해주죠.
이번 영화에 함께 출연한 이선균이 '하정우와 친해지고 싶어 출연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참 솔직하지 않나요? 그래서 고마워요. 형을 <군도> 시사회 때 처음 봤어요. 으레 하는 인사처럼 내게 좋은 말을 건네줬는데, 형을 직접 만나고 보니 그 말처럼 내게 힘이 됐던 말이 없었던 것 같아요. 가깝게 지낸 지는 1년이 좀 안 됐어요. 알아가는 단계죠. 최근엔 하와이에 가서 함께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어요. 둘 다 승부욕이 강하고 농구를 좋아해요.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하와이에 자주 간다고 들었다.
단골집만 주야장천 가는 성격이에요. 하와이도 마찬가지예요. 2012년 1월에 하와이에 처음 갔는데, 여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자연이 좋아요. 바람이 좋고, 잠이 잘 오고 땅 기운이 좋아요. 사람들도 밝고요. 어느 곳은 휴양지 같지만 어느 곳은 미국 다운타운 같은 느낌도 들어요. 오지의 자연 끝자락의 느낌도 있고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곳이죠. 무엇보다 동네에 슬리퍼 신고 모자 안 쓰고 나갈 수 있어 너무 편하고, 바람 맞으면서 지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에요.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인가?
결혼이라는 게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노력하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 고도 얘기해요. 마흔다섯 안에는 하고 싶어요. 아이는 많았으면 좋겠어요. 온 가족이 카니발이나 12인승 미니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싶어요.(웃음)
안 그래도 자녀를 3명 이상 낳고 싶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감사한 게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한 번도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았어요.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지요. 입시를 앞두고도 "눈이 충혈됐으니 빨리 가서 자"라고 말씀하셨어요. 반항심에 더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아빠가 되면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찾을 때까지 밖에서 뛰어놀게 하고 자연 속에서 키울 거예요. 그런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줄 아내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간 4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나름의 노하우가 쌓여갈 것 같다. 희한하게도 매번 리셋돼요. 촬영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 궁금해서 아버지에게 여쭤보니, 평생 그 과정을 겪는다고 하세요. 그래서 늘 불안해요. 막상 몇 회 찍다 보면 금방 적응되긴 하지만, 편하게 마음먹기는 어려워요. 영화 <백두산>의 촬영이 한 달 정도 남았는데,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공허한 상태랍니다.
마지막 질문이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다. 이후 일정은 어떻게 되나?
오늘이 학교 후배 생일이고, 내일이 친구 생일이에요. 인터뷰가 끝나는 대로 생일 파티 자리에 달려가야 해요.(웃음)
하정우는 지난해도, 올해도 쉼이 없다. 2월 초 이병헌과 주연을 맡은 <백두산> 촬영을 시작으로, <보스턴 1947> <피랍> 등 대작 영화에 줄줄이 참여한다. 하정우의 기록은 끊임없이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