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 속 윤소이의 분위기는 묘하다. 어떤 장면에선 수다스러운 소녀 같다가도 또 어떤 장면에선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금세 성숙한 여인이 된다. 화보 촬영을 위해 만난 그날도 그랬다. 꾸밈없이 편안하게 이야기하다가도 카메라를 마주하면 어느새 고혹적인 여자가 되어버린다. 눈빛엔 왠지 모를 뜨거움이 묻어 있다. 매력적이다.
그녀가 지나온 작품들은 그녀의 무한한 매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널을 뛴다. 한없이 여린 여자가 되기도 하고 검을 휘두르는 여전사가 되기도 한다. 가슴 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전에 없던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아라한 장풍대작전> <굿바이 솔로> <유리의 성> <천상여자> <무사 백동수> <계룡선녀전> <황후의 품격>…. 윤소이의 선택은 이렇듯 늘 의외였다.
출연 중인 드라마 <황후의 품격>에서 독특하고 센 캐릭터를 연기 중이에요.
드라마 자체가 워낙 독특하다 보니 출연하는 캐릭터가 모두 특이해요. 그중 저는 유난히 센 캐릭터고요. 극 중 여덟 살 난 제 딸도 센데 그 엄마인 전 오죽하겠어요. 재미있게 연기하고 있어요.
올해 서른여섯 살이 됐어요.
나이 듦이 좋은 것 중 하나는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거예요. 20대 때는 사소한 것에도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요. 그땐 어려서 사회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말을 예쁘게 하는 방법도 잘 몰랐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오해가 생기기도 했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제 본래 모습을 숨긴 채 가식적인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줄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배우에겐 제약이 많았거든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제가 좋아요. 지금은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게 되면서 상처를 덜 받게 됐거든요.
업계 관계자들이 윤소이 씨를 두고 '착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힘든 순간 가장 의지가 되었던 사람은 누구였어요?
배우로서, 여자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모두 인생 선배인 배우 (박)진희 언니는 제 인생의 롤모델이에요. 작품을 결정할 때도, 사람한테 상처받고 힘들 때도, 남편이랑 다투고 서운한 일이 있을 때도 가장 먼저 언니에게 연락해요. 저의 정신적 지주랄까요. 원래는 미용실 친구였어요. 12년 전에 숍 원장님을 통해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고, 혼내려는 줄 알고 무서운 마음으로 나갔는데 당시 언니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밥 한번 먹자고 한 거였어요.(웃음) 숍 원장님이 "둘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대요. 그렇게 선후배로 지내다 우연히 제주도 여행을 함께 다녀오면서 부쩍 친해지게 됐죠. 언니는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에요. 모든 순간을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죠. 그 밝은 에너지가 좋아요.
그러고 보니 결이 비슷한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언니에게 젖어들고 있더라고요. 일회용 제품 사용을 자제하고, 플라스틱을 안 버리고, 남은 음식을 싸 오고, 중고 거래를 하는 언니의 '에코 라이프' 역시 닮아가고 있어요. 휴대전화 액정 하나를 만드는 데 어마어마한 환경호르몬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깨진 액정을 바꾸지 않고 있죠. 언니와 친하게 지내다 보니 저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닮은 부분이 있다면 다른 부분도 있겠죠?
언니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에요. "잘할 수 있겠다" "한번 해보고 싶었어" "잘하지 못하면 어때, 도전이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이죠. 반대로 저는 걱정이 많아요. "못하면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라고 하거든요. 다행인 건 언니가 제게 물들지 않고 제가 언니에게 물들고 있다는 거예요.(웃음)
오늘 촬영 중에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콤플렉스가 있나요?
여배우라면 으레 달걀형 얼굴에 짙은 쌍꺼풀, 오똑한 코를 가진 전형적인 미인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제가 데뷔했을 당시에 개성적인 얼굴이 주목받기 시작했죠. 영화를 찍을 땐 외모에 대한 지적을 받은 적이 없는데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부터 감독님들에게 많이 혼났어요. 얼굴에 각이 많아 조명을 맞추기가 힘들대요. 실제로 "못생겼다"고 말하는 감독님도 있었고요. 살이 원체 안 찌는 체질이라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죠. 속상한 마음에 시술도 해봤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개성이 없어지더라고요. 개인적으론 콤플렉스가 아니지만 자신감을 많이 잃은 건 사실이에요.
오늘 촬영에선 개성적인 외모가 주는 분위기가 좋았는걸요.
어려서부터 사진 찍는 걸 좋아했어요. 특히 사진작가님들이 제 사각턱을 좋아해주셨죠. 그래선지 사진 찍는 게 편해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유일한 곳이 화보 촬영 현장이에요. 반면에 드라마나 영화에선 예쁘게 보이려면 턱을 당겨야 하는데, 감정이 격해지면 턱을 신경 쓸 겨를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연기는 아직도 어려워요.
데뷔 16년 차 베테랑 배우인데, 아직도 연기가 어렵게 느껴지나요?
첫 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에서 같이 연기했던 염정아 선배님이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게 연기"라고 했어요. 그땐 엄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나보니 엄살이 아니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기술적인 부분은 이제 다 알겠어요. 촬영 현장에서 방송 용어도 다 들리고, 편집에 대한 감도 어느 정도 익혔죠. 문제는 감정이에요. 어렸을 땐 감정이 단순했다면 지금은 감정이 단일화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걸 다 표현하는 게 어려워요. 이를테면 예전엔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으면 됐지만 지금은 슬퍼도 울지 못한 적, 슬프지 않은 척했던 적, 혹은 슬픈 척했던 적도 있으니까요. 감정에 변수가 많다는 걸 아니까 이걸 어디까지 표현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작가님이 써준 주옥같은 글을 다 표현하고 싶은데 안될 땐 속상해요.
어떤 연기를 하고 싶어요?
예전엔 힘 있는 연기를 하는 선배님들을 보면 부러웠어요. 한 컷을 찍어도 임팩트가 있는 연기를 하고 싶었죠. 요즘엔 윤유선 선배님, 김해숙 선생님, 전미선 선배님처럼 편하게 풀어지는 연기를 하는 선배님들을 보면 놀라워요. 선배님들은 쉽게 연기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거지?' 싶을 때가 많거든요. 강하게 힘을 주는 연기보다 부드럽게 힘을 빼는 연기가 훨씬 어렵다는 걸 요즘에 알았어요. 그건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공에서 오는 거잖아요.
오랫동안 선택받아왔지만 아쉽게도 정점을 찍은 적은 없어요.
어렸을 땐 목말랐어요. 저한테 기대를 거는 가족들, 매니저들을 위해서라도 톱스타가 돼야 한다는 무언의 책임의식이 있었어요. 그 부담이 스트레스로 다가왔고요. 그래서 신(scene)과 감정에 집착하고, 연기에 집중했을 때 누군가 방해하면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런데 30대가 된 후 남한테 상처를 주면서까지 악착같이 연기를 해도 시청률과 인기는 천운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 영역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게 되면서 연기하기가 편해졌죠. 다행인 건 아직 저를 선택해주는 감독님과 팬이 있다는 거예요.
몇 년 전 족발집을 운영했던 이력이 특이해요. 계기가 있었나요?
사업에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어릴 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안 했어요. 그러다 보니 공백이 생겼죠. 그 시간을 건강하게 보내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어요. 일이 없을 때 집중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생각한 게 족발집이었어요. 2년 6개월 정도 직접 서빙도 하고, 카운터를 보면서 얻은 게 참 많아요. 일단 어르신을 대하는 게 편해졌어요. 그리고 돈에 대한 개념이 생겼죠. 그 전엔 돈 앞에서 현실적이지 않았어요. 선물과 축의금의 단위도 높았고 기분파였죠. 어느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더라고요. 그런데 족발집을 하면서 현실적인 개념이 생겼어요.
2017년에 뮤지컬 배우 조성윤 씨와 결혼했어요. 신혼 라이프는 어때요?
남편은 유쾌해요. 질릴 틈이 없죠. 연애할 때처럼 뜨겁진 않아도 사랑의 농도는 더 깊어졌어요.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사골 국물 같아졌달까요. 저희는 대화를 참 많이 해요. 결혼 선배들이 말하길 부부 사이에 대화가 없어지면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쌓이면 싸우게 되고, 그게 반복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린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어요. 대화가 조금 없어졌다 싶으면 둘 중 한 명이 "우리 요즘 대화가 없어진 것 같아"라며 말을 걸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사소한 것까지 다 말해요. 강아지 똥을 주제로 몇 시간 동안 대화한 적도 있다니까요.(웃음)
조성윤 씨는 뮤지컬 업계에서 인정받는 실력파예요. 같은 직업을 가진 배우 남편은 어떤가요?
연기를 한다는 건 같지만 조금 달라요. 저는 브라운관 안에서 연기하는 사람이고 남편은 무대 위에서 노래하며 연기하는 사람이죠. 남편은 집에서도 그렇게 노래를 불러요.(웃음) 노래를 잘 못하는 저로선 좀 당황스러웠죠. 겨울엔 집에 가습기와 공기청정기 다섯 대가 돌아요. 목감기가 올 것 같다고 집을 온실보다 더 습하게 만들어놓죠. 어떻게 보면 프로다운 모습인데, 같이 사는 여자로선 불편할 때가 있죠. 연기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건 좋아요. 예전엔 진희 언니와 상의했다면 지금은 남편과 상의하는 편이에요. 남편은 디테일한 연기를 좋아하는데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주기 때문에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너무 재미있어요. 감정을 대하는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고 할까요. 연기가 무섭고 어렵다가도 남편과 이야기하면 해답이 나올 때가 많았어요.
연기 잘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설레기도 하면서 자극도 될 것 같아요.
연애할 때 남편의 공연을 보고 '내 남자친구가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니!' 하면서 감격스러워했었죠. 최근에도 남편이 출연한 뮤지컬 <용의자X>를 보다 깜짝 놀랐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연기를 무대 위에서 하고 있더라고요. 두근거리면서 질투도 났어요. 집에서도 그렇게 해주면 안 되냐고 했더니 집에선 돈을 안 주는데 왜 하냐고 하더라고요.(웃음)
지난 한 해는 어땠어요?
사실 한 것도 별로 없는데 순식간에 일 년이 지났어요. 결혼 후 신랑과 꽁냥꽁냥 신혼 생활을 즐겼고, 주부로서 집안일도 좀 했고, 친정에서 하는 펜션 사업도 좀 챙겼고, 8월부턴 드라마 <계룡선녀전>과 <황후의 품격>을 병행했어요. 그렇게 일 년을 보냈네요.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알찬 한 해를 보낸 것 같아요.
올해는 어떤 계획이 있나요?
그동안은 새해 소원으로 '올해 더 잘되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주세요' '대박 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면 올해는 '하루하루 행복하게 해주세요'로 바뀌었어요. 하루하루 행복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걸 알게 된 후론 그렇게 빌고 있죠. 이렇게 바뀐 제 모습을 보면 '정말 나이를 먹었구나' 싶어 씁쓸하기도 하지만 대견하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