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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의 가치

<우먼센스>는 2019년 기해년을 맞아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이야기를 듣는 릴레이 인터뷰를 기획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MBC 시사 프로그램 <100분토론>의 김지윤 정치학 박사다.

On January 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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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기준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늘 주목받기 마련이다. MBC 시사 프로그램 <100분토론>과 KBS1 교양 프로그램 <거리의 만찬>의 진행을 맡고 있는 김지윤 정치학 박사 역시 그런 사람이다. 매끈하게 포장된 길보다는 다소 울퉁불퉁하더라도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었다. '여자라서…'라는 조건이 달리는 게 싫어 치열하게 공부했고,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갑작스러운 한파가 몰려온 날 만난 그녀는 냉정해 보였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녔고, 부드러우면서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성 정치학자라는 커리어

얼마 전 아산정책연구원을 떠났다고 들었어요.
2010년에 아산정책연구원에 입사해 여론계량분석센터에서 근무했는데, 쉽게 말해 트렌드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는 곳이에요. '미국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의견' '사회 이슈에 대한 생각' 등을 조사했죠. 재미있고 흥미로운 작업이었어요. 8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지쳤고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2학년이 되는 두 아들을 집중적으로 돌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휴식을 갖기로 했죠.


커리어의 시작은 어땠나요?
보통은 회사에 들어가면 커리어가 시작된다고 하지만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학자들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커리어의 시작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아산정책연구원에 들어간 것이 커리어의 시작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연세대학교와 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것부터 커리어가 시작됐다고 여겨요.


대한민국에서 정치하는 여자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과 총원이 100명이었는데 그중 여자는 10명이었어요. 그중에도 대학 졸업 후 결혼해 전업주부로 살겠다는 친구도 많았고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는 다른 선택을 했던 건데 여자라서 차별을 겪은 적은 없어요. 오히려 여자라서 희소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제가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여자라서 됐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죠. 그런 말에 저는 자존심이 상해서 독기를 품고 더 열심히 했어요.(웃음) 전문 분야인데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거든요. 여전히 지식 소매상으로 살고 있으니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일하면서 고통보다는 즐거움을 더 느끼는 것 같아요.
일이 주는 고통과 즐거움 중 선택한다면 즐거운 쪽에 가까워요. 일을 하면서 제가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걸 깨닫고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아니까 즐거움이 더 크죠. 물론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보다는 무엇인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커요.


일하는 동안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 있다면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첫 세미나를 했을 때예요.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2009년에 귀국해 둘째 아이를 낳았어요. 일 년 동안 쉬고 2010년에 아산정책연구원에 들어갔고 얼마 후 첫 세미나가 열렸죠. 외국에서 오신 분들을 모시고 영어로 발표해야 했는데 이상하게 떨렸어요. 영어권 국가에서 오랫동안 살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이전에는 발표를 앞두고 긴장한 적이 없었거든요. 아이를 낳고 쉬다가 복귀한다는 느낌 때문에 긴장되고 동시에 설렘도 있었어요. 어떻게 극복했냐고요? 연습이죠. 세미나에서 할 이야기를 글로 써서 정리하고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쳤어요. 그 말이 입에 붙어 나올 정도로 연습했고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굉장히 기뻤죠. '아, 무사히 복귀했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벅찼어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지윤 박사는 지난해(2018년) 7월부터 MBC 총파업으로 8개월간 결방됐던 MBC <100분토론>의 진행자가 됐다. 이 프로그램은 유시민 작가, 손석희 앵커, 신동호 아나운서, 정관용 교수, 박경미 교수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진행을 맡은 시사 토론 프로그램계의 상징으로, 늦은 시간에 방송됨에도 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한다.


토론 진행자란 타이틀의 무게가 상당하죠?
굉장히 무거워요.(웃음) 몇 년간 부진했던 프로그램을 다시 일으켜보자고 하셔서 제안을 수락했는데 아직까진 어려운 것이 많아요. 방송 패널로 활동할 땐 정보를 전달하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돼 편했거든요. 그런데 이젠 양측의 의견을 듣고 전달해야 하니 고려할 것이 많아요. 중립적인 입장에서 발언하면서 양측을 모두 만족시키긴 어렵더군요. 하지만 역사와 전통이 있는 프로그램 책임자로서 얻는 기쁨도 있어요. 우리 세대에게 이 프로그램은 특별하거든요. 저 역시 대학생 때 방청석에 앉은 경험이 있고요. 요즘에도 찬반 논란이 생기면 "<100분토론>을 해봐야 돼"라고 말하잖아요. 토론의 대명사인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것이 영광스러워요.


토론 진행자가 갖춰야 할 소양이 궁금해요.
우선 끊임없이 공부해야 돼요. 제가 모르는 분야가 토론 주제가 되면 공부를 하고 출연 예정인 양측 패널에 대한 연구도 해요. 과거에 한 인터뷰나 쓴 글을 보고 그 사람이 펼칠 논지를 예측하는 거죠. 또 A라는 사람이 어디에 방점을 두고 이야기하면, B라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지 시나리오를 써봐요. 그래야 논쟁을 이어가거나 끊을 수 있거든요. 혹은 다른 주제로 이끌 수도 있고요.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해요. 저도 사람인지라 어느 한쪽 의견에 공감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저 나름대로 중립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양측 모두 서로 상대방 편을 들었다고 말할 때도 있고요.(웃음) 또 시간적 제약 때문에 발언을 멈추게 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이야기를 듣는 편이라 말하는 도중에 끊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기거든요. 5개월의 기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시도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있지만 아직까진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지난해 9월 출연했던 파일럿 프로그램 KBS1 <거리의 만찬>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됐어요.
위안이 되는 프로그램이에요. 눈길을 주지 않던 사람들이 의미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와 희망을 얻어요. 평소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마이크는 힘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힘없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건네주는 게 좋았어요. 프로그램에 대해 말하자면, 뉴스로 알려진 소식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프로그램인 것 같아요. 남단에서 북단으로 한남대교를 건널 때 '서울시 교통 상황'이라는 전광판을 본 적 있나요? 어제의 사망자·부상자 수가 적혀 있는데, 우리는 그걸 보고 '어제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다쳤네'라고 무미건조하게 생각하고 지나쳐요. 그런데 그들에게도 라이프 스토리가 있어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쩌다 부상을 당했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의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같은 것들이죠. 뉴스에서는 비정한 숫자 하나로 상황을 설명했다면 우리는 숫자에 담긴 스토리를 보는 거죠.


공동 MC인 개그우먼 박미선, 김소영 아나운서와의 호흡은 어떤가요?
케미가 좋아요. 박미선 씨는 정확하고 철저해요. 항상 약속 시간 10분 전에 현장에 와 계시죠. 또 옳지 못한 행동을 참지 못하는 분이고요. 장애인 주차 구역에 차를 댄 일반인을 보면 지나치지 않고 "왜 여기다 주차를 하셨나요?"라고 말하는 분이에요. 소영 씨는 선하고 착한 사람이고요. 때 묻지 않은 그대로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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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기대에 맞추려고 자신을 혹사하지 마세요. 자신에 대해 연구하고 어떻게 살지 고민해보세요.

자신을 사랑하는 법

사실 김지윤 박사님이 냉철한 분일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따뜻하고 세심한 분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사람들이 제가 화려하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저는 어려서 부모님 덕을 많이 봤어요. 부모님 덕에 유학을 갔고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집안에 어려움이 닥치면서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됐고 아이를 키우면서 변했죠. 더 잘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현재를 벗어나려 노력하는 사람, 밑으로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떨어질까 봐 불안한 사람이에요.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고요.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열심히 사는 분들을 보면 감사해요.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살아"라고 이야기해주시는 것 같거든요.


박사님을 살아내게, 버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아이 때문에 사는 거죠. 투박해 보이는 한마디이지만 그 안에 많은 의미가 담겼어요. 또 어떻게든 힘든 상황을 헤쳐 나아가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저를 버티게 하고 있어요. 저는 5년 전 이혼하고 남자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이자 싱글맘이에요. 우리 아이들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게 열심히 일해야 하고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기에 힘들어도 버텨요. 여성 정치학자란 이름을 달고 TV에도 나오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니까 화려해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제 나이 또래의 여성분들, 일하는 여성분들, 주부들과 똑같이 살아내고 있어요. 영어 단어 중에 '서바이브(Survive)'라는 단어가 있죠? 그 단어가 딱 제 삶을 표현해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의 힘은 위대하다고 하죠. 워킹맘의 삶은 어떤가요?
대학원 논문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첫아이를 낳았어요. 논문을 쓰는 시기엔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어 괜찮았는데 일하러 나가면서 고민에 빠졌어요. 집을 나서는 저를 보며 우는 아이를 두고 출근하면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럴까?'라는 고민을 하던 때가 있죠.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일하는 여성을 뒷받침해주는 육아 정책이 부족해요. 국가에서 육아를 도와줘야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어요.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출근을 하나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어려움은 더 커져요. 아이가 아파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면 누가 돌봐주나요? 결국 엄마가 출근하지 않고 아이를 돌보죠. 아이가 학교에서 일찍 집에 돌아오는 날도 많고, 부모가 학교에 가야 하는 날도 많아요. 이런 생활 밀착형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저출산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 거예요.


아동수당, 육아수당 등의 육아정책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단순히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얄팍한 정책이에요.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책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출산율이 높아질 거고, 출산 후에도 여성들이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거예요.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문제들은 취약 계층에게 더욱 고통스럽다는 거예요. 소득이 낮아질수록 여성이 감당해야 할 차별과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해요. 아이에게 엄마의 손길이 필요해 육아를 전담하다 보면 경력이 단절돼요. 그러다 보면 경제력이 필요한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시간제 근무를 하게 되죠. 정규직과 계약직, 시간제 근무자의 급여와 복지는 하늘과 땅 차이예요. 상황은 더 열악해지겠죠. 총제적인 육아 정책이 필요해요.


워킹맘 중에서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갖는 엄마들도 많아요.
아이의 모든 것을 돌보려고 하면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일정 부분은 포기했어요. 과거엔 워킹맘이라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고 손가락질 받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젠 조금은 가볍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업주부인 분들도 아이를 완벽하게 돌볼 수는 없으니까요. 아이들에게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해요. 모든 것을 챙기지 못한다고 나쁜 엄마는 아니에요. 대학에서 강의할 때 만난 아이들을 보면 굉장히 똑똑한데 가르쳐주지 않고 스스로 해보라고 하면 어려워해요. 예를 들어보면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 저 대학원에 가야 할까요? 취업을 해야 할까요?"라고 물어요. 20년 넘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고작 한 학기를 지켜본 저한테 결정해달래요. 스스로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몰라요. 그 모습을 보면 부모가 모든 것을 서포트하는 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좋은 엄마'는 아이를 많이 사랑해주고,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이가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하는 엄마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각자 어려움이 다르겠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증명하려고 해요.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틀에 맞는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강요하거든요. 20대 여성들은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되고, 젊을 때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생각하고요. 30~40대 여성들은 모성애를 강요받아요. 아이하고 잘 놀아준다고 모성애가 깊은 게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뒀다고 훌륭한 엄마가 아니잖아요. 그런 사회의 강요에, 기대치에 혹사당하지 말고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아 마땅하니까요. 지금까지 잘 버텨왔으니 타인이 아닌 자신에 대해 연구하고 자신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면 좋겠어요.


어느덧 마지막 질문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서바이브'해 편안하게 사는 거예요. 저는 또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살아남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어요. 노동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살고 있어요. 진정한 생활인으로 살다 보면 언젠가 편안해지는 때가 오겠죠? 그때까지 고행이라 불리는, 녹록하지 않은 인생을 열심히 살 거예요.

 

김지윤 정치학 박사는…
MBC <100분토론>의 토론 진행자로 냉철한 면모를·KBS1 <거리의 만찬>에서는 따뜻함을 보여주고 있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대학원,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대학원, 연세대학교에서 정치를 연구했으며, 아산정책 연구원 여론계량 분석센터 에서 국내 트렌드를 조사했다.

CREDIT INFO
에디터
김지은
사진
김정선
2019년 01월호
2019년 01월호
에디터
김지은
사진
김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