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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⑳

도스토옙스키를 알아본 미술품 수집가 트레티야코프

On December 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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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옛 별장, 현재의 박물관 서재에서 내려다본 페레리치차강.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옛 별장, 현재의 박물관 서재에서 내려다본 페레리치차강.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2층 베란다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복제품.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2층 베란다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복제품.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2층 베란다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복제품.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은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살던 2층의 6개 방을 주 전시실로 하고 있다. 1층에는 작은 세미나실 같은 방의 벽면과 유리 전시대에 유형살이와 관계된 인물들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율리야 유흐노비치 관장대행은 우리를 만나자 바로 2층으로 올라가 2층 베란다에 놓인 도스토옙스키 초상화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다. 초상화는 우리가 가장 많이 보아온 도스토옙스키 초상화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 바실리 페로프(1833~1882)가 그린 것이다. 관장은 이곳의 초상화는 페로프가 그린 원본이 아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난 예로토바라는 화가가 그린 복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원본과 거의 비슷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현재 원본은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이 초상화는 1872년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요청으로 페로프가 그린 것인데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트레티야코프는 당시 유명 문인들의 모습을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부탁해 그리도록 했다.

이 그림은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에서 귀국한 해인 1871년 말에 그리기 시작해 이듬해 완성됐다. 도스토옙스키가 귀국해보니 『백치』 『악령』 등의 성공으로 그의 명성이 트레티야코프가 초상화를 부탁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짙은 그린색 두꺼운 재킷 차림의 수수한 그의 복장은 당시 넉넉지 않았던 그의 경제 상황을 짐작케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도스토옙스키 가족의 살림 형편이 조금씩 나아진 것은 안나가 출판업을 시작한 1873년부터다. 이 초상화에 대해 안나는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초상화에 대한 안나의 회고

그해(1871년) 겨울에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이자 미술관 소유주인 뜨레찌야꼬프가 남편에게 미술관에 소장할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위해 유명한 화가인 뻬로프가 모스크바에서 왔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일주일간 그는 매일 우리를 찾아왔다. 뻬로프는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 상태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유도하면서 남편의 얼굴에서 가장 특징적인 표정을 포착해냈다. 그것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예술적 사고에 몰입해 있을 때의 표정이었다. 뻬로프는 '도스토예프스끼의 창작 순간'을 초상화에 붙박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른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마치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을 때는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빠져나오곤 했다. 나중에 이야기하다 보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자기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내가 자기 방에 다녀갔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뻬로프는 똑똑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남편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참석했다. 뻬로프에 관해서는 정말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페로프가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완성한 것은 1872년 5월이었다. 다섯 달이나 걸린 것이다. 이 초상화에 대해 트레티야코프가 페로프에게 준 사례비는 6백 루블이었다. 현재 모스크바 레닌 국립도서관 앞의 동상도 페로프의 그림을 보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만, 그가 앉아 있는 자세가 어정쩡해 "치질 환자 같다"는 등 야유도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실제 치질 환자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린 바실리 페로프는 당대 최고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현(縣)지사였던 게오르기 크리데네르 남작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작위는 물론, 성(姓)도 물려받지 못했다. 태어난 해도 1833년인지 1834년인지 분명치 않다. 공식 문서에는 대부의 이름을 따서 바실리예프라는 성으로 등록돼 있다고 한다. 미술학교에 다닐 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페로프라고 불렀다. '페로'는 러시아어로 '펜'이란 뜻이다. 그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그의 선생이 붙여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이 별명을 좋아해 이름으로 굳어졌다. 앞에서 넵스키, 레닌 등의 이름이 별명 또는 필명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페로프도 그 경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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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람스코이 작(1883) '미지의 여인'. 2 일리야 레핀이 그린 트레티야코프 초상화(1883). 3 파노프가 찍은 도스토옙스키 사진(1880).

1 크람스코이 작(1883) '미지의 여인'. 2 일리야 레핀이 그린 트레티야코프 초상화(1883). 3 파노프가 찍은 도스토옙스키 사진(1880).

 

미술품 수집가 트레티야코프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트레티야코프는 스물네 살 때인 1856년부터 러시아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면서 작품을 수집했고,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처럼 유명 작가 등의 초상을 그리도록 유명 화가들에게 의뢰하기도 했다. 그의 꿈은 러시아 미술가들의 그림으로 가득한 국민 미술관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856년 개관했다. 그 후 1892년 자신이 소장한 2천여 점의 회화와 조각, 드로잉 등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8년 국유화됐다. 오늘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1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13만 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최고의 러시아 미술 박물관이다. 트레티야코프의 꿈이 만들어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림 이야기가 나왔으니 도스토옙스키가 숨을 거둔 직후에 찾아와 잠든 듯한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크람스코이(1837~1887)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크람스코이는 당대의 유명한 초상화가로 도스토옙스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초상집으로 찾아와 그림을 그렸다. 안나의 회고록을 다시 보자.

남편이 죽은 다음 날 우리 집에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화가인 끄람스꼬이가 있었다. 그는 고인의 초상화를 실물 크기로 그리고자 했고, 대단한 솜씨로 그 그림을 그려냈다. 그 초상화 속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밝은 얼굴은 마치 아무도 모르는 내세의 비밀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듯 미소마저 띠고 있다. 끄람스꼬이 외에도 몇몇 화가들과 사진작가들이 와서 화집을 발간한다며 고인의 초상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조각가 레오뽈드 베른쉬땀이 우리를 방문하여 남편의 얼굴 본을 떠 가기도 했다. 덕분에 나중에 그는 남편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흉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

크람스코이 역시 당대의 유명한 초상화가다. 그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 그룹인 '이동파'를 이끌었다. '이동파'란 여러 도시를 이동하며 전시회를 개최하는 그룹이라는 의미다. 여기에는 일리야 레핀, 바실리 수리코프 등 저명한 러시아 화가들이 참여했다. 크람스코이는 1873년에는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린 바 있다. 그가 1883년에 그린 '미지의 여인'은 특히 유명하다. 누구나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를 연상케 한다는 분석도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진

안나와 류보피가 연주하던 오르간이 있는 전시실.

안나와 류보피가 연주하던 오르간이 있는 전시실.

안나와 류보피가 연주하던 오르간이 있는 전시실.

앞서 안나의 회고록 중 화가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도 조문을 와 사진을 찍어 갔다고 했는데, 그중에는 관에 누워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을 찍은 사진작가 샤피로의 사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진은 유형을 마치고 군 복무를 할 때인 1850년대 말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진 장교복을 입은 사진을 비롯해 젊은 카자흐 학자 발리하노프와 함께 찍은 사진 등 20여 장이 있다.

사진은 19세기 전반부터 유럽에서 발달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에도 곧장 수입돼 19세기 중엽부터는 많은 귀족과 돈 있는 평민들이 인물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자신의 초상화를 갖는 것이 귀족들의 취미였으므로 사진 찍기도 차츰 상류사회의 유행이 됐다. 도스토옙스키가 최초의 사진을 찍은 해가 1858년인지 1859년인지는 분명치 않다. 1859년은 그가 강제 군 복무를 마치고 근 10년 만에 시베리아를 떠난 해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에는 1860년부터 양복을 입거나 코트로 정장을 한 사진들이 남아 있다. 여러 사진 가운데 안나가 가장 좋아한 사진이 있다. 1880년 6월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푸시킨 동상 건립 기념 연설을 한 다음 날 파노프가 찍은 사진이다. 다시 안나의 회고를 들어본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그다음 날 아침 모스끄바의 일류 사진작가였던 빠노프가 자신을 찾아온 이야기도 해주었다. 빠노프는 남편에게 그의 초상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남편은 모스끄바를 떠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빠노프와 함께 그의 사진관으로 갔다. 그날 찍은 사진 속에는 남편이 전날의 기념비적 사건에서 받은 감흥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언제나 표정이 달랐던 (기분이 변화무쌍했던 덕분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수많은 초상 사진 중에 나는 이 사진을 으뜸으로 꼽는다. 남편이 가슴 벅찬 기쁨이나 행복을 느낀 순간에 내가 그의 얼굴에서 수없이 봐온 그 표정이 이 사진에 어려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푸시킨 동상 제막식에서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확인한 후 기분이 한껏 고조돼 있었다. 안나는 이 사진에 도스토옙스키의 행복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았다. 타인의 눈으로는 사진만으로 도스토옙스키의 그 같은 감정을 알 수가 없다. 안나만이 그 사진의 표정을 그렇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스타라야루사 별장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앞에 선 필자.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앞에 선 필자.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앞에 선 필자.

베란다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에 대한 유흐노비치 관장대행의 설명을 듣고 안으로 들어가니 첫 번째 전시실의 작은 테이블 위에 두 종류의 신문이 놓여 있었다. 관장대행은 "이 신문들은 1875년 이 지방에서 발생했던 나자로프란 사람의 부친 살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린 당시 발행되던 신문인데, 기사가 실린 날짜의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녀는 이어 "여기에 실린 부친 살해 사건이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이 방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썼던 모자와 흰색 장갑, 지팡이 등도 전시돼 있었는데 진품이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도 그 시절의 상류층 사람들처럼 때로는 꽤 멋을 낸 것 같다. 그다음 방에는 안나와 류보피가 쳤다는 오르간이 창 쪽에 놓여 있었다. 오르간은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와 아이들을 위해 직접 구매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저녁이면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아이들과 안나와 함께 카드릴, 왈츠, 마주르카를 추곤 했다. 안나는 남편이 특히 마주르카 추기를 좋아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이 방에는 도스토옙스키 가족의 사진 다섯 장이 걸려 있었다. 가족이 모두 함께 찍은 사진은 없다. 세 살에 죽은 막내아들 알료샤의 사진을 포함해 도스토옙스키와 안나, 딸 류보피, 아들 표도르의 사진이다. 형 미하일의 사진도 있고 도스토옙스키가 한때 결혼을 생각했던 작가 지망생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와 그녀의 프랑스인 남편 사진도 한쪽 벽에 걸려 있었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대로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도스토옙스키와 결별한 후 프랑스로 떠나 자클라르라는 혁명가와 결혼했다. 그후 안나-자클라르 부부가 프랑스에서 도피해 러시아로 들어와 살게 됐을 때 도스토옙스키 부부와 좋은 관계로 지냈다. 그래서 그 부부의 사진을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세 번째 방은 도스토옙스키의 서재다. 좁은 강폭의 페레리치차강이 오래된 나무 사이로 바로 내려다보였다. 한구석에는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쓰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책상 옆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침대로 사용하던 소파가 있었다. 물론 이것도 당시의 것은 아니다. 벽 한쪽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했던 푸시킨, 디킨스, 셰익스피어, 발자크의 작은 초상화도 걸려 있었다. 그다음 방은 제법 컸는데 작지 않은 식탁이 가운데 놓여 있고 한쪽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앞에 선 필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랜드 피아노는 도스토옙스키 사후에도 모친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던 류보피가 집에서 피아노를 쳤다는 기록이 있어 전시해놓은 것이라고 했다. 이 방은 식당을 겸했으므로 당시의 끓는 물 주전자, 사모바르도 전시돼 있었다.

다섯 번째 전시실은 안나의 방으로 침대와 책상 등이 있었고, 여섯 번째 방은 아이들 방으로 소파에는 인형이 놓여 있고 벽에는 성장한 류보피와 표도르의 사진과 이콘 등이 걸려 있었다. 아이들 방에서 좁은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니 작은 세미나실이 나왔다. 벽과 주변에 유형과 관련된 사진 즉, 페트라 스키 사건과 관련자들의 사진, 토볼스크에서 만난 데카브리스트 부인 폰비지나와 안넨코바의 사진, 여러 자료 등이 전시돼 있었다. 관장대행은 우리가 박물관을 찾아가던 중에 본 인근의 도스토옙스키 동상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동상이 서 있는 곳은 소설에 나오는 장소로, 2001년 도스토옙스키 사후 120주기를 맞아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전국 독자들의 성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조각가도 유명한 사람인데도 돈을 받지 않고 만들어주었다고 말했다. 내가 "그동안 본 도스토옙스키 동상 가운데 가장 잘 만든 것 같다"고 했더니, 이곳 세미나에 왔던 학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며 좋아했다.

새로 문을 연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소설 박물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의 작은 도시인 스타라야루사에 있는 이 집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피해 가지 못했다. 전쟁 중에 공습으로 지붕과 베란다가 날아가버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1945년에는 파괴된 부분을 모두 복구했다. 이 집은 도스토옙스키 사후 2년 되는 해인 1883년, 안나가 도스토옙스키의 유품을 정리해 방 2개를 박물관으로 꾸몄다고 한다. 그 뒤 박물관으로 정식 개관한 것은 도스토옙스키 사후 100주기가 되는 1981년이었다. 그리고 올해 2018년 7월 기존의 집 박물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역시 페레리치차강 옆에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소설 박물관'을 개관했다.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집 박물관의 별관인 셈이다. 우리는 스타라야루사에 갈 때까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소설 박물관'이 새로 생겼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율리야 유흐노비치 관장대행의 말을 듣고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그 박물관을 안 연다"고 했다. 이 박물관 안에는 소설 등장인물의 마네킹이 12개 있다고 한다. 유흐노비치 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소설 박물관'을 찾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박물관은 노란색으로 외벽을 칠한 고딕양식의 2층짜리 건축물이었다. 집 박물관보다 더 커 보였다. 문 옆의 표지판을 보니 매주 월요일과 마지막 화요일에는 열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우리가 간 8월 28일이 마지막 화요일이었던 것이다. 박물관 외관만을 사진에 담고 아쉽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Q & A(2)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한국의 역사

<우먼센스>가 후원하고 바이칼BK투어(주)가 주관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겨울 바이칼 호수' 여행이 2019년 2월 8일부터 15일까지 7박 8일간 실시된다. 본지는 이 여행과 관련해, 지난 호에 'Q&A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겨울 바이칼 호수'를 실은 데 이어 이번 호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한국의 역사'를 Q&A 형식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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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바이칼 호수 철로변에 전시되어 있는 옛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관차. 우_독도.

좌_바이칼 호수 철로변에 전시되어 있는 옛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관차. 우_독도.


Q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시베리아 횡단열차 때문에 1904년 2월, 일본이 러시아를 기습 공격해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러시아가 일본에 져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한반도 주변 정세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19세기 말엽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반도와 중국의 만주 지역(현재의 랴오닝, 지린, 헤이룽강 등 동북 3개 성과 내몽골 동부)을 서로 탐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과의 강화도조약(1876년) 이후 조선 병탄과 대륙 진출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고, 러시아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하 정책을 추진하면서 만주 땅과 조선반도를 집요하게 노렸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러-일 두 나라의 실랑이는 계속됐습니다. 마침내 두 나라는 1903년 협상 테이블에 앉아 위의 문제들을 논의합니다. 일본은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조선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라고 러시아에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조선반도의 평양과 원산을 잇는 39도 선의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나누어 지배하자는 안을 제시했고요. 오늘날 38도 선으로 남북이 갈라져 있지만, 이미 100년도 더 전에 러-일 간에 39도 선 분할 논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이 같은 러시아의 39도 선 분할 지배 제안은 일본에 불리한 것이라고 보고 거부합니다. 러-일 간의 관계는 점점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러한 때에 주 러시아 일본 대사관의 무관인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 대령으로부터 온 비밀 전문은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될 때까지는 개전을 어떻게든 미루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돼야 전쟁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병력과 장비의 수송을 감안할 때 러시아 측의 그러한 판단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1891년부터 시작된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사는 중간 지점인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구간이 난공사 구간이어서 그때까지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사 진척도로 보아 완공은 1905년 10월에야 가능했습니다. 일본은 아카시의 정보 보고를 토대로 마침내 1904년 2월, 어전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했습니다. 개전을 결정하게 된 데는 1902년 영국과 체결한 영일동맹이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2월 8일, 일본은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해 선제공격을 했습니다.

Q 러시아는 일본이 선제공격을 해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던데?
러시아는 일본이 감히 대국인 러시아를 선제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를 찔린 것이지요. 러시아는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발틱 함대의 해전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지만 발틱 함대마저 1905년 5월 말, 쓰시마해전에서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러시아는 1905년 1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 (* 평화적인 시위대를 황제의 근위대가 총칼로 진압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 이후 국내 정치 상황마저 날로 악화되고 있어 일본과 강화조약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Q 독도도 러일전쟁 때 일본이 점령한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해전을 치르기 위해 동해 한가운데 있는 독도에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망루를 설치했습니다. 그러고는 1905년 1월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주인 없는 땅이라는 게 편입의 이유였습니다. 일본이 정말 그 섬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일본은 그것이 조선의 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지도에도 그렇게 표시해왔습니다. 일본의 독도 편입은 본격적인 조선 침탈의 서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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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역 플랫폼.

블라디보스토크 역 플랫폼.


Q 러일전쟁 때 대한제국(조선)은 어떤 입장을 취했나요?
러일전쟁 발발 직전, 대한제국은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대한제국을 겁박해 전쟁 수행을 위해 한반도 안의 토지를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한일의정서'를 체결합니다. 의정서 속에는 '일본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는 내용도 있으나, 이는 대한제국의 협력에 명분을 주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속임수임은 곧 드러났습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두 달 만인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습니다. 그 뒤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한 다음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으로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로 만듭니다.

Q 만약에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러일전쟁이 무승부로 끝났다면 모를까(전쟁에서 무승부는 역사에 거의 없지만), 러시아가 이겼다면 러시아의 속국이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혁명 후 소련의 위성국가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에 그들이 사용할 부동항을 대대적으로 건설했을 것이고, 일본의 운명 또한 어찌 됐을지 알 수 없습니다.

Q 러일전쟁 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관련한 러시아 측 동향을 탐지해 본국으로 보고했던 러시아 주재 일본 대사관의 무관 아카시 모토지로 대령이 그 후 조선총독부의 초대 헌병 사령관이 되어 우리 독립지사들을 탄압한 인물이라는데?
아카시 모토지로는 일본의 전설적인 스파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관련한 정보뿐만 아니라 본국으로부터 엄청난 공작금을 받아,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내외의 혁명 세력 등을 지원하며 러시아 내부의 교란과 소요를 유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카시는 러일전쟁이 끝난 후 귀국했다가 1907년 소장으로 승진해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부에 헌병대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조선 주차 일본군의 참모장을 겸하며 의병 탄압을 지휘했습니다. 당시 수많은 의병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됐습니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이 이뤄져 통감부가 총독부로 승격되자 그는 총독부 경무총장 겸 헌병대 사령관을 맡습니다. 말하자면 식민지 초기 헌병 경찰 총책이 된 것입니다. 그가 헌병 경찰 총책으로 있는 동안 안중근 의사 사촌동생 안명근이 연루된 안악 사건, 신민회 사건, 105인 사건 등을 통해 600명이 넘는 우리나라의 애국지사들이 체포, 구금되고 고문을 당하다 죽기도 하는 등 모진 탄압을 당합니다. 아카시는 조선총독부를 떠난 후 1918년 대장으로 승진, 대만 총독에 임명됐다가 이듬해인 1919년 사망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관련해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러일전쟁은 이렇게 우리 역사의 뼈아픈 대목인 일제의 식민 지배와 얽혀 있는 것입니다.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9년 01월호
2019년 01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