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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이선균

이선균은 말이 길지 않다. 짧고 굵게, 그러나 할 말은 다 한다. 그래서 더 좋다.

On February 2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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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은 지난 3년을 작품으로 꽉 채웠다. 2016년 겨울 영화 <미옥> 촬영을 마치자마자 영화 <PMC:더 벙커>(이하 <더 벙커>)와 <악질경찰>을 동시에 촬영했고, 이후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출연한 뒤 숨 돌릴 틈 없이 영화 <기생충> 촬영이 이어졌다. <더 벙커>의 홍보차 만난 그날도 그는 다음 영화 <킹메이커:선거판의 여우>(가제, 이하 <킹메이커>) 촬영 스케줄로 고민 중이었다. 작품 선택에만 몇 년이 걸리는 여느 배우들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의외의 면모는 <더 벙커>에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군사분계선 아래 위치한 남북한 비밀 회담장 벙커에 갇힌 용병 ‘에이헵(하정우 분)’이 벙커를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더 벙커>. 위기를 헤쳐나가는 하정우에게 집중된 이번 영화에서 이선균은 스스로 빛나기를 포기했다(북한 의사 역을 맡은 이선균은 상대적으로 출연 분량이 적다). 그는 앞에서 이끄는 하정우를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며 제 역할을 소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선균에게 역할의 대소, 분량의 많고 적음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15년 차 베테랑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선택이었다.

“작품을 선택함에 있어 분량은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역할인지, 그 역할이 작품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는 그 안에서 뭘 해낼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죠.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였어요. ‘북한 사투리를 잘해낼 수 있을까?’ ‘하정우 씨와의 호흡은 괜찮을까?’ 이런 게 더 중요했죠. 그리고 작품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김병우 감독님과 하정우 씨였어요. 김 감독님, 하정우 씨와 꼭 한 번 작업해보고 싶었거든요. 두 사람이 있는 <더 벙커>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분량은 그다음 문제였어요.”

이선균이 하정우와의 만남을 기대했던 건 영화 <더 테러 라이브>, <허삼관>에서 하정우와 호흡을 맞췄던 아내 전혜진의 영향이 컸다. 게다가 지인들과 교집합이 많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하정우를 더 만나고 싶었다. 이선균의 말에 따르면 하정우는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사람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감독님께 ‘투샷’을 더 만들어달라고 했어요.(웃음) 하정우 씨는 건강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닌 친구예요. 힘든 촬영 때문에 지친 스태프까지 챙기면서 현장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애쓰죠. 덕분에 화기애애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연기 외적인 부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도 좋아요. 그의 예술적 감각을 닮고 싶달까요.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살 수 있지?’ 싶어서 놀랄 때가 많았어요. 나이는 저보다 어리지만 형님 같은 구석이 있죠. 이번 작품을 통해서 많이 친해졌는데, 또 한 번 같이 작업할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땐 제대로 된 ‘투샷’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고요.(웃음)”

결과적으로 이선균은 이번 작품을 통해 ‘하정우’를 얻었다. <더 벙커>의 모든 촬영을 마치고 하정우의 하와이 마라톤을 따라나선 것도 모두 하정우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전에 없던 브로맨스다.

“해외여행을 못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저도 걷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때마침 (하)정우가 하와이에서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고 하니 따라 나섰어요. 아내에게 허락을 구하고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비행기를 탔습니다.(웃음) 10년 전부터 걷기 운동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지만 마라톤은 또 다르더라고요. 힘들었어요. 그래도 완주했습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구석구석을 뛰고 걸으며 꽃 한송이부터 작은 돌맹이까지, 차를 타고 다녔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을 다 보았어요. 아름다운 피난길이었죠.(웃음)”

이선균이 꼭 만나고 싶었다는 김병우 감독은 <더 테러 라이브>를 내놓은 그해 각종 영화 시상식의 신인감독상을 싹쓸이했던 요주의 인물이다. 그가 이번 작품을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과의 만남, 즉 인연은 타이밍이 중요하잖아요. 그건 배우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유로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 스태프들을 만날 수 없죠. <더 테러 라이브>를 연출한 김병우 감독의 차기작이라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김 감독님과 촬영하고 싶었고, 그의 연출 방식을 확인하고 싶었죠. 해보니까 이분이 왜 신인감독상을 휩쓸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작품에 대한, 연출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있으신 분이죠. 하정우 씨가 ‘이과형 감독’이라고 표현했는데, 딱 맞는 표현이에요. 영화를 설계하는 설계자 같은 감독이에요.”

이선균이 <더 벙커>를 해야만 하는 명분은 또 있었다. 마침 대학교 후배가 <더 벙커>의 촬영감독이었던 것. 졸업 작품을 함께 준비하다 후배가 입봉하는 바람에 엎어졌던 대학 시절의 마지막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그에게 후배와 한 번 더 작업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렇듯 이선균은 사람이 우선이다. 사람이 좋으면 뭐든 ‘오케이 맨’이 된다. 그런 이유로 홍상수 감독과 두 번, 권석장 PD와도 두 번을 만났다.

“영화 <미옥>부터 지금까지 3년 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 이 작품이 끝나갈 때쯤 다음 작품 촬영이 시작되고, 다음 작품이 끝나갈 때쯤 전작의 개봉 홍보가 시작되는 식이었죠. 연속해서 작품을 하게 된 데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건 감독님이었어요. 쉼이 필요했을 때, 쉬고 싶을 때마다 제 마음을 흔드는 감독님이 나타나셨죠.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 작품의 결이 달라지는데, 그 감독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거든요. 포커 게임 같아요. 이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에이스가 들어오는 기막힌 상황. ‘하나만 더 볼까’ 하는 심리가 작용되는 거죠.”

감독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그가 지금껏 연기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선균이 말을 이었다.

“저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너무 힘들어요. 열심히 했는데 작품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땐 지치기도 하죠. 때론 ‘내가 배우를 계속 해도 될까?’를 고민하는 시기가 찾아오기도 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훌륭한 감독님들이 러브콜을 해주세요. ‘포기하지 말고 더 해보라’는 격려처럼 말예요. 돌이켜보면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선택받는다는 것만큼 좋은 건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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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읽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시대를 공감하고, 시대와 어울리는, 잘 늙은 배우요.

지난해 출연했던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수장 김원석 PD에 대한 애정도 대단하다. 김원석 PD는 드라마 <미생>과 <시그널>을 연출했다.

“김원석 PD를 만난 건 배우로서 큰 행운이었어요. 그는 최고의 지휘자예요. 배우들이 캐릭터의 감정 하나하나를 다 느끼게끔 만들어주죠.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현장을 잘 이끌어주셨어요. 세심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진두지휘하면서 말예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나의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이선균은 <나의 아저씨>에서 ‘성실한 무기징역수’ 같은 삶을 사는 ‘박동훈’ 역으로 분해 ‘이 시대에 필요한 진짜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생 캐릭터로 호평받았다. 고된 세상살이에 쓸쓸한 어른들을 위로했던 드라마다.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들을 보면 모두 저 마다의 추억이 있어요. 모든 작품이 제게 달력 같아요. 드라마 <파스타>에 출연할 때 첫아이가 태어났고, 2007년은 <커피프린스 1호점>을 했던 해이고, 2018년은 <나의 아저씨>에 출연한 해로 기억돼요. 그만큼 <나의 아저씨>는 선물 같은 작품이에요.”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나의 아저씨>는 방송 전 각종 논란에 휩싸였다. 상대 배우 아이유와의 나이 차 때문에 이선균의 캐스팅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로리타 논란 및 데이트 폭력 논란도 일었다.

“아이유씨와의 나이차 때문에 방송 전부터 색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속상했어요. 아마 감독님이 가장 답답했을 겁니다. 제가 아무리 (이 드라마는 남녀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해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묵묵히 연기만 했어요. 작품으로, 연기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논란이 오히려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 동력이 된 셈이죠. 마지막엔 작품 자체만으로 봐주신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연기한 박동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위로받았다’는 반응이 가장 좋았어요. 저 또한 그를 연기하면서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제 삶을 돌이켜보고 반성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됐거든요.”

극 중 박동훈은 이선균 그 자체이기도 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깨에 놓인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 사람과 돈과 상황 앞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 등이 실제 이선균과 꼭 닮아 있었던 것.

“제가 딱 박동훈 또래예요. 가장으로서 어깨도 무겁고, 삶 속에 갈등과 균열이 많은 나이죠. 그런 걸 여과 없이 표현하는 게 좋았어요. 무엇보다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 인생의 갈림길에서 얼른 답을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 등 흔들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누구나 고민하고 갈등하잖아요. 제 주변 또래 친구들도 재미있게 봤다고 연락이 많이 왔는데 배우로서 뿌듯했습니다.”

이선균을 아직도 드라마 <파스타>의 버럭 셰프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선균=로코’라는 공식을 만들어준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로맨틱 코미디에 그의 귀환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로맨스를 보여줄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해요. 진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알콩달콩한 로맨틱 코미디는 더더욱요. 무엇보다 장르에 갇히고 싶지 않아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지만 그것에만 집중한다면 제 스스로 ‘고인 물’이 될 것 같거든요. 이번 역할 같은 경우 드라마 <하얀 거탑>의 ‘최도영’이 보인다고 하시는 분도 있더라고요. 제게서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센 역할도 해보고 싶고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보고 싶습니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계속 장르를 확장해나가는 게 배우로서 맞다고 생각해요.”

이선균은 배우를 이렇게 정의했다. ‘시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물’. 누구보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뒤처지지 않아야 하고, 시대가 만들어내는 인물을, 시대의 정서를 반영해내야 한다는 거다.

“배우는 보여주는 직업이고,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하는 직업이라서 행동이 조심스러울 때가 많아요.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책무가 힘겨울 땐 이 직업을 선택한 저를 자책하기도 하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가 선택한 일인걸. 때론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한없이 고민해보기도 해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계속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선택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육체적으로는 피곤할지 몰라도, 이렇게 계속 작품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열심히 하려고 해요.”

연기자로서 이선균의 마지막 바람은 ‘놀고먹는 거’다. 거창한 답변을 기대했는데 의외다. 그의 30년 후는 아마 손자들의 재롱에 함박웃음을 짓는 여느 평범한 할아버지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저는 시대를 읽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시대를 공감하고, 시대와 어울리는, 잘 늙은 배우요. 나이에 맞는 연기, 연륜과 내공이 묻어나는 연기를 하는 게 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가족들과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싶어요. 소위 말해 ‘놀고먹는 게’ 제 궁극적 꿈입니다.(웃음) 그러려면 지금 더 열심히 연기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죠? 무엇보다 멋있게, 잘 늙어야 하고요.”

이선균은 쉴 틈이 없다. 지난해 촬영을 마친 영화 <악질경찰>과 <기생충>이 개봉하고, 곧 영화 <킹메이커> 촬영에 돌입한다.

“작년엔 촬영하느라 바빴다면 올해는 그 작품들의 결과물이 나오는 중요한 시기예요. 모든 작품이 자식 같아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벙커>를 시작으로 다른 작품도 모두 잘됐으면 좋겠어요.”

CREDIT INFO
에디터
이예지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2019년 02월호
2019년 02월호
에디터
이예지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