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크래프트 맥주 신에는 갖가지 이유로 관심과 인력, 자본이 몰린다. 맥주에 빠진 사람들, 유행을 좇는 사람들, 시류를 타고 돈 좀 벌어보려는 사람들까지. 지금의 크래프트 맥주 신을 ‘신(scene)’이라 부를 수 있는 까닭은 유행을 좇아 온 거대 자본만이 이 시장 구성원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전방에는 지난 몇 해간 수제 맥주를 탐구해온 ‘맥덕’들이 포진해 있다. 거대한 파도의 시작은 IPA(India Pale Ale) 열풍이었을 것이다. 풋풋하고 향긋한 향, 목구멍을 때리는 쌉싸래함, 입안에서 온갖 과일이 터지는 듯한 맛을 다 품은 맥주. IPA를 시작으로 홉의 매력에 취하기 시작한 맥주 마니아들은 ‘상면 발효’ ‘하면 발효’와 같은 개념들을 익혀나갔고 집에서 스스로 맥주를 빚어 마시는 ‘홈 브루잉’을 시도하거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직접 양조장을 건설하거나, 해외의 질 좋은 크래프트 맥주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출발해 전 세계로 번진 크래프트 맥주 열풍은 지금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자 문화 정체성이 됐다. 맥주 시장은 일방적이고 독점적인 형태로 시설과 규모에 기반한 경제가 형성되었던 시절을 지나, 다양성과 개성,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경제로 변모했다. 공룡처럼 거대한 규모의 시장을 뒤흔든 건 물론,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들이다. 서울의 맥주 신도 마찬가지다. 지금 서울 시내에서 맛볼 수 있는 크래프트 맥주의 종류는 수백 가지. 크래프트 맥주를 다루는 공간의 성격도 다양하다. 모세혈관처럼 작은 골목까지 파고들어 신선한 시도를 하려는 작은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가 있는가 하면, 마이크로 크래프트 브루어리로 시작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해외의 맥주 브랜드들이 야심 차게 연 공장과 브루 펍도 존재한다. 서울 크래프트 맥주 신의 현재를 보여주는 브루 펍 2곳을 소개한다.
브루독 이태원
‘브루독’은 마이크로 크래프트 브루어리들의 롤 모델인 브랜드다. 2007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와트에 의해 설립된 ‘개미처럼 작은’ 브루어리가 지금은 스코틀랜드 최대 규모의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됐다.
대표적인 맥주인 ‘펑크 IPA’나 ‘하드코어 IPA’처럼 세계적인 ‘맥덕’들에게 고르게 사랑받는 맥주도 만들지만, 비아그라가 들어간 맥주, 알코올 도수 42도에 달하는 맥주, 1도에 불과한 맥주 등 기행에 가까운 맥주를 만들기도 한 ‘맥주계의 이단아’이기도 하다.
그리고 얼마 전,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중심지로 불리는 이태원에 브루독이 브루 펍을 열었다. 브루독이 영국을 제외한 나라에 양조장과 펍을 결합한 브루 펍을 세운 것은 처음이다. 아시아에서 크래프트 맥주 신이 가장 급격히 성장해, 빠른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시장이라는 점이 브루독을 움직였다.
사상 최초로 이태원에 거대한 양조 설비를 품고 문을 연 ‘브루독 이태원’은 495m²(150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에 독일에서 들여온 최고급 양조 설비를 갖췄다.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펑크 IPA와 하드코어 IPA 등 브루독의 맥주를 비롯해 영국 현지와 한국 이태원의 브루독 브루 펍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한정판 맥주도 즐길 수 있다. 벽 한쪽을 빼곡히 메운 그래피티, 어두운 조명, 독특한 색깔의 소파 등 영국 브루독 매장을 옮겨온 듯한 인테리어도 눈에 띈다.
정동길 한가운데 세운 양조장, 독립맥주공장
정동길에 브루 펍이 생겼다. 이 지역의 조용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까 싶지만, 이곳 ‘독립맥주공장’은 그렇지 않다. 마치 오래전부터 있던 공간인 듯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독립맥주공장은 정동에 들어설 때부터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튀지 않고 편안한 느낌을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전시 기획사에서 일하던 ‘맥덕’들이 힘을 합쳐 만든 이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는 순수하게 맥주에 대한 열정과 관심으로 도전장을 내민 작고 독립적인 양조장이다. 맥주 신에서 이름 난 외국인 헤드 브루어나 이미 크래프트 맥주 사업을 해본 잔뼈 굵은 전문가를 영입하지 않고, 양조장을 품은 브루 펍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해 문을 열었다.
독립맥주공장은 ‘정동’이라는 지역적 요소를 아이덴티티로 가져간다. 크래프트 맥주의 미덕을 ‘홉의 신비한 향과 몰트의 깊은 맛’이라 여기는 이들이 독자적으로 양조해 판매하는 크래프트 맥주에 ‘중구 정동 IPA’ ‘광화문 별별 스타우트’ 등의 이름을 붙여 정동의 정체성을 담는다. 여기에 다른 양조장이 빚은 훌륭한 독립 맥주도 게스트 비어로 곁들인다.
자체 생산 맥주의 가격은 6,000원에서 8,000원 선. 누구나 좀 더 쉽게 신선한 크래프트 맥주를 즐겼으면 하는 의도로 정한 가격이다. 불과 몇 주 전인 지난 9월 3일에 처음 양조를 개시해 적극적인 홍보 활동이나 마케팅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독립맥주공장의 구성원 다수가 디자인을 전공한 덕에 공간의 인테리어도 감각적이다. 독특한 조명 장식, 작은 소품 하나까지 신경 쓴 티가 역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