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니가 간다>(2006)에서 고교 시절로 돌아간 서른 살 ‘언니’ 고소영은 과거의 자신에게 이런 당부를 한다. “스물다섯 살 넘으면 아이크림 꼭 발라!” 지금의 나라면 그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할 것이다. “굶는 다이어트 절대 하지 마. 살찌는 체질 된다. 괴로울 땐 술 마시지 말고 운동해라.” 몸을 써서 어떤 목표에 도전하고 성취하면 체력도 기를 수 있지만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나는 요즘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는데, 여성 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처음 물에 들어가기가 가장 어려워요. 완전히 낯선 환경이니까 무서운 게 당연하죠. 하지만 그걸 이겨내고 나면 나 자신이 더욱 강해졌다는 기분이 들 거예요.” 그 말에 끌려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강해졌다는 기분, 그걸 나도 한 번은 느껴보고 싶었다.
타고난 몸치라 평생 운동을 겁내면서 비실비실한 물렁살로 살아온 나는 강한 여자들의 서사에 언제나 감동을 받는다. 멋지게 총을 쏘고 오토바이를 몰고 무술을 하지만 알고 보면 사랑에 약한 여자라 대가도 없이 총알이 빗발치는 세계에서 남자 주인공을 엄호하는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의 ‘일사 파우스트(레베카 퍼거슨 분)’가 아니라, 진짜 서사가 있는 올림픽 선수나 산악인 같은 사람들 말이다.
언젠가 북한산 인수봉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만난 중년 여성이 나를 끌고 바위 중턱까지 올라가서 “아가씨가 여기서 균형을 잃어도 내가 우리 두 사람 버틸 재주는 있으니까 겁먹지 말아요” 하기에 그에게 홀딱 반해버린 적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현실적으로 강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다. 그나마 여자의 몸을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도구로 보는 관점을 접할 때면 떠올리는 영화는 <와일드>(2014)다. <금발이 너무해> 시리즈(2001~2003)로 유명한 리즈 위더스푼이 직접 판권을 사서 제작하고 주연까지 맡은 영화다.
<와일드>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 분)’는 가난, 폭력적인 아빠,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유년을 보냈다. 세월이 흐르고 뒤늦게 셰릴과 같은 대학에 진학해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지던 엄마 ‘바비(로라 던 분)’가 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셰릴은 삶의 의미를 잃는다. 슬픔과 허무에 빠져 마약, 외도를 일삼고 남편과도 헤어진다.
인생의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해,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로 돌아가기 위해, 셰릴은 PCT(The Pacific Crest Trail) 단독 종주를 결심한다. PCT는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을 잇는 4,285km의 도보 코스다. 아홉 개 산맥과 사막, 25개 국유림과 6개 국립공원을 지난다. 한번 진입하면 도중에 빠져나가기도 어렵고, 사람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는 데다 야생동물과 다양한 기후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그 길을 캠핑 한번 해본 적 없는 젊은 여성이 혼자서 떠난 것이다. 처음엔 배낭 싸는 법도 몰라 너무 무겁게 꾸리는 바람에 일어서지도 못해 온 방 안을 구르고 허우적댄다. 그걸 메고 꾸역꾸역 걷다가 급기야 발톱이 빠지기도 한다. 며칠씩 광활한 평원을 걷고 혼자 야영을 할 때는 절대 고독에 시달리고,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강간범이나 살인자는 아닐까 공포에 휩싸인다. 셰릴은 총 94일 동안 PCT를 걷는다.
영화 <와일드>는 PCT의 장엄한 풍경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그 안에서 셰릴은 자주 과거를 회상한다. 상처, 기쁨, 좌절, 방황, 후회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트레일을 걷는 동안에는 누구와도 그 기억을 나누거나 감정을 교류할 수 없다. 오롯이 혼자서 생각에 잠길 뿐이다. 한편으로는 당면한 육체의 시련, 생존을 위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 압도적인 대자연의 위용이 그를 꾸준히 현실로 소환한다. 그렇게 트레일을 완주하는 동안 그는 상처를 솔직히 대면하고 인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인간사나 도시 생활에 피폐해진 여자가 여행으로 치유받는다는 얘기는 많다. 예컨대 <와일드>와 마찬가지로 자전적 베스트셀러에서 출발해 할리우드 흥행작이 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가 그렇다. 그 영화의 주인공 ‘리즈 길버트(줄리아 로버츠 분)’는 이탈리아, 인도를 여행한 후 발리에 도착해 돈 많고 섹시한 남자 ‘펠리프(하비에르 바르뎀 분)’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해피 엔딩을 맞는다. 그런데 그게 진짜 해피 엔딩일까? 사랑과 관계는 가변적인 것이라 인생의 전환점은 될 수 있을지언정 궁극의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그래서 전 세계에 ‘힐링’ 열풍을 일으킨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팬시함보다는 자기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와일드>의 치열함이 내게는 훨씬 믿음직하다. 지금도 이 영화를 떠올리면 이상하게 위안이 되고 힘이 난다.
한 여자의 강인함이 어떻게 다른 많은 여자를 고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니 ‘내가 실제로 PCT를 체험하면 더 굉장하겠지?’라는 상상을 종종 하지만 역시 체력이 관건이다. <와일드> 이후 미국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등극한 실제 셰릴 스트레이드는 리즈 위더스푼보다 훨씬 건장한 여성이다. 그렇다. 여자가 큰일을 하려면 역시 근육, 근육이 필요하다.
글쓴이 이숙명
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프리미어>, 여성지 <엘르> <싱글즈>에서 기자로 일했다. 펴낸 책으로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어쨌거나 뉴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