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를 끊다
안나와 결혼 후 최초의 간질 발작, 그것도 연달아 일어난 이중 발작은 도스토옙스키가 친척집에 다니면서 마신 샴페인이 원인이었다. 그것이 극도의 흥분을 일으킨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후 포도주를 절대로 마시지 않았다. 그 뒤에도 간질 발작 증세는 때때로 계속됐지만, 이날의 이중 발작은 매우 격렬했던 것 같다. 안나가 처음 겪은 일이기도 했지만…. 안나는 회고록에 "그날의 이중 발작은 내게는 영원히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기록했다.
안나를 괴롭힌 친척들
도스토옙스키의 신혼집은 미망인이 된 도스토옙스키의 형수 에밀리야 페도로브나가 조카들과 살고 있는 집과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이 때문에 형수와 조카들이 노상 그 집에 드나들었다. 남동생 니콜라이, 여동생 알렉산드라도 자주 찾아왔다. 이들은 점심을 먹은 후 밤 10시, 11시까지도 돌아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또한 문인 손님들의 방문도 잦았다. 그런 가운데 에밀리야 페도로브나는 처음보다 안나에 대한 태도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살림살이에 대한 충고를 한다면서 늘 안나를 가르치려고 했을 뿐 아니라 번번이 도스토옙스키 첫 부인 마리야의 예를 들먹여 안나를 불쾌하게 했다. 첫 부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려 없는 짓이었다. 안나는 회고록에 에밀리야는 "착하긴 하지만 생각이 얕은 여자였다"고 썼다.
결혼 초기 안나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친척과 어린 조카들, 손님들을 접대하는 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함께 사는 의붓아들 파벨은 거친 언행으로 안나를 괴롭혔다. 파벨은 모친인 마리야가 사망한 후 이런저런 집안일을 처리해왔는데, 도스토옙스키가 재혼을 하자 자기가 해오던 일을 안나에게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고 자주 안나를 골탕 먹이려고 했다. 파벨은 도스토옙스키의 면전에서는 안나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했으나 도스토옙스키가 없을 때는 거친 말과 태도로 안나를 대했다. 파벨은 안나에게 도스토옙스키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대단히 멍청한 짓'이었으며, 안나는 '엉터리 주부'이고 '우리 모두의 돈'을 헤프게 쓰고 있다면서 결혼 후 도스토옙스키의 발작이 심해졌는데 이는 안나의 책임이라고 폭언을 해대기도 했다. 그런 데다가 어느 날 도스토옙스키는 파벨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파벨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고 안나에게 말하기도 했다. 안나는 파벨이 중상모략을 한다고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파벨의 행태를 알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자기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의붓아들을 보호하려는 도스토옙스키의 태도를 안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나는 '그 사이 도스토옙스키의 사랑이 식었나' '이러다가 결혼 생활이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기 시작했다.
안나의 결단으로 유럽으로 떠나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도스토옙스키는 설움에 복받쳐 엉엉 우는 안나를 보았다. 파벨로부터 폭언을 들은 날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비로소 의붓아들의 폭언과 친척들의 일로 안나가 몹시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안나에게 잡지사로부터 선금을 받아 해외에 몇 달 다녀오자고 제의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통보>와 장차 보낼 자신의 작품의 선금을 교섭했다. <러시아 통보>는 도스토옙스키에게 1,000루블을 지급하기로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해외로 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자 친척들은 모두 반대하면서 몇 달 치 살림 비용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다. 친척들의 생활비, 급히 갚아야 할 빚 등을 계산해보니 1,400루블이 당장 필요했다. 선금 1,000루블로는 도저히 여행을 떠날 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다. 최소한 2,000루블은 있어야 해결될 상황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여행 계획이 무산된 데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안나에게 미안해하며 가을까지 몇 달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희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듯했던 그때, 문득 안나의 머릿속에 '내 지참금과 물건을 모두 여행을 위해 내어놓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나의 행복을 구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안나는 친정으로 가 어머니를 설득했다. 어머니는 딸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결혼할 때 가져온 패물과 가구, 모피 옷 등을 팔거나 전당포에 저당 잡히고 돈을 마련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온 안나는 남편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남편을 따라 나와 강변도로를 함께 걸으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나의 물건들을 희생하면서까지 해외여행을 갈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친척들과 빚쟁이로부터 벗어나다
안나는 남편에게 "살기 힘들다"고 고백하면서 "두세 달이라도 평온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또한 "지금 상황으로는 예전에 꿈꿨던 것처럼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을뿐더러 어쩌면 영원히 갈라서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안나는 남편에게 "우리의 사랑과 행복을 지켜달라"고 간청하다가 자제력을 잃고 울기 시작했다. 안나가 울자 도스토옙스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안나를 달래기 위해 황급히 모든 것을 그녀의 뜻대로 하자고 했다. 안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행인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도스토옙스키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형수와 의붓아들이 요구하는 돈을 일부 주고 나머지 부족분은 물건들을 처분한 뒤 장모를 통해 주기로 하고 남은 물건들은 여기저기에 맡겼다. 그리고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결혼 약 두 달 후인 4월 14일이었다. 당초엔 신혼여행을 빙자해 석 달 예정으로 떠났지만, 그들은 4년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왔다. 안나가 남편의 친척들과 의붓아들 때문에 러시아로 돌아가기 싫어한 것도 해외 체류가 길어진 이유였다. 물론 빚쟁이들로부터의 도피도 또 다른 중요한 이유다. 당시 도스토옙스키가 갚아야 할 빚은 2만 루블에 달했다. 모피 코트가 25루블, 교사의 1년 연봉이 1,000루블쯤 할 때다. 해외로 나가 두 사람은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림을 좋아했던 도스토옙스키
유럽 생활은 고단했다. 베를린에서 시작해 드레스덴, 바젤, 제네바, 바덴바덴, 베베,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볼로냐, 빈, 프라하 등을 전전했다. 그림을 좋아했던 도스토옙스키는 가는 곳마다 미술관을 찾았다. 이런 곳에 갈 때는 물론 안나와 함께였다. 도스토옙스키는 특히 드레스덴 미술관에 있는 라파엘로의 작품 '시스티나의 성모'를 좋아했다. 그는 이 작품이야말로 인간의 천재성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이라며 언제나 경탄해 마지않았다.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된, 그가 숨을 거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 서재에는 이 작품의 복제품이 걸려 있다. 생전에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전체 그림을 온전히 복제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윗부분만을 복제한 것이다.
2018년 5월 필자가 카자흐스탄 세메이의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에 갔을 때도 이 복제 그림이 도스토옙스키와 안나의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또 그가 깊은 인상을 받은 그림은 바젤 미술관에 있는 한스 홀바인의 종교화 '그리스도의 시신'이다. 안나는 바젤 미술관에 함께 갔을 때 이 그림을 보았다. 십자가에서 숨진 뒤 끌려 내려와 썩도록 방치된 참혹한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안나는 마침 임신 중이어서 이 그림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다른 전시실로 갔는데, 15분인가 20분쯤 후에 돌아와 보니 도스토옙스키가 여전히 그곳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흥분된 얼굴에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발작이 시작되는 순간 안나가 여러 번 본 표정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남편의 팔을 잡고 그를 다른 전시실로 데리고 가 의자에 앉혔다. 이날 다행히도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별실에는 '그리스도의 시신' 복제화도 걸려 있다.
첫딸을 잃고 실의에 빠지다
도스토옙스키 부부의 유럽 생활은 고단했다. 늘 돈에 쪼들렸기 때문이다. <러시아 통보> 등에서 부쳐주는 원고료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는 사이 첫아이가 생겼다. 1868년 2월, 부부는 제네바에서 첫딸 소냐(소피야)를 얻고 뛸 듯이 기뻐했다. 도스토옙스키의 나이 47세에 얻은 첫아이였다. 길눈이 어두웠던 도스토옙스키는 소냐가 태어나기 전 산파가 사는 집이 산비탈에 모양이 비슷비슷한 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산파 집으로 가는 길을 익히기 위해 3주간이나 그 동네로 산책을 다녔다. 밤중에 갑자기 부르러 갈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집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처럼 간절히 기다리던 아이였으나 소냐는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감기로 죽고 말았다. 유모차를 끌고 산책 도중 갑자기 날씨가 변해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소냐가 감기에 걸렸다. 유명한 소아과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아이가 죽기 3시간 전까지도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고 했으나 소냐는 갑자기 숨을 거뒀다. 첫 부인 마리야와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자식을 갖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첫아이를 이처럼 잃었으니 슬픔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냐를 묻은 후 낙담한 부부는 제네바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더욱이 소냐가 죽었을 때 주위의 스위스 사람들이 보여준 박정한 태도도 이곳에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웃들은 소냐가 죽은 후 안나가 소리 내어 울자, '신경에 거슬리니 큰소리로 울지 않도록 해달라'고 사람을 보냈다. 부부는 제네바를 떠나 스위스의 호반 도시 베베로 이주해 슬픈 여름을 보낸 후 9월 초에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옮겨간다. 밀라노에서 두 달을 지낸 후 부부는 도스토옙스키가 미술품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피렌체로 이사했다.
다음 해 1869년 이탈리아에서 사는 동안 다시 아이가 생겼다. 안나는 이탈리아어를 조금 할 줄 알았으나 도스토옙스키는 이탈리아어를 몰랐다. 안나의 출산을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산파나 의사 등과 이야기할 수 있는 불어나 독일어가 통하는 곳으로 이주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부부는 1869년 8월 이탈리아에서 다시 익숙한 도시인 드레스덴으로 이주했다. 1869년 9월 둘째 딸 류보피가 태어났다. 부부는 두 번째도 딸이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이름도 '사랑'이라는 뜻인 '류보피'로 정해두었었다.
『전쟁과 평화』를 감추다
안나가 류보피를 임신하고 있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비평가 스트라호프가 러시아에서 레프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출판했다며 이 소설 한 질을 보내주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을 읽다 보니 그 내용 중에 주인공 안드레이 발콘스키의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죽는 장면이 나왔다. 안나도 도스토옙스키가 먼저 읽은 이 소설을 따라 읽고 있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임신 중인 안나가 이 부분을 읽는 것이 심적으로 좋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대목이 들어 있는 한 권을 감췄다. 안나가 소설을 읽다 보니 한 권이 없었다. 없어진 한 권을 찾기 위해 온 데를 다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까운 한 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가 류보피를 무사히 낳은 후 그 책을 내주었다. 류보피가 태어난 후 도스토옙스키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스트라호프에게 이렇게 기쁨에 넘친 편지를 썼다고 안나는 회고록에서 밝혔다.
"아, 존경하는 니콜라이 니콜라이비치(스트라호프). 자네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나. 왜 아기가 없단 말인가. 자네에게 맹세컨대, 인생의 행복 중 4분의 3이 거기에 있다네. 나머지 다른 것들엔 겨우 4분의 1이 있을 뿐이지."
류보피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도스토옙스키는 유럽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동안 『백치』(1868), 『영원한 남편』(1869) 등을 집필했다. 『백치』는 1868년 <러시아 통보>에 실렸다. 『백치』 속에는 도스토옙스키가 과거 사형장에서 죽음 직전 살아 돌아온 체험담이 주인공이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 형식으로 들어 있다. 『영원한 남편』에는 그가 시베리아 시절 겪은 애정과 갈등에 대한 경험이 녹아 있다는 분석이다. (다음 호에 계속)
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의 첫사랑의 추억 ①
미친 듯 사랑했던 마리야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생애 중 시베리아에서 만난 마리야와의 첫사랑을 어떻게 회상했을까?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쓴 구체적인 기록을 찾기는 어렵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첫사랑과 관련한 이야기는 훗날 발견된 그의 편지들과 그의 첫사랑을 목격하고 도와준 브랑겔 남작의 회상록,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 문득문득 나타나 있는 흔적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2018년 7월 18일부터 며칠 휴가를 내어 시베리아 노보쿠즈네츠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찾아갔다. 우리나라가 폭염으로 펄펄 끓고 있을 때였다. 시베리아의 기온은 서울보다 10℃ 이상 낮았다. 아침 기온이 17~18℃, 낮 기온은 23~24℃ 정도였다. 서울의 아침 기온이 수십 년 만에 최고라는 28~29℃, 낮 기온이 36~38℃를 달릴 때였다. 시베리아의 외딴 도시 노보쿠즈네츠크에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있는 이유는 이곳이 도스토옙스키가 미친 듯 사랑했던 마리야를 찾아와 결혼을 한 기념비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인구 2천~3천 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다. 이름도 쿠즈네츠크였는데 20세기에 스탈린스크로 개명했다가 스탈린이 죽고 나서 다시 노보쿠즈네츠크로 바뀌었다. 노보쿠즈네츠크는 시베리아 중심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동남쪽으로 380km 떨어져 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가야 하는데 교통이 다소 불편했다. 비행기, 버스, 대절 택시 등을 고려하다가 결국 기차로 다녀오기로 했다. 교통편 예약 등은 지난해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갈 때처럼 전 부랴트 자치공화국 외무장관을 지낸 김준길 교수가 수고해주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노보쿠즈네츠크로 오가는 기차도 시간이 영 좋지 않았다. 가는 열차는 내가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한 다음 날인 19일 새벽 5시 출발로 되어 있었다. 7시간 후인 낮 12시 노보쿠즈네츠크 도착이다. 돌아올 때는 같은 날 밤 8시 반에 노보쿠즈네츠크를 출발해 새벽 3시에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한다. 갈 때와 올 때 걸리는 시간이 30분가량 차이가 났다. 기차 타는 시간만 왕복 13시간 30분이다. 이번 여행에는 김준길 교수와 그의 대학 후배인 사비르 벨리예브 박사가 동행했다. 학자이며 사업가이기도 한 사비르 박사는 고맙게도 오랜만에 고향도 방문할 겸 이 여행의 안내를 자청했다고 한다. 기차 안에서 나와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가 스탈린에 대해 다소 옹호하는 입장을 보여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이 소련을 강하게 이끌었다며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아직도 30% 정도는 된다고 한다.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노보쿠즈네츠크 역은 온통 에메랄드빛인 노보시비르스크 역이나 옴스크 역과 달리 노랗고 빨간 기둥에 연분홍빛 지붕을 가진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역 바로 옆에는 노보시비르스크의 대표적 상징물 중 하나이기도 한 황금 돔의 미니 성당 차스브냐를 닮은 작은 성당이 눈길을 끌었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직행했다. 박물관에는 김준길 교수가 사전에 우리의 방문 일정을 알려놓았기 때문에 직원들이 반갑게 일행을 맞아주었다. 박물관은 마리야 가족이 방 하나에 세 들어 살던 통나무집을 개조한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흔히 보는 가옥이다. 하급 세무 관리였던 마리야의 남편 이사예프는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이곳으로 전근온 지 석 달 만인 1855년 8월에 죽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는 빚만 남긴 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떴다. 마리야는 이 집에서 어린 아들 파벨을 데리고 1857년 2월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 집의 내부는 십(十) 자로 네 부분으로 나뉜 구조였다. 이 가운에 안쪽의 방 한 칸이 마리야 가족이 살던 공간이었다. 안내를 해준 카체리나 양은 자신이 이곳에서 일한 지 7년이 되었는데 그 이전에 한국인이 다녀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은 한국인을 처음 본다고 했다.
나는 설명을 듣다가 카체리나 양에게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를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사병 신분임에도 마리야 아들의 가정교사로 그 집에 드나들다가 마리야와 애정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는 일부 기록(고바야시 히데오의 『도스토옙스키의 생활』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병영 생활을 하는 사병이 가정교사를 하러 민간인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는 정황상 맞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카체리나 양은 도스토옙스키가 가정교사를 했던 것은 아니며, 벨레호프란 장교의 소개로 이사예프 부부를 알게 된 것이 마리야를 사귀게 된 계기였다고 했다. 마리야보다는 도스토옙스키 쪽에서 먼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던 중 이사예프가 세미팔라친스크에서 동북쪽으로 600km나 떨어진 쿠즈네츠크로 전근을 가게 되어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되자, 도스토옙스키가 충격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는 브랑겔 남작의 회상록에 나온다. 마리야는 체념한 듯했다고 한다. 마리야가 떠나자 도스토옙스키는 잠도 잘 못 자고 음식을 잘 먹지 않아 체중도 줄어들었다. 노상 초조한 모습으로 담배만 빨아대며 지냈다.
마리야가 떠난 후 유령처럼 변한 도스토옙스키
브랑겔 남작은 마리야가 떠난 후 낙담하여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몸도 쇠약해져 유령처럼 보이는 도스토옙스키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를 한 번 만나기라도 하면 불행한 상태가 나아질까 하여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하고 작전을 짰다. 처음에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지사와 연대장에게 세미팔라친스크와 쿠즈네츠크의 중간쯤에 있는 즈미예브(현재의 지명은 지메이노고르스크)까지 다녀올 수 있도록 탄원을 하도록 했으나 두 번이나 거부되었다.
결국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브랑겔 남작은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발작을 몇 번이나 일으켜 아파 누워 있다는 소문을 온 마을에 퍼뜨렸다. 당시 세미팔라친스크의 인구는 2천~3천 명에 불과했으므로 소문은 금방 퍼졌다. 도스토옙스키는 연대장에게 군의관 라못테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고 보고하는 한편으로 쿠즈네츠크로 마리야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에게 즈미예브에서 만나자고 했다. 군의관 라못테는 폴란드 출신인데 그도 정치적인 처벌로 세미팔라친스크에 와 있었다. 즈미예브 상봉 계획도 실은 군의관의 아이디어였다고 브랑겔은 후에 술회했다.
어느 날 해가 진 후 밤 10시쯤 도스토옙스키와 브랑겔은 몰래 마차를 타고 세미팔라친스크를 떠났다. 마부에게 마차를 전속력으로 몰도록 했다. 마차는 최대 속도로 달렸으나 맘이 급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줄곧 마부에게 더 빨리 달려달라고 재촉했다. 마침내 즈미예브에 도착했으나 마리야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로부터 남편의 병세가 중하고 여비가 없어 오지 못한다는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크게 실망했다. 브랑겔은 실망해 넋을 잃고 있는 도스토옙스키를 위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날 두 사람은 다시 300km를 28시간 만에 달려 세미팔라친스크로 돌아왔다. 아무도 그들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 만한 마차의 속도
300km를 28시간 만에 달렸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면 역사에 남을 만한 속도이다. 말을 타고 최대한 빨리 달리면 한 시간에 10마일 즉 16km 정도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타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 질주할 때(영어로 'gallop'라고 한다. 자동차 이름 갤로퍼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평균 속도는 시속 20km다. 고대 로마의 문헌에 말을 탄 전령이 하루에 가장 길게 달린 거리가 144마일이란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230km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는 마차로 하루에 257km를 간 셈이다. 어찌 세계적인 기록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경우는 혼자 말을 타고 달린 것도 아니고 마차를 타고 달린 것이다. 어떤 종류의 마차인지는 알 수 없다. 마차도 말 한 필만 달린 마차, 쌍두마차, 사두마차, 육두마차 등이 있다. 아무튼 잘못해서 발각되면 영창을 가야 할 사안이므로 갈 때, 올 때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렸을 것이다. 참으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아무도 모르게 이처럼 엄청난 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나는 노보쿠즈네츠크 박물관의 카체리나에게 후일 도스토옙스키가 결혼하기 위해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쿠즈네츠크로 왔을 때는 얼마나 걸렸냐고 물었다. 그녀는 2~3일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4~5일은 걸리는 거리다. 아마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렸을 것이라고 카체리나는 설명했으나 그녀도 도스토옙스키가 얼마나 걸려서 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한 듯했다. 이보다 수십 년 앞서 데카브리스트 발콘스키 공작의 부인 마리야가 시베리아에 유형 가 있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1826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했을 때 700km 거리의 모스크바까지 말썰매로 빨리 달려 닷새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겨울이었으므로 말썰매를 탔는데 이는 하루 140km씩 달렸다는 이야기다. 도스토옙스키도 1857년 2월 장가들러 쿠즈네츠크에 갈 때 겨울이었으므로 말썰매를 타고 갔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쿠즈네츠크 세 번 방문
도스토옙스키는 결혼하기 위해 간 것을 포함해 모두 세 차례 쿠즈네츠크에 갔다. 즈미예브까지 갔다가 마리야를 못 만나고 온 것은 물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처음 간 것은 1856년 7월이다. 쿠즈네츠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바르나울까지 출장을 갔다가 몰래 쿠즈네츠크까지 가서 마리야를 만나고 이틀 동안 지내다 왔다. 그는 이때 마리야가 자신에게 많이 기울어졌다고 브랑겔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다. 남편 이사예프가 죽은 후 마리야에게는 중매가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그녀는 또 베르구노프라는 20대 젊은 교사와도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낸 편지에 비쳐 도스토옙스키를 아연 긴장시켰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쿠즈네츠크 방문은 장교대우 준위로 승진한 직후인 1856년 11월이다. 이때는 장교대우가 되었으므로 공식으로 허가를 받고 간 것이다. 쿠즈네츠크에서 5일간 지냈는데 마리야 집에서 묵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때 마리야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1857년 2월에 가서 2주 정도 머물렀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성당은 러시아 혁명 후 내전 때인 1919년 볼셰비키주의자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당시의 사진이 남아 있고, 성당 그림이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있었다. 박물관의 에밀리야 쉐스타코바 관장은, "마리야는 단순히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한 것은 아니며 도스토옙스키의 지성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있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