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는 늘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 헤맨다. 해마다 점점 어리고 개성 가득한 모델들이 런웨이와 패션 브랜드의 캠페인에 등장해 신선한 이미지를 어필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인스타그램에서 막강한 팔로어를 거느린 켄달 제너, 지지 하디드와 벨라 하디드, 카라 델레바인 등 하이틴 스타들이 패션계를 점령하며 새로운 ‘소셜 모델’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최근 또다시 새로운 움직임이 감지되지 시작했다. 잘나가는 ‘소셜 모델’들이 판치던 런웨이에 그들의 엄마뻘인 90년대 슈퍼모델들이 화려하게 돌아온 것. 베르사체의 2018 S/S 컬렉션에는 카를라 브루니, 클라우디아 쉬퍼, 나오미 캠벨, 신디 크로포드, 헬레나 크리스텐슨이 금빛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기립 박수를 받으며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평균 나이 49세의 왕언니들은 여전히 완벽한 몸매,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레전드 모델의 격이 다른 클래스를 입증했다.
나이와 세대를 뛰어넘은 아름다움을 보여준 언니들의 반란은 또다시 리즈 시절을 재현케 했다. 90년대의 빛바랜 잡지가 아닌 2018년판 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하고, 전성기 시절에도 해보지 못했던 패션 하우스의 새 얼굴로 소개되는 등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기 시작한 것. 클라우디아 쉬퍼는 화장품 브랜드 ‘아트 데코’와 손잡고 ‘클라우디아 쉬퍼 메이크업’을 론칭했고, 슈즈 브랜드 ‘아쿠아주라’와 컬래버레이션한 슈즈를 출시하며 여전한 감각을 과시 중이다. 신예 모델 카이아 거버의 엄마이기도 한 신디 크로포드는 패션 매거진의 커버를 장식하는 톱모델로 활약 중이며, 청바지 브랜드 ‘리던’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내건 컬렉션을 선보이며 전성기 시절의 우아한 매력을 보여줬다. 나오미 캠벨은 그 시절 모델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꾸준히 어린 모델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워킹을 보여주고 있으며, H&M에서 지난 F/W 시즌 캠페인의 얼굴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90년대의 스타일 아이콘 케이트 모스는 슈즈 브랜드 스튜어트 와이츠먼의 2018 S/S 광고 캠페인에서 20대의 지지 하디드와 함께 등장해 건재를 과시했으며, 루이비통의 2018 F/W 컬렉션 피날레를 장식하며 “역시 케이트!”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슈퍼모델이자 배우 앰버 발레타는 이번 시즌 블루 마린의 광고 캠페인에 신비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신선함을 안겨줬다. 모델 언니들의 바통을 넘겨받아 추억 속 할리우드 스타들도 속속 귀환했다. 배우 위노나 라이더는 엘리자베스 올슨과 함께 이번 시즌 H&M을 대표하는 얼굴로 나서 ‘여성 파워’를 보여줬고, 가수 겸 배우 제니퍼 로페즈는 게스의 모델로 낙점돼 전성기 시절 모습과 오버랩되는 녹슬지 않은 관능미를 발산했다.
이렇게 90년대 패션을 주름잡던 언니들이 돌아왔다. 그들을 다시 불러낸 건 물론 분방하고 자유롭던 패션 황금기를 향한 진한 향수와 추억 덕분이다. 90년대의 패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한 스타일뿐 아니라 그 시대를 풍미했던 왕년의 스타까지 소환하게 만들었으니까. 또한 밀레니얼 시대의 ‘소셜 모델’들에게 식상해진 패션계가 새로운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원조 90년대 슈퍼모델들을 시작으로 70~80년대 셀러브리티들에까지 눈을 돌린 것도 한몫했다. 한때 모델 순위 0순위로 떠올랐던 켄달 제너와 지지 하디드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둘이 합치면 1억이 훌쩍 넘는 엄청난 숫자다. 그런데 그들 중 이들 브랜드가 원하는 진짜 소비자는 과연 얼마나 될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 것. 팔로어 숫자에 현혹돼 10대 후반~20대의 젊은 소비자들을 위한 광고로 브랜드 인지도에 신경 쓰는 대신 차라리 직접 매장을 찾아 지갑을 여는 40~50대 소비자들을 직접 공략하자는 정공법을 택했다. 하나둘씩 ‘소셜 모델’ 대신 실제 소비자들과 동년배인 ‘돌아온 워너비’ 모델들을 광고 캠페인과 런웨이에 세우기 시작했다. 명민한 마케팅 전략 덕분에 제니퍼 로페즈를 내세운 게스는 상품 가격대를 조금 높였지만 매출은 오히려 늘어나고, 주가는 한 달 만에 60% 급증했다고. 제니퍼 로페즈가 새로운 고객들을 끌어오는 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건 당연지사다.
여전히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에 원숙미까지 더해 컴백한 90년대 언니들은 친숙하면서도 신선한 묘한 매력으로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젊을 때야 뭔들 안 예쁘겠어?” 하며 영 모델들을 향해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던 중년 여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다시 소비의 실세로 활약하고 있다. 이 완벽한 언니들을 향한 패션계의 구애는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