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뉴욕 싱글 여성들의 사랑과 섹스 라이프를 다룬 미국 HBO <섹스 앤 더 시티>의 여주인공 '캐리 브래드쇼'. 마놀로 블라닉과 담배를 좋아하던 극 중 그녀는 여전히 여성들의 우상이다. 최근 그녀를 연기한 사라 제시카 파커가 뉴스를 뜨겁게 달궜다. 바로 주름 때문이다. 최근 열린 패션 행사 '멧 갈라'에 나타난 그녀의 얼굴에서 '캐리 브래드쇼'의 귀여운 느낌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다. 매체들은 그녀의 달라진 모습에 주목해 일제히 뉴스를 생산해냈지만 과연 50대 중반인 그녀 얼굴의 주름이 뉴스를 도배할 만큼 충격적인 일인 것일까?
메이크업, 속옷, 제모, 다이어트, 손톱, 머릿결 그리고 안경까지. 여자로 살아가는 비용은 절대 적지 않다. 이 중 하나라도 관리가 소홀해 보이면 소위 '외모 평가'의 도마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판매사원 3백여 명으로 구성된 명품 브랜드 샤넬의 한국 노조 조합원들이 부분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의 요구는 최저 시급 인상에 따른 임금 인상과 인원 충원 등이었지만 복장 규정에 대한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다. 머리 모양, 화장 등 자사의 용모 규정을 지키기 위해 판매 직원들은 30분 일찍 출근해 화장을 하는 등 '꾸밈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 판매사원의 복장은 매장 인테리어와 더불어 브랜드의 이미지를 고객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기에 브랜드로서는 그에 대한 지침을 사원들에게 권고하고 싶겠으나, 그것이 사원들에게 불합리한 강요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 또한 사회에 만연한 '외모 코르셋'과 다를 바 없다.
중세 시대 서양에서 여성의 허리를 가늘게 하기 위해 물리적인 압박을 가했던 속옷의 한 종류인 코르셋은 산업화와 여성운동 등을 거치며 현대에는 종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요구하는 정형화된 미의 기준은 남아 있어, 최근 이를 '외모 코르셋' 혹은 '투명 코르셋'이라고 부른다. 주름도 이러한 외모 코르셋 중 하나다. 주름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으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드니로나 숀 펜은 중년으로 들어서며 생긴 얼굴 주름이 연기의 깊이를 더해주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영화배우 안성기나 최민식의 주름이 만들어내는 얼굴의 명암은 그들의 연기에 깊이를 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의견이 다수다. 그러나 여성 배우에게 주름은 인생의 흔적이 아닌 지워야 할 잡티처럼 여겨질 뿐이다. 남자를 와인에 비유하고 여자를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비유하는 것이 한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처럼 여전히 남자의 노화는 '성숙'이 되고, 여자의 노화는 '퇴화'로 여기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반대하며 당당히 자신의 주름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가수 이효리. 그녀는 민낯으로 TV에 나오는 것을 개의치 않을뿐더러 오히려 과도한 화장을 하는 것이 진짜 자신을 가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하고 있다. 두꺼운 화장을 누구보다 많이 했을 그녀이기에 그 메시지는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항상 화려한 화장을 한 채 무대에 선 그녀는 '꾸며진 가수 이효리'와 무대에서 내려와 화장을 지운 '인간 이효리' 사이에서의 괴리감이 컸을 터였다. 특히 이효리는 눈웃음이 특징으로,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많이 생긴다. 한때는 이 또한 대중의 조롱거리가 됐었었다. 지금도 포털 사이트에 '이효리 주름'을 검색하면 "이효리 눈가 주름 지못미" "주름 자글자글한 전직 요정 이효리" 등과 같은 게시물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의 남편 이상순을 만나며 삶에 변화를 맞은 그녀는 외모에 대해서도 전과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지난해 6월 이효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의 노래 '변하지 않는 건'을 소개하며 "변하지 않는 건 너무 이상해, 변하지 않는 건 너무 위험해"라는 가사를 통해 노화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제 40대인 이효리. 자연스럽게 주름이 생겨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 문득 생각나는 배우가 있다. 바로 배우 문숙이다. 그녀는 1954년생으로 자라는 흰머리를 감추지 않고 자연스러운 주름이 편안한 인상을 준다. 그녀는 한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해 "필러나 보톡스 시술을 받은 적이 없다. 손을 대지 않고 그냥 늙은 것"이라고 자신에 대해 말했다.
그녀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노화를 늦추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부작용이 반드시 따른다. 딱 원하는 만큼만 자연스럽게 피부가 젊어지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어느 때보다 뷰티 관련 콘텐츠가 쏟아지는 지금, 완벽한 메이크업으로 트렌드를 선도하는 셀렙과 모델들은 자신의 민낯도 서슴없이 공개한다. 킴 카다시안의 동생이며 자신의 뷰티 브랜드로 세계적인 히트를 친 카일리 제너와 팝 디바 레이디 가가는 각자 SNS에 자신들의 민낯 사진을 올렸다. 평소 진한 화장을 해왔던 그녀들이기에 민낯과의 차이는 더욱 컸다. 그럼에도 댓글은 "민낯이 더 아름답다"는 내용이 지배적이었다.
이전까지 화장은 여성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얼굴의 약점을 가리는 무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화장은 선택이며 여성들의 놀이와 같은 성격을 띤다. 쏟아지는 뷰티 제품을 장난감으로 여기고 화장을 취미로 즐길 뿐이다. 그러니 민낯을 치부로 여겼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화장을 강요했던 과거의 분위기와 달리 여성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나 혼자 산다> <정글의 법칙> 등 연예인들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예능 프로그램이 늘면서 여자 연예인들이 민낯을 공개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진짜 노메이크업이 아닌, 일명 '방송용 생얼'로 가벼운 피부 화장을 한 채 녹화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엔 아무런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진짜 민낯을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변화엔 여성의 민낯을 '단정하지 못한 것' '게으른 것'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외모를 꾸미는 것은 번거로우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외부의 강요에 의해 외모를 꾸며야 한다면 그건 단순노동일 뿐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놀이처럼 외모를 꾸미는 것에서야말로 외적 아름다움을 통해 내적 아름다움을 채우는 효과를 얻게 되지 않을까?
민낯을 공개한 스타들
알리샤 키스 'Fallin''이란 곡으로 유명한 알리샤 키스는 할리우드 노메이크업 무브먼트의 선두 주자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화장은 일종의 사회적 도구로, 개인의 개성을 감춰버린다"며 노메이크업의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기네스 팰트로 그녀는 자신의 SNS에 '#nomakeup'이란 해시태그와 함께 민낯 사진을 공개했다. '나의 과거와 미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팬들의 사랑에 감사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민낯 사진을 공개한 이유를 밝혔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지난 3월 그녀는 <페이퍼 매거진>의 화보에서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카메라 앞에 섰다. 그녀는 "민낯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20년 만에 처음"이라고 밝혔다.
송지효 8년 동안 <런닝맨>에 출연하며 송지효는 줄곧 민낯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한껏 꾸미고 나온 게스트보다 송지효가 더 예뻐 보이는 것은 그녀의 자연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김세정 <정글의 법칙>에서 공개한 김세정의 민낯은 화장한 얼굴보다 더 예뻤다. 빨갛게 올라온 홍조와 귀여운 눈웃음은 그대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