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승신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듯 뜨거운 햇볕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드문 날이었고,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최근 출판된 <이승신의 왜 교토인가?>(2018, 시가)를 들고 인터뷰 장소로 들어선 시인의 제안으로 날씨를 느낄 수 있는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푸른 하늘을 잠시 감상하는데 그녀가 한줄의 시, 단가를 읊기 시작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시인 손호연이 지은 단가 ‘평화의 시’다. 손호연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태어나 동경제국여자대학으로 유학 가 시성 사사키 노부츠나에게 단가를 배워 귀국 후 63년간 단가 2,000여 수 이상을 남겼다. 평생 한국에서 시를 지었으나 돌아가시기 전 까지는 일본에만 알려졌다. 이승신의 어머니이다.
“단가를 아시나요? 일본의 시로 알려진 단가는 1,400년 전 우리가 일본에 전해준 시예요. 어머니는 단가를 통해 한일 간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셨는데 요즘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아 마음이 아픕니다.”
이승신이 이처럼 말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평화의 시’는 지난 2005년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가 한일 우호를 소망하며 읊은 단가였다.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노무현 대통령께 어머니의 평화 정신이 깃든 시를 보여주며 인용할 것을 권유했어요. 당시 외교통상부 반기문 장관에게도 권했고요. 그런데 고이즈미 전 총리가 어머니의 ‘평화의 시’를 읊은 거예요.”
이승신은 한일 정상회담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당시 고이즈미 전 총리에 앞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단가를 읊으며 회담을 시작했다면 국격이 올라갔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당시 일본 측 총리가 ‘평화의 시’를 읊고 그 평화 정신을 가슴에 새기겠다고 했어요. 이를 본 반기문 장관이 전화로 ‘이시인이 말했던 걸 이제 확실히 알겠다’고 말했죠. 지금은 서로가 얻을 득과 실을 따지는 것이 외교인 것처럼 생각돼지만 외교도 사람이 하는 것이에요.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결국 외교는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이 중요해요.”
‘윤동주 시인 모교’ 도시샤대학서 유학
한일 정상회담에 얽힌 비화를 비롯해 이승신에게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스피치와 낭송회, 강연 등의 이유로 일본을 방문하다 어느 날 일본 사회를 깊숙이 들여다보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가까운 나라인 한국과 일본은 왜 그렇게 삐걱대는 것일까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술의 핵심인 문학으로 한일 관계를 승화시키려 일생 노력한 어머니를 생각하니 날이 갈수록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것도 마음이 아팠어요. 실제로 일본에서 몸으로 부딪치면 어떤 실마리를 얻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어 교토 도시샤대학에 입학했어요.”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은 시인 윤동주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학교로, 학교 안에는 윤동주의 대표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승신은 도시샤대학에서 일본어와 고전문학을 전공하면서 캠퍼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윤동주의 시비를 바라봤다.
“사계절 중 윤동주의 시비는 6월에 가장 시인의 시비다워요. 그 앞에 보랏빛 꽃이 필 때인데 윤동주 시인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의 시비는 비록 일본인이 아닌 한인교우회가 세운 거지만 그윽한 영혼과 기를 품고 있음이 느껴져요. 깊은 골짜기일수록 곁에 높은 산이 우뚝 서 있다는 말이 있죠? 윤동주는 산 같은 존재예요. 갈등이 깊은 두 나라여서 그의 영혼과 기운의 절개가 높아 보이죠.”
이승신은 도시샤대학에서 윤동주의 흔적을 느끼며 그 시비 앞을 쓸고 닦았다. 일본어가 어려웠고 어려운 고비가 몇 차례 있었지만 이겨내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를 시작으로 조지타운대학교 대학원, 시라큐스대학교 대학원에서 학문을 닦았다. 하지만 어느 대학에서의 공부보다 도시샤대학에서 한 공부가 자랑스럽다.
“도시샤대학 총장이 졸업 축사를 통해 인품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관용을 지키기 위해 불관용을 불관용해야 할까’란 질문을 던지며 지식과 인품을 겸비한 세계의 양심을 육성하는 것이 도시샤대학의 지향점이라고 말했죠. 스물두 살의 대학생들이 졸업 축사의 의미를 알까요? 저 역시 그 나이에 졸업 축사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거든요.(웃음) 하지만 이제 만학에 졸업 축사를 들으니 의미가 남달라요. 관용과 양심을 지닌 인물의 깊은 뜻을 생각하게 되지요.”
왜 교토인가?
한 줄의 시 단가의 대가인 시인 손호연 선생의 딸인 이승신은 문학을 매개로 한일관계가 긍정적으로 복원되길 꿈꾼다. 794년부터 1869년까지 일본의 수도이자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교토에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비롯해 중국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온 사람을 뜻하는 ‘도래인’이 상당수였다. 대다수의 도래인이 교토를 개척하는 데 일조했다.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교토에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했고, 재정의 출납·징세 사무·외교 문서를 관장하는 업무를 보기도 했다. 당시 한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작성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의 대부분이 백제인이었다.
“교토를 걷는 외국인들을 보면 교토의 역사가 느껴지는 건축을 보고 매우 감탄하더군요. 그러면 전 꼭 우리 조상이 만든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전쟁으로 660년 멸망한 백제에서 살아남은 민족이 교토로 건너와 많은 업적을 쌓았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교토 거리를 걷다 보면 우리의 오래된 역사 속을 걷는 기분이에요. 백제인의 혼령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교토의 구석구석을 가본 이승신은 자신만 알고 싶은 명소를 소개했다. 더불어 교토는 3월 말에서 4월, 그리고 11월에 방문해야 절경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4월에 교토에 가면 벚꽃 절경을 볼 수 있어요. 1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읍지 역할을 한 교토엔 3,000개가 넘는 궁과 절이 있는데, 유서 깊은 도시의 건축물과 멋진 벚꽃의 조화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워요. 많은 곳 중 ‘고다이지’를 추천합니다. 가레산수이 정원의 벚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바람에 꽃이 흩날리는 모습이 일품이거든요.”
이승신은 이어 단풍철에 갈 만한 명소도 추천했다. 단풍이 보기 좋은 ‘호공잉’이다. 교토 중심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아라시야마에 있는 곳이다. 아라시야마산이 있고 가츠라강이 흐르는데, 유명한 사찰 텐류지 바로 곁에 있는 정원이 바로 그곳이다.
“호공잉은 일 년 중 단풍철에만 공개돼요. 수많은 단풍나무가 냇물을 따라 늘어져 있는데, 어느 각도에서 바라봐도 황홀한 풍광이죠.”
명소를 알았으니 이제 맛집을 찾을 차례다. 이승신에게 그녀만이 알고 있는 맛집을 물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이 찾는 맛집이야말로 진정한 맛집이기에 다음에 교토를 찾을 일이 생기면 꼭 방문해볼 참이다.
이승신은 ‘야마모토멘조’란 우동집을 추천했다. 낡고 어둑한 분위기에 20석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식당인데, 머리를 질끈 묶은 젊은이들이 손 빠르게 우동을 만들어 삶는다고. 키츠네 우동과 야채 덴푸라를 먹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단다.
“4시간이나 줄을 서 기다리다 먹은 우동이 일품이었죠. 나중에 야마모토멘조가 무엇 때문에 인기가 많은지 들으니, ‘고급 말고 이류 식당-교토’라는 주제의 조사에서 2위 맛집으로 뽑혔기 때문이래요. 이류 식당의 점수를 따로 매긴다니, 재미있는 발상이죠? 만약 일본에서 어느 식당을 갈지 고민하고 있다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식당을 찾으세요. 일본에서 줄을 서면 대체로 믿을 만한 곳이거든요.”
비밀스러운 맛집을 소개하던 이승신은 급기야 어머니인 손호연 시인이 좋아한 식당을 공개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방문했던 곳은 ‘한베이후’로 15대째 운영하는 식당인데, 밀가루에서 빼낸 글루텐으로 만든 독특한 요리를 판매하는 곳이다.
“어머니의 책을 보고 알게 돼 찾아갔다가 음식의 맛에 반한 한베이후는 지난 1689년에 문을 열어 328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에요. 현재 15대째 운영 중이죠. 내어오는 음식의 모양과 색이 사랑스러우며 맛이 부드럽고 담백해요. 오랜 세월 대를 이어오며 지극 정성으로 연구·개발해, 맛과 정성에 감탄한 손님들이 계속 찾아오는 곳이죠.”
나의 어머니
15대를 이어 운영 중인 한베이후처럼 손호연-이승신 모녀 시인 역시 2대째 문학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인, 방송인, 수필가로 활동한 이승신은 지난 2008년 <치유와 깨우침의 여정에서>(중앙북스)를 내놓으면서 시인으로 데뷔했다. 일각에서는 이승신을 두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문학적 재능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어머니는 모국어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단가를 배워 그것을 일본어로 써오셨어요. 저는 일본어를 모르니 읽을 수 없었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어머니 시집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어머니가 지으신 단가의 가치를 알게 됐어요. 아마 어머니는 제가 시에 흥미가 없다고 생각하시곤, 단가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이승신은 성지순례를 갔는데 누군가가 계시를 준 것처럼 머릿속에 수많은 싯구가 떠올랐다. 소감을 즉석에서 짧은 시로 읊고 여행기를 한 줄의 시로 지었다. 운명처럼 단가를 짓게 된 것이다.
“짧은 시에 응축된 생각과 영감을 담은 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아요. 어머니의 단가 중 ‘이웃해 있어 가슴에도 가까운 나라되라고/ 무궁화를 보다듬고 벚꽃을 보다듬네’라는 것이 있어요. 일어로 쓰여 있던 어머니의 단가 속 ‘메데떼’라는 표현을 ‘보다듬고’라고 번역했죠. 알고 보니 ‘메데떼’는 ‘인내하다’ ‘포용하다’ ‘용서하다’ ‘사랑하다’라는 의미가 포함된 단어더군요. 어머니가 왜 그 단어를 쓰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무엇이든 사람이 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싶으셨던 거죠. 쉽지 않겠지만 마음이 있다면 쓰라린 역사를 품고 있는 한일 관계를 새로이 쌓을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다시 문학
이승신은 3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치, 예술, 신앙 등 각 분야에서 깊은 지식을 쌓으려면 문학 지식이 기본이라는 것. 그 과정에서 일본의 교육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문화의 깊이를 알거나 일본에 특별한 애정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요.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단가 몇 수를 기본으로 외우고 있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시와 문학을 사랑해요.”
일본인들은 일본 시의 두 장르인 단가와 하이쿠를 읽고 짓는다. 단가와 하이쿠는 모두 정형적인 운율을 가진 일본의 전통적인 시가다. 단가는 개인적인 사유의 철학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가인 반면, 하이쿠는 계절을 나타내는 ‘봄내음’ 혹은 ‘겨울바람’ 등의 계절어가 반드시 포함돼야 하는 단형시다. 쉽게 말해 단가가 클래식이라면 하이쿠는 대중가요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고전 시가를 외우는 셈이다.
“일본의 신문은 매일 ‘단가’를 싣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해요. TV를 켜면 시청자들이 투고한 단가에 전문가가 일일이 평을 하고, 유명 인사들이 둘러앉아 같은 제목을 놓고 단가를 짓기도 하죠. 일본 황궁은 신년이 되면 단가의 대가를 궁으로 초청해 천황과 황후, 황태자가 직접 지은 단가를 낭송하는 행사를 가져요. 1000년 전 단가 시인 100인의 시를 반으로 나누어 트럼프 같은 게임으로 만들었는데, 명절에 어린아이들이 가족과 그 놀이를 해요. 아이들은 시를 외워 구절과 구절을 이으며 게임을 하죠. 단가가 그들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에요.”
이승신은 유럽 문화를 접하며 우리 조상은 대체 무엇을 했을까 하는 고민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문득 수많은 유럽인이 교토의 고대 건축과 예술에 감동하며 우리 조상이 일본에 전한 짧은 시에 빠지는 것을 보며 선조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됐단다.
“교토의 긴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본래 가지고 있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죠. 교토를 통해 우리 전통을 보존하고 그를 기반으로 더 나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어요.”
이승신은 더 많은 한국인이 교토를 보길 기원한다. 우리에게 사라진 먼 옛 고향이 느껴질 것이며 한일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이승신이 바라는 그날을 기다리며, 작은 홀씨가 민들레꽃이 되듯이 그녀의 노력이 결실을 맺길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