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이보영은 예쁜 딸을 출산했다. 주변에서는 축하와 함께 엄마의 역할에 대해 알려줬다. 꼭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가 어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나니 사람들이 저한테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왜 사람들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할까?’ ‘왜 워킹맘은 아이에게 미안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했죠. 저는 출산하고 100일이 될 때까지 아이가 예쁜지 몰랐어요. 때로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도 잊었죠. 아이가 정말 예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나쁜 엄마인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가 예뻐 보이는 거예요. 그때 낳기만 했다고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이는 기른 정이에요. 제가 아이와 쌓은 하루가 아이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란 걸 알았어요.”
이보영은 tvN 드라마 <마더>에서 8살 때 보육원 앞에 버려진 상처 때문에 절대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엄마에게 버림받은 8살 여자아이 ‘윤복(허율 분)’을 만나면서 성장하고 결국 엄마가 되는 캐릭터 ‘강수진’을 연기했다. 그녀는 <마더>를 통해 모든 엄마가 똑같을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저는 아이를 낳고 좀 더 성숙해졌어요. 그렇지만 모두가 출산하고 육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경험해서 나쁠 것 없는 정도의 일이라고 여겨 꼭 아이를 낳으라고 권유하고 싶진 않아요. 저희 올케가 아이를 낳고 회사로 복귀했는데 결국 관둬야 하는 상황에 처했어요. 요즘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린이집 입학 대기 신청을 해도 대기자가 300명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사회는 아이를 키우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아요.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말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아이를 낳기 전에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마더>에는 다양한 모습의 엄마가 등장한다.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엄마, 아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엄마,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엄마까지 모두 ‘엄마’라고 이야기한다. 이보영이 실제로 엄마가 된 후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왜 당연히 준비된 듯이 엄마가 돼야 할까요? 사람들은 남편이 아이를 안고 있으면 칭찬을 했어요. ‘자상하다’ ‘아이고, 고생이 많다’ 식으로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울컥하더라고요.”
이보영은 출산 후 급격한 심경 변화를 겪었다.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락내리락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쯤 지나 예뻐 보이기 시작했을 땐 아동 학대 관련 기사를 보기만 해도 눈물이 흘렀다.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감정 기복이 심했어요. 아동 학대 뉴스 기사 제목만 크게 보이고, 기사 내용이 상상돼 많이 울었죠. 특히 영하의 날씨에 욕실에서 락스와 찬물 세례를 받은 아이가 숨지자 암매장한 ‘원영이 사건’은 뉴스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났어요. 남편이 보지 말라고 할 정도로 아이에 관해서는 감정의 진폭이 커졌어요. 그러다 <마더>를 만났죠.”
이보영은 <마더>에서 최고의 연기 파트너를 만났다. ‘윤복’ 역으로 출연한 아역 배우 허율이다. 2009년생으로 <마더>를 통해 처음 연기를 시작한 허율은 사연이 있는 듯 깊은 눈을 하고 눈물을 흘리거나 때로는 해맑게 웃으며 시청자에게 강한 울림을 전했다. 이보영은 허율을 “윤복이…”라고 부르며 말문을 열었지만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눈물이 터졌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린 그녀는 윤복이가 대견하다고 이야기했다.
“윤복이의 첫 연기 파트너가 돼서 영광이에요. 사실 제가 아역 배우랑 촬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초반에 윤복이가 촬영장에 온 게 좋아 산만한 모습을 보였어요. 그래서 ‘넌 주인공이야. 주인공은 다른 아이들처럼 떠들면 안 돼’라고 하면서 촬영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윤복이 자체가 됐더라고요.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의연할 수 있는지…. 정말 대견하고 고마워요.”
허율은 극에서 엄마 ‘자영(고성희 분)’과 내연남 ‘설악(손석구 분)’에게 학대받는 아동이다. 엄마는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고, 엄마의 내연남은 아이를 때리거나 아이가 아끼는 애완동물을 죽이며 학대한다. 이제 막 10살이 된 아이가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이다. 자칫하면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윤복이를 걱정했어요. 아동 학대 현장을 아이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돼 아동심리 상담가에게 상담을 받게 했죠. 그런데 윤복이는 지금 행복이 최대치예요. 지금보다 행복하고 즐거울 수 없대요. 오히려 드라마가 끝나는 게 슬픈 상태라 그 후가 걱정돼요. 사실 윤복이는 자신이 학대받는 장면을 촬영했는지 몰라요. 극에서 ‘수진(이보영 분)’은 윤복이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진 것을 보고 윤복을 키우기로 결심해요. 그 장면에서도 윤복이는 쓰레기봉투에 들어가서 재미있게 논다고 여겼어요. 학대받은 경험이 없으니까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거죠.”
이보영이 극찬한 허율은 무려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윤복 역을 꿰찼고 나이가 믿기지 않는 연기를 보여줬다. 첫 연기라고 믿기 힘든 감성이었고 흠잡을 데 없는 표현력이었다. 어른스러운 모습이 극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윤복이는 촬영 현장에 놀러 왔어요. 드라마가 중반쯤 접어들었을 때 율이가 아닌 윤복이가 됐죠. 13부 엔딩에서 수진과 윤복이 헤어졌는데 당시 카메라가 윤복이를 따라가면서 촬영했어요. 그 장면의 촬영이 끝나고 윤복이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하면서 계속 울더라고요. 저도 윤복이의 눈만 봐도 눈물이 나왔어요. 우리 드라마가 우는 장면이 많아 울지 않으려고 마음먹고 촬영을 시작했는데도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아요.”
이보영과 허율이 캐릭터에 푹 빠져 메소드 연기를 펼친 덕에 <마더>는 많은 이에게 호평받았다. 이보영의 가족 역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가족의 반응을 듣고 뿌듯함을 느꼈다.
“저는 다른 사람 반응보다 가족의 반응이 좋아요. 사실 가족이 가장 냉정하잖아요. 가족은 드라마 속 캐릭터보다 저를 먼저 보는데, 이번엔 저보다 수진이를 먼저 보더라고요. 저희 어머니는 제가 출연해도 재미없으면 보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엔 드라마가 시작되면 온 집 안의 불을 끄고 드라마만 보셨대요. 제 동생은 저한테 연락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전화를 걸어 ‘누나, 수진이가 윤복이랑 행복했으면 좋겠어’라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캐릭터 이름을 불러줄 때 행복해요. 가족의 반응을 보고 제가 의미 없는 일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살면서 어려울 때도 많고 버티기 힘든 적도 있었지만 중심을 잃지 않고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분이에요.
영원히 내 편인 사람이 있다는 건 가슴 벅찬 일이죠.
이보영의 동반자이자 동료 배우인 지성은 그녀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이보영은 지성 덕에 연기를 열심히 하게 됐다. 그녀는 데뷔 후 2010년까지 배우로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연기 자체를, 현장을 그대로 즐기지 못해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 지성과 열애 중임이 알려지고 배역 제안이 오지 않았을 때도 ‘어차피 하고 싶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러나 지성은 달랐다. 공개 연애 후에 시나리오가 잔뜩 들어왔고 그는 연기가, 현장이 좋아 즐기면서 연기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자극 받아 이를 악물고 연기하기 시작했다.
“오빠가 대본을 읽어보더니 ‘너와 윤복의 멜로’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저를 많이 배려해줬어요.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에 혼자 여행을 떠나는 시간도 줬어요. 드라마도 열중해서 봤고요. 오죽하면 드라마를 볼 때 제가 말을 시켜도 대꾸하지 않았죠. 14회 방송이 끝나고 인스타그램에 ‘<마더>, 왜 이렇게 눈물이 쏟아질까’라면서 게시물을 올렸더라고요. 진작 올려주지.(웃음) 그러고 저한테 수고했다면서 ‘드라마를 보고 위로받은 사람이 많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런 응원이 좋아요. 사람들 마음에 물결이 일렁이게 했다는 이야기요. 개인적으로 행복했어요.”
이보영의 딸은 엄마와 아빠가 TV에 나오는 배우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까? 지난해 지성은 <피고인>, 이보영은 <귓속말>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1~2개월 동안 딸이 아빠, 엄마를 못 보는 일도 있었다.
“아이는 아직 엄마가 배우라는 걸 몰라요. 그런데 엄마가 집에 없으니까 화를 내더라고요. 영상통화를 해도 화를 냈어요. 이대론 안 될 것 같아 촬영 현장에 데려와 ‘엄마가 일하고 있으니 이해해줘야 돼’라고 했죠. 그런데 엄마가 자꾸 다른 언니를 끌어안고, 그 언니가 저를 엄마라고 부르니까 영상통화를 해도 ‘언니는?’ 하고 찾더라고요. 그렇다고 딸에게 미안하진 않아요. 저희 딸도 결혼해 계속 일하길 바라거든요.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는데 일을 쉬고 엄마가 되라고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하라고 딸을 키우는 게 아니에요. 제가 삶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딸도 엄마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아요. 딸이 엄마와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가족 때문에 열심히 사는 건데 왜 미안해해야 할까요?”
엄마로서,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는 이보영은 아직 어린 딸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일을 한다. 그녀는 엄마인 동시에 누군가의 딸이다. 엄마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녀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에게 느껴지는 게 달라지더라고요. 엄마 때문에 제가 있는 거잖아요.
엄마가 제 아이를 봐주셔서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살면서 어려울 때도 많고 버티기 힘든 적도 있었지만 중심을 잃지 않고 잘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엄마 덕분이에요. 사랑받은 아이라면 어디서든 당당할 수 있다는 드라마 속 대사처럼요. 누군가 영원히 내 편인 사람이 있다는 건 엄마를 보면서 알 수 있어요.”
엄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낸 이보영은 딸에게 이혜영이 연기한 ‘영신’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먼 미래 자신이 어떤 엄마가 될지 예상할 수 없지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저는 아직 미성숙해요. 아이가 지금은 뭘 해도 예쁠 나이지만 자라서 사춘기가 오면 어떻게 대응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직까진 좋은 엄마 같아요. 아이를 낳기 전 생각했던 방향에 따라 키우고 있어요. 저는 드라마 속 ‘영신 엄마’처럼 한없이 믿어주고 사랑해주고, 편이 돼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대한민국을 사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보영. 그녀는 모든 이들이 ‘엄마’라는 것에 짓눌려 스스로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인간이니까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실수할 수 있지만 살아가면서 서로 치유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울렸다. “당신은 나쁜 엄마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