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희가 연기하는 사랑은 가슴이 아프다. SBS <애인있어요>에서는 결혼 생활 중 한 번도 사랑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 아내에게 지친 나머지 자신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최진언'을 연기했다. SBS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는 외도와 가정의 붕괴라는 고통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아가는 '유재학'을 그렸다.
JTBC <미스티>에서 보여준 사랑은 더 힘겹다. 지진희가 연기한 '강태욱'은 소신 있고 올곧은 검사 출신 국선 변호사다. 그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신과 달리 야망 있는 아내 '고혜란(김남주 분)'과의 갈등으로 명분뿐인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그의 아내는 "사랑이 아닌 명함이 돼줄 사람과 결혼한다"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승진해 뉴스 앵커가 되기 위해 낙태를 했다"고 고백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아내의 불륜 동영상을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내가 살인 사건의 살인 용의자로 몰리자 스스로 그녀의 변호사로 나섰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럼에도 시청자의 호응을 이끌어낸 것은 강태욱이 곧 지진희이기 때문이다. 애절한 눈빛과 중후한 목소리로 보여주는 묵직한 연기에 시청자는 동요했고 그의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강태욱의 사랑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겨져요. 일전에 강태욱을 다섯 글자로 표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내가 사랑해'라고 말했어요. 그게 강태욱이에요. 내가 사랑하니까 모든 것이 가능한 남자예요."
지진희의 설명만으론 강태욱의 사랑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혜란만 바라보는 '지독한 순정남'이라는 캐릭터가 현실에서 존재할지 의문이 계속 뒤따랐다.
"강태욱은 법조계 가문의 대법관 출신 아버지 밑에서 자랐어요. 대법관이 될 수 있는 인물인데 혜란의 성공을 위해 국선 변호사가 돼요. 한때 혜란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이혼 서류까지 준비했지만 이혼하지 않았어요. 결혼 생활이 망가지는 걸 인정할 수 없는 인물이거든요. 혜란이 성공을 위해 벌인 사건을 감수하는 것 또한 자신의 사랑이라고 깨달은 것 같아요. 혜란에게 한 약속을 떠올리면서 그녀를 지키기로 한 거죠. 그렇게 생각하니 강태욱의 사랑이 이해되더라고요.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랑이 있으니 태욱 같은 인물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지진희는 강태욱이 처한 가정환경, 그가 느낀 아픔과 고통 등을 상상하며 강태욱을 이해했다. 강태욱을 연기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오늘 방송될 것도 대본을 다시 읽어야 알죠. 그럼에도 잊히지 않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어요. 태욱이 검찰청에서 혜란을 처음 보고 우유를 건네면서 '남자친구는 있느냐? 결혼할 거냐? 나와라'라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쑥스러워 쭈뼛거렸으면 첫눈에 반한 여자를 놓쳤겠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멋있었어요."
지진희는 지난 2013년 <따뜻한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애인있어요> <끝에서 두 번째 사랑> 등 어른용 멜로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불륜을 저지르는 역할을 해왔다. 순정남 역할이 어색할 법도 했지만 그는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랑 방식이 있기 때문에 캐릭터를 이해하고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단다.
"정확히 말하면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는 '썸'을 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상태였어요. 저는 결혼한 사람이라도 살면서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이 들지만 흔들리진 않겠죠. 그때마다 흔들리면 정말 바쁘게 살아야겠죠?(웃음) 저도 어떤 여자를 보고 '어떻게 저렇게 예쁠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실제로 여자분들이 한 남자를 보고 '저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라고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도 있고요. 모든 사람이 죽기 전까지 그런 마음이 생기고 없어지고 반복할 것 같아요. 그래서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분들이라고 좋은 일만 있었을까요?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극복하고 사랑을 지키신 거겠죠. 여러 일을 겪으면서 어른이 되고 가정을 지키고 사랑을 이어가는 것 같아요. 그 중간에 잠깐 느끼는 마음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차이인 거죠."
이따금씩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지진희는 몇 년간 멜로드라마를 찍으면서 인간 지진희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아내를 대하는 태도를 되돌아봤다.
"저를 비롯해 우리나라 남자들은 아내를 다정하게 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연애할 땐 와이프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잘했는데 결혼한 후엔 거의 하지 않았어요. 몇 년 동안 어른들의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어요. 여태까지 하지 않아서 어색한 거예요. 그런데 몇 번 하다 보니 어려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생각을 와이프한테 털어놓고, 쑥스러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죠. 이제 습관이 됐어요."
멜로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런데 몇 번 하다 보니 어려운 말이 아니더라고요.
그 후 와이프한테 쑥스러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꽃중년 멜로킹의 실제 러브 스토리
지진희는 <미스티>가 방송되기 전 김남주와 전혜진, 임태경, 이경영, 안내상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을 결심한 이유로 재미있는 대본을 꼽았다. 한 회를 읽으면 그다음 회가 궁금해 미칠 정도로 흥미진진한 내용이 이어지고, 매회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내용이 담긴 대본이라서 출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캐릭터가 모두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요. 모든 연기자가 '그래서 어떻게 되는거지?' '그게 이거였던 거야?'라고 자문자답하며 몰입했어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케빈 리(고준 분)'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하는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거예요. 난봉꾼인 케빈 리는 여러 사람한테 상처를 줬어요. 누가 범인이 돼도 말이 되는 상황이죠. 출연자들끼리도 추리를 많이 했어요. 심지어 태욱의 부모님이 태욱과 혜란을 위해 죽였다는 말도 있었고 케빈 리의 매니저와 '서은주(전혜진 분)'가 불륜이라서 케빈 리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나왔어요."
강태욱을 이해하고 케빈 리를 죽인 범인을 추리하며 촬영한 지진희는 현재 가장 어려운 일로, 범인이 누군지 비밀로 묻어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직전 탈고된 원고를 보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통쾌함을 느꼈지만 막상 범인을 알고 나니 "범인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어렵다고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얼마 전에 대본을 받고 출연자 모두 깜짝 놀랐어요. 저희끼리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어떻게 비밀을 지킬지 고민했어요. 주변에서 범인을 알려달라고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는 상황이에요. 힌트를 드리기도 애매해서 드릴 수 없어요.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보며 시청자의 반응을 살피는데 상상하신 이야기를 보는 게 정말 재미있더군요. 남자 시청자들한테도 인기가 많다고 하던데, 범인이 누구인지 상상할 수 있는 점이 매력으로 통한 것 같아요."
쫄깃쫄깃한 스토리로 인기를 얻고 있는 <미스티>는 작품성으로도 호평 받으며 연일 전국 기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3일 방송된 <미스티> 10회는 시청률 7.8%( TNMS 기준)를 기록했다. 현재의 상승세를 이어가면 JTBC 최고 시청률인 <품위있는 그녀>의 12.1%를 뛰어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지진희는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시청률이 10%만 넘었으면 좋겠어요. 현장에서 "사와디캅"이라고 태국말로 인사해요. 포상 휴가를 받아 '태국 가자'는 의미인데 서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드라마는 혼자 찍는 게 아니에요. 배우와 스태프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어요. 감독님이 결말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봐주세요."
지진희의 바람처럼 태국은 아니었지만 <미스티> 팀은 오는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베트남 다낭으로 포상 휴가를 가게 됐다. 그의 말처럼 모든 이들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한 결과다. 지진희도 마찬가지다. 그의 지난 인터뷰를 엿보면 알 수 있다. 그는 1999년 데뷔해 20년 가까이 연기를 해왔지만 여전히 연기자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해 늘 노력한다고.
"우연히 연기를 시작했는데 연기 실력과 인기가 반비례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어요. 연기자로 성공하려면 지나가던 사람도 되돌아보게 만드는 나만의 무기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아직은 부족하지만 어떤 역할에도 어울리는 백지 같은 느낌의 배우가 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작가와 PD의 생각을 알기 위해 질문을 많이 하죠. 이를테면 제가 맡은 배역은 어떤 인물인지, 이 인물이 왜 이러는 건지, 같은 거요. 드라마를 촬영하다 보면 준비한 것과 현장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다른 경우가 생겨요. 그래서 언제나 열린 사고를 갖추고 현장에 가요. 제 입장을 너무 고집하면 문제가 되거든요. 그런 관성을 깨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어요."
의외의 말이었다. 지진희의 입에서 부족함을 느낀다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좋은 평가에 현혹되지 않으려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언제나 진지한 자세로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냉정하게 자신을 보고 '아직까지 멀었구나' 하면서 채찍질을 해요. 그렇게 해야 끊임없이 노력하니까요.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력이 성장해나가겠죠. 연기는 제가 스스로 평가할 수 없잖아요. 앞으로도 많은 분의 말씀을 듣고 끊임없이 반성하며 노력할 거예요. 좋은 말을 많이 들어서 기분이 좋긴 하지만 현혹되지 않으려고 해요. 단것은 몸에 안 좋아서 분명히 잃는 게 있거든요. 쓰면 짜증나겠지만 그걸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제 몫이니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계속 되새김질을 해요. 연기를 잘 못하니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그렇다고 늘 자신의 부족한 점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단점을 거듭해 생각하면 영원히 단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의 이런 태도가 40대 끝자락에 다다를 때까지 '멋짐'을 유지하는 비결일 것이다.
"항상 단점을 생각하지는 않아요. 매번 단점만 생각하고 의기소침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계속 단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 반면 장점은 반대예요. 계속 생각해서 장점으로 남겨두는 거죠. 그래서 늘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말만 하려고 노력해요. 물론 정말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감정 기복을 줄이려고 하죠. 자기 관리도 생각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 건 한순간이거든요. 나태해지고 쉬고 싶어지는데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나 뛰려는 노력을 해야 해요. 늘 수양을 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 열심히 활동하는 선배들을 보면 저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하셨어요. 선배들을 보면서 전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요."
'기승전–노력'이었던 지진희는 자신의 인생 최고 작품은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끊임없이 노력할 테니 다음 작품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란 것.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채찍질하겠단 말도 덧붙였다. 지진희의 다음 로맨스가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