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도둑놈 도둑님>의 촬영이 모두 끝난 다음 날 그를 만났다. 드라마에서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준희' 역을 맡았던 그는 자리에 앉아마자 "힘든 시간이었다"고 털어놨다. 어쩌면 당연했다. 지난 6개월간 냉소적이고 까칠한 캐릭터로 살았던 그가 아닌가.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김지훈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화끈하고 유쾌했다. 모든 말에 재치를 더하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웃음으로 가득했던 그와의 한 시간.
50부작 드라마, 6개월이라는 시간을 내가 아닌 다른 캐릭터로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이번 작품은 특히 힘들었어요. '한준희'가 감정의 진폭이 큰 캐릭터였고 검사 역할이라 법률 용어도 어려웠죠. 아무래도 제가 지구력이 좀 부족한가 봐요. 중·후반을 지나니까 지치기 시작하더라고요. 일종의 매너리즘이랄까요. 좀처럼 마음을 잡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사히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홀가분합니다.
작품을 하는 중간에도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군요. 정신없는 현장에 있으면 그럴 틈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예요.
작품이 싫다거나 재미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제 성격 문제죠. 처음엔 신나서 하다가 나중엔 '언제 끝나지?'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호흡이 긴 드라마보다 미니시리즈가 잘 맞는 것 같기는 해요. 그렇다고 중간에 포기하진 않습니다. 일이니까 끝까지 해야죠.
이번처럼 연기하면서 지칠 땐 어떻게 극복하나요?
무조건 대본에 의지해요. '대본에 적혀 있는 대로만 하자'는 생각으로 내 안에서 120%를 끌어내려고 하죠. '이 장면은 이래서 이해가 안 되고, 저 장면은 저래서 연기를 못 하겠다'는 식의 딴생각을 하지 않아요. 대본에 써 있는 대로만 하죠. 작품과 캐릭터에 대해 의문을 품는 순간, 더 하기 싫어지고 지치거든요. 전적으로 작가님을 믿고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드라마는 어느새 끝나있기 마련이거든요.(웃음)
이번 작품은 지현우, 서주현, 임주은 등 또래 배우들도 있었지만 장광, 최종환 등 선배 배우도 많았어요. 현장에서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어요?
개인적으로 선배님들의 연기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어요. 최종환 선배님의 그 카리스마, 너무 멋있지 않나요? 다른 배우였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악역을 소화해내는 모습이 충격적이기까지 했어요. 뭔가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달까요? 지현우 씨와는 KBS2 <황금사과>에서 형제로 만난 이후 두 번째예요. 그래서 그런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연기자 서주현으로 변신한 '소녀시대' 서현 씨에 대한 평가도 궁금해요.
연예인에 대한 편견이 있잖아요. '인성이 안 좋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건 가식일 것이다'와 같은 편견요. 연예인인 저도 연예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서현 씨는 그런 편견을 완벽히 깨준 첫 번째 아이돌이에요. 착하고 성실해요. 우리나라 최고 걸 그룹 멤버인데 그 껍데기에 연연하지 않고 늘 배우겠다는 자세로 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죠. 임주은 씨도 도도한 외모와는 전혀 다른 반전 매력이 있어요. 푼수 같을 정도로 순해요.
삶의 낙이 뭐예요?
일이죠. 일이 많으면 힘들긴 해도 카메라 앞에 있을 때가 가장 즐거워요. 물론 잠도 못 자고 끼니를 거를 때도 많고, 관리해야 하는 삶이라 힘들기도 하지만 육체적인 고단함은 잠깐이에요. 늘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일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면서 리프레시되는 느낌이랄까요.
활동이 뜸한 시기엔 조급함도 생기겠어요.
쉬는 기간이 길어지면 스트레스가 시작돼요. 생각해보면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가 10년 전 사무실 계약 문제로 소송이 길어지면서 일을 못 했을 때, 그리고 MBC 드라마 <왔다! 장보리> 이후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2년 정도 공백기가 있었을 때였어요. 저는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거죠. 울더라도 카메라 앞에서 울고, 웃더라도 카메라 앞에서 웃는 배우로 사는 게 좋아요.
연기가 왜 그렇게 좋아요?
늘 새로우니까요. 작품마다, 캐릭터마다, 장면마다 어느 것 하나 같은 게 없죠. 지금 제가 하는 연기와 5년 후 제가 하는 연기가 다를 거라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에요. 5년 후에 나는 어떤 배우, 어떤 김지훈, 어떤 남자가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거든요.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게 좋아요.
그런데 전공은 연기와 무관해요. 심리학을 전공했죠?
공부를 꽤 했어요.(웃음) 반에서 1등도 하고 그랬죠. 호기심이 많은 편인데, 고등학교 땐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특히 제 머릿속이 궁금했죠.(웃음)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며 살까' 하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심리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러다 스무 살 때 우연한 계기로 연기학원에 다니게 됐고, '이거다' 싶은 생각에 배우로 전향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저, 진짜 연기 못했어요. 산 넘어 산이었죠. 그런 면에서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어요. 15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잘해왔다고요.
유행하는 옷을 사 입는 데 돈을 아끼지 않고, 트렌드를 공부 하고, 최신곡은 모두 섬렵하려고 하죠.
물론 유행어도 알아두어야 해요. 배우로서 중요한 일이에요.
배우로서 가장 노력하는 것이 있다면 뭘까요?
감을 잃지 않는 거요. 젊은 감성을 유지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요. 나이 먹어도 젊은 배우이고 싶거든요. 일하다 보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후배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꼰대 선배같은 느낌을 주긴 싫어요. 그래서 유행하는 옷을 사 입는 데 돈을 가장 많이 쓰고, 트렌드가 뭔지 공부도 하고, 최신곡은 모두 섬렵하려고 하죠. 물론 유행어도 알아두어야 해요. 취미생활 중 하나가 음악 방송 다시 보기인데 최근엔 '비투비'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데뷔 초에는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최근 역량을 알아보기 시작한 사람이 많아지면서 인기가 높아졌어요. 그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괜히 뿌듯하고 예쁘더라고요.
최근엔 핼러윈 파티를 즐겼다는 후문이 들려왔어요.
그것도 일종의 감성 유지를 위한 거였죠.(웃음) 오랫동안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빴으니 이제는 좀 놀아도 되겠다 싶기도 했고요. 요즘 친구들은 어떻게 노는지도 궁금했고, 젊은 기운을 받으며 힐링하고 싶었고요. 최근엔 박효신 씨와 볼링을 치면서 젊은이들의 문화를 배웠네요.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면 미모 관리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물론이죠. 저도 내년이면 38살이에요. 물리적으로 늙어가는 건 막을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젊게 살기 위해 꾸준히 관리하고 있어요. 일 년에 한두 번은 피부과에도 갑니다.(웃음) 배우로서 의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나이 먹는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당연하죠. 좋은 점도 있어요. 그만큼 경험과 연륜, 내공이 쌓인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어린 친구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지혜가 있지 않겠어요? 그래도 나이 먹는 게 썩 즐거운 기분은 아니에요. 다만 피할 수 없으니 즐길 뿐이죠. 다행인 건 연기자라는 직업이 나이에 구애받지 않다는 거예요. 나이 들수록 원숙하고 멋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지 젊고 밝은 기운이 느껴져요.
일반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늘 기운 없고 힘들어하더라고요. 저는 이렇게 신나고 즐거운데 친구들은 왜 그럴까 생각해봤어요. 결론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과 기계적으로 일하는 사람의 차이더라고요. 가족 때문에,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친구들을 보면 늘 삶에 찌들어 있거든요. 저는 의무적으로 연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좀 더 젊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뭇 연예인은 이미지 때문에라도 '나이 먹는 게 좋다'고 말하곤 하죠. 그런데 김지훈 씨는 가식 없이 솔직한 모습이 보기 좋아요.
제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워낙 가식 떠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인터뷰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있는 그래도 이야기해요. 때로는 솔직한 게 문제가 되긴 하더군요. 나쁜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요. 가볍고 생각 없는 사람이 되었던 적이 많죠. 아직까지 매체를 통해 받아들이는 대중들에게는 보수적인 시각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제가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실수를 안 할 수는 없겠지만 무척 신중하게 하고 있는 중인데, 오늘은 어땠나요?(웃음)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 성격인 것 같아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마인드의 사람으로 보여요.
평화주의자라서 그래요.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없어요. 여행도 가면 가는 거고, 음식도 먹으면 먹는 거고, 쇼핑도 하면 하는 거죠. 제가 막 찾아서 뭔가를 해본 적이 거의 없네요. 다만 한 가지 확고한 신념을 가진 건 있죠. 사람에 대한 기준인데, 경우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해요. 해야 할 말은 하고 보는 편이고요.
불의를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 지난 겨울 촛불 집회로 이끈 셈이군요?
정치적 성향도 없고, 솔직히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어요. 광우병 쇠고기 사태 당시 시위하는 여대생에게 물대포를 쏘는 경찰의 모습을 본 후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진압 방식이 충격적이었죠. 다행인 건 지금은 정상화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될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연애나 결혼에 대한 기준도 확고할 것 같아요.
결혼 계획을 세워본 적은 없어요. 인연과 운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때를 기다릴 뿐이죠. 아무 여자랑 결혼할 순 없잖아요. 슬프게도 남은 인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진지한 생각이 드는 여자를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네요. 이상형요? 인생 경험이 많아서 속이 깊고 현명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어려도 삶의 지혜가 충분히 느껴지는 성숙한 여자요. 들쑥날쑥한 제 직업을 잘 이해해주는 여자면 더 좋겠고요. 근데 아직까진 결혼이나 연애보단 일이 우선이에요.
배우로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요.
제 머릿속 생각의 80%는 커리어에 대한 생각이에요. 하지만 제 현실을 잘 알죠. 데뷔 15년 차지만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과 아직 멀었다는 것. 그게 제 현실이죠. 배우로서 꿈이 있다면 김은숙 작가님의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로맨틱 코미디와는 어울리지 않는 배우인가 봐요. 자신 있는데 말예요. 앞으로 극복해나가야 할 숙제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영화에도 갈증이 있어요. <신세계>와 같은 느와르,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연기해보고 싶어요.
욕심이 많네요.
더 큰 욕심이 있는데…. 해외 진출이에요. 개인적인 목표랄까요.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니 영어와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웃음) 내년에 그 기회가 오기를 바라봅니다.
"힘들었다"고 토로하는 그의 말을 투덜거리는 것쯤으로 여겼던 게 부끄러워졌다. 배우가 아닌 자연인으로서 김지훈은 이렇듯 꽤나 매력적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