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일행은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집필한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그의 영지 야스나야폴랴나를 시작으로, 단편 작가 겸 극작가 안톤 체호프가 『갈매기』 등을 쓴 멜리호보 집, 모스크바 시내의 푸시킨 박물관, 도스토옙스키 생가 박물관, 『닥터 지바고』의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집 등을 방문했다.
또한 모스크바에 올겨울 첫눈이 오던 날인 23일에는 러시아 건축물의 원형과 진수를 볼 수 있는 모스크바 동쪽의 옛 도시 블라디미르와 수즈달로 달려가 노란 자작나무 단풍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건축물들을 감상했다. 블라디미르의 황금의 문과 우스펜스키 사원, 수즈달의 10세기에 축조된 멋진 크렘린과 아름다운 예수 탄생 성당, 파크롭스키 수도원, 목조 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특히 화려한 외관의 파크롭스키 수도원은 차르에게 버림받은 궁정 여인들이 유폐되었던 곳으로 여인들의 한과 설움이 짙게 배어 있는 듯하였다.
'수즈달 크렘린'도 이곳의 자랑이다. '크렘린(Kremlin)'은 러시아의 '성채' 또는 '요새'를 의미하는 단어로 유서 깊은 많은 도시에 그 나름의 크렘린이 있다.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폴랴나로 가는 길목에 있는 툴라 시에도 견고한 성곽을 갖춘 '툴라 크렘린'이 있었다.
일행은 모스크바에서 4일간의 일정을 숨 가쁘게 마친 후 고속 열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했다. 열차는 쾌적했으며 700km의 거리를 4시간 만에 주파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가 최후를 맞은 푸시킨의 집과 도스토옙스키의 집을 방문했다. 두 곳 모두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에게 유료로 공개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죄와 벌』의 무대인 센나야 광장, 그리보예도바 운하 위의 K(코쿠시킨) 다리,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쓴 집, 라스콜리니코프의 집 등도 둘러보았다. 라스콜리니코프 집 모퉁이에는 외투를 입은 도스토옙스키의 부조가 붙어 있고 그 아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운명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모든 인류를 향해 선을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토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곳 사람들의 삶이 도스토옙스키에게 문학적 토양을 제공해주었다는 설명이다.
일행이 찾아 본 도스토옙스키 박물관과 그의 옛 주거지는 모두 200년쯤 된 4~5층 석조 건물의 일부다. 아직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데 견고해 보였고 그처럼 오래된 건물이란 인상은 들지 않았다. 광장도, 건물도, 골목도 주위 풍경만 조금 바뀌었을 뿐 작품 속에 묘사된 그대로다. 그야말로 생생한 문학의 현장이었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해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많은 문인과 예술인들이 잠들어 있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의 예술인 묘지에도 갔다.
푸시킨 박물관 관람에 앞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에 위치한 푸시킨 시(원래의 이름은 '황제의 마을'이라는 뜻의 '차르스코예 셀로'였으나 1937년 푸시킨 사망 100주년을 맞아 푸시킨 시로 개명되었다. 이곳에 푸시킨이 10대 때 다녔던 귀족 학교 리체이가 있었다)의 호박방으로 유명한 예카테리나 궁전을 방문했다. 또한 저녁에는 미하일롭스키 극장에서 아름다운 발레 <해적> 공연도 관람했다. 이번 여정의 마지막 코스는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불리는 에르미타주 박물관 관람이었다.
이번 '러시아 문학 기행'에는 시 '사평역에서'로 유명한 곽재구 시인과 한상완 시인(전 연세대 부총장), 가곡 작사가로도 잘 알려진 황여정 시인 등 문인을 비롯해 교수, 변호사, 러시아 문학 애호가들이 참가했다. 현지에서는 박정곤 전 고리키문학대학 교수가 일정 내내 함께하며 심도 있는 해설을 들려주었다.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 문화의 향기 속에 흠뻑 젖었던 바쁜 여정을 마치고 일행은 26일 밤 11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6시간 시차이므로 한국 시간은 27일 새벽 5시다. 올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떠나는 국적기였다. 인천공항에는 9시간 만인 이날 오후 2시경 도착했다.
한편, 한상완 시인은 귀국 후인 11월 1일 서울 서초문화원에서 열린 '심상문학 만추 시 낭송회'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푸시킨 집 방문 후에 쓴 '다시 시인에게'란 제목의 시를 발표했다. 한 시인은 낭송에 앞서 "푸시킨이 세상을 떠난 그 조그만 방에 서니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다시 시인에게 - 우강(友江) 한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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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수많은 이들에게
세대와 세대
나라와 나라로 이어
가슴 흔드는
기쁨과 슬픔으로
영혼에 스며왔던 이
푸시킨 시인이여
사랑하는 이의 명예
그리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담보한 결투에서
치명상으로 젊디젊은
생애를 마감해야 했던 그대
두 세기의 시공(時空) 넘겼지만
여기 이 작은 방에
숨이 잦아들며 이틀간
생사를 넘나들며 고통을 감내했던
작은 소파는 방 한켠에
그대로인데
푸시킨
그대는 어이
재회할 수 없는 나라로
떠나셨나요. -
아 위대한 시혼을 지녀
그대가 남긴
불후의 시편들은
그대를 흠모하고 잊지 못하는
세계인의 가슴마다
애모의 정으로 꺼지지 않고
타오르건만…
그대가 훌훌히 하직했던
이 쓸쓸한 방 앞에 서니
울컥 그 고결한 소리가
낭낭하게 들려옵니다.
'사람들의 사랑에 연연하지 말라
열광과 칭송은
잠시 지나가는 소음일 뿐' *
짧디짧은 생애의 젊음을 뒤로하고
극통의 비애를 남기고
이승을 훌훌 떠난 그대여
덧없는 삶에 연연하는 이에게
속삭여 들려주는
영혼을 일깨우는
시의 무지개는
아직도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는데
어이 그대는 침묵으로 시인들을 맞고 있음인가요.
우리 가슴에 가득한
애모의 시와 슬픔을 흠향하소서.
그대를 향한 애끓는 순전함과
사랑을 받으소서. -
못다 펼친 그대의
삶과 사랑과 시혼이
너무 아까워
가슴 서려하는
한 영혼의 슬픔과 애통을
그대에게
조용히 바치올 뿐입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시인에게'에서
2017년 10월 2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푸시킨 박물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