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원은 대중에게 알려진 가수 출신 배우들이 덜컥 주연부터 맡는 것과 달리 단역과 조연을 거쳐 천천히 연기력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유희진’을 만났다. 무려 남자 주인공의 첫사랑. 이 작품을 통해 정려원은 ‘려원 신드롬’을 일으켰다. 가녀린 몸매에 무심하지만 스타일리시한 차림새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첫사랑 ‘희진이’에게 빙의한 그녀는 그렇게 완전한 배우가 됐다.
그 이후 출연 작품마다 ‘정려원의 재발견’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다시 <내 이름은 김삼순>의 ‘희진이’로 돌아갔다. 그녀의 인생 캐릭터는 ‘희진이’였던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희진’을 뛰어넘는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 바로 KBS2 드라마 <마녀의 법정>의 ‘마이듬’이다. 정려원은 여성아동범죄전담부가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그린 <마녀의 법정>에서 출세욕에 사로잡혀 속물 근성을 보이는 사고뭉치, 하지만 능동적으로 사건을 읽고 판단하며 하고 싶은 말은 하는 검사 ‘마이듬’ 역을 맡았다. 시청률 10%를 넘기 힘들다는 드라마 분야에서 시원하게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했고, 연기력 또한 인정받았다.
“아직까지 기쁨에 취해 있어요. 2017년이 끝날 때까지는 <마녀의 법정> ‘마이듬’을 만나 얻은 행복의 기운을 유지하려고요. 연기에 대한 칭찬을 많이 받아서 행복했어요. 아무래도 배우니깐요. 심혈을 기울이면 화면으로 보인다는 생각에 뿌듯했죠.”
하지만 정려원은 ‘마이듬’을 처음 만났을 때 반가운 동시에 두려웠다.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어 즐거웠지만 자신의 성격과 다른 인물을 표현하는 것이 걱정됐다.
“너무 좋은 캐릭터라 욕심이 났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컸죠. 그래서 처음 미팅 때도 ‘100% 자신이 있진 않다’고 말했어요. 사실 ‘마이듬’과 저는 많이 다르거든요. ‘마이듬’은 기분이 나쁘면 술을 마시고 다 잊는 타입이지만 저는 글로 적거나 그림을 그리며 풀거든요. 하지만 <마녀의 법정>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자신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최선을 다했어요. ‘마이듬’을 연기하다 보면 그런 대찬 모습을 닮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정려원은 자신은 하고 싶은 말을 곧바로 내뱉는 경우가 거의 없는 편이라 ‘마이듬’을 연기하기가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주변에 ‘마이듬’처럼 ‘사이다’ 발언을 하는 친구가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주인공은 온스타일 예능 <살아보니 어때?>에서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여행을 떠났던 친구 임수미 씨다.
“수미가 ‘마이듬’이랑 똑같아서 참고했어요. 한번은 인터넷에서 가격을 찾아보고 공구를 사러 갔는데 주인아저씨가 가격을 높게 부르더라고요. 속으로 의심을 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죠. 그런데 같이 갔던 수미가 인터넷에서 싼 금액을 찾더니 ‘아저씨, 이 언니 연예인이라고 더 받는 거 아니죠?’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속이 정말 시원했죠. 그래서 대본을 받고 수미한테 대본 리딩을 시켜봤어요. 그리고 수미가 하는 말들을 대사로 해봤더니 잘 붙더라고요. 극 중에서 했던 ‘미쳤나봐’ ‘정색하지 마, 쪽팔리니까’라는 대사도 실제로 수미가 쓰는 말투예요. 그러다가 ‘아, 이듬이는 서브 텍스트를 말로 하는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만 하고 말로 하지 않는 걸 ‘마이듬’은 곧바로 말하는 거죠. 수미는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똑같다는 거야?’라고 이야기했지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절친의 도움 덕분인지 ‘마이듬’에 완전히 빙의했다. 현장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연기하고 사라지던 정려원이 ‘마이듬’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현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현장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출연자 한 명 한 명이 돋보이게 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녀의 그런 노력 덕분에 한 장면에서 뒷모습만 노출될 예정이었던 배우의 얼굴이 화면에 나오기도 했다. 그 주인공은 ‘구석찬’ 계장 역을 맡은 배우 윤경호다.
“제가 구 계장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신이었어요. 원래는 제 표정만 나오고 구 계장님은 뒷모습만 나오는 장면이었죠. 뒷모습만 나오지만 구 계장님이 절 배려해서 열심히 연기를 하셨는데, 구 계장님 표정이 너무 웃겨서 웃음을 못 참겠는 거예요. 그래서 ‘깔깔깔’ 웃으면서 잠시 쉬어가자고 했어요. 그러곤 현장 스태프들한테 한번 보라고 하면서 구 계장님 표정도 카메라에 담자고 했어요. 그래서 구 계장님이 방송에 나오게 된 거예요. 구 계장님도 살고, 장면도 살고 여러모로 좋았죠.”
정려원은 현장 분위기를 밝고 활기차게 만드는 것을 넘어 섭외에도 열정을 기울였다. <마녀의 법정> 최종회에 카메오로 등장한 배우 임창정을 직접 섭외한 것. 그녀의 노력으로 임창정은 지난 1999년 KBS1 드라마 <세리가 돌아왔다> 이후 18년 만에 지상파 드라마에 출연했다. 하지만 그녀가 애초 생각한 카메오는 남자 주인공 ‘여진욱’으로 분한 배우 윤현민의 여자친구인 백진희였다.
“처음엔 백진희 씨를 출연시키자고 했어요. 저희 드라마 후속작인 <저글러스>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현민이와 연인 사이니까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현민이가 진희 씨가 드라마 촬영으로 너무 바쁜 상황이라면서 거절했어요. 여자친구를 배려한 거죠. 대신에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창정 오빠를 부르고 싶다고 하길래 연락을 했는데 창정 오빠가 바로 ‘콜’이라고 하시더니 제주도에서 올라오셨어요. 촬영 이틀 전에 말씀드렸는데 흔쾌히 수락하시곤 다음 날 아침에 올라오신 거예요. 정말 감동이었죠.”
예민하고 소심해요
<마녀의 법정>이 방영되던 중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려원은 “‘마이듬’을 닮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마이듬’이 아닌 실제 그녀는 외향적이기보다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타입이기 때문이다.
“제가 사실은 되게 예민하고 소심해요. 이번 작품을 연출하신 김영균 감독님이 저랑 성격이 비슷해요. 김 감독님은 제가 연기를 하면 조용히 지켜보세요. 제가 생각하기엔 다 된 것 같은데 지켜보시니까 뭔가를 더 하게 돼요. 어떤 때는 왜 그렇게 대사를 했는지 물어보세요. 그러면 ‘왜 물어보시지? 내가 틀렸나?’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연기 스타일로 다시 촬영을 해요. 생각을 하면서 연기하는 거죠. 나중에 편집된 장면을 보면 ‘이렇게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했던 것이 정답인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전 김 감독님이 바로 디렉션을 주시지 않는 이유를 알아요. 제가 민망할까 봐 그러시는 거죠. 저도 그런 편이거든요.”
하지만 정려원은 일할 때는 밝은 분위기가 좋아 현장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한단다. 현장이 밝아야 자신이 가진 것이 100% 이상 발휘되기 때문. 하지만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라면 현장 분위기를 주도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터. 그런 부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착한 심성을 드러냈다.
“혼자 있을 때는 저 자신으로 있지만 일할 때는 아니에요. 저 혼자 일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분위기가 있죠.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춰요. 걸 그룹처럼 군무를 추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음악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대로 추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아니면 그림을 그려요. 제가 그린 그림에 제 마음이 담겨 있는 셈이죠. 그림을 그리면 선물로 줘요. 소속사 이사님께도 드리고 친구인 예슬이랑 담비한테도 줬어요.”
나의 친구들
정려원이 언급한 한예슬과 손담비는 그녀의 절친. 특히 한예슬은 <마녀의 법정>과 동시간대 방송된 MBC 드라마 <20세기 소년소녀>에 출연해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두 사람은 첫 방송 때 시청률이 더 많이 나오는 사람이 모든 여행 경비를 지불하는 내기를 한 상태. 결과는 정려원의 승리로 두 사람이 어디로 여행을 갈지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린 상황이다.
“여행지는 비밀이에요. 저희 둘이서만 알고 있으려고요. 지금 예슬이가 로마에 있어 귀국하면 여행지를 골라서 가기로 했어요. 예슬이는 추위를 많이 타는데 전 더위를 많이 타서 적당한 나라를 골라야 할 것 같아요.”
친한 친구인 정려원과 한예슬은 경쟁을 하고 있지만 서로의 연기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정려원은 드라마 촬영 중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한예슬에게 전화해 고민을 토로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한예슬이 한없이 사랑스러운 친구라고 덧붙였다
“예슬이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친구예요. 그 모습도 사랑스럽죠. 첫 방송이 끝나고 인스타그램에 예쁘다는 칭찬만 있다는 글을 남긴 것도 솔직하기 때문이에요. 당시 저한테 ‘너는 연기에 대한 칭찬만 받아서 좋겠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연기로 칭찬받고 싶었는데 외모 이야기만 나와서 아쉬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도 모두 예슬이가 솔직하기 때문에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거예요.”
절친 한예슬의 칭찬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레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정려원은 한예슬을 비롯해 손담비, 소이, 심은진, 공효진 등과 가깝게 지내며, 멤버의 생일 때마다 독특한 콘셉트의 파티를 열고 있다. 내로라하는 미녀들이 모여 독특한 패션 감각을 자랑하다 보니 파티 사진이 공개될 때마다 화제가 되고 있다. 이 파티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소이는 아이디어가 많아요. 생일 때마다 어글리 스웨터 파티를 했어요. 빈티지 의상을 구할 수 있는 동묘에서 엄청나게 못생긴 스웨터를 구해 입고 가야 돼요. 그리고 누가 가장 못생겼는지 뽑아 상을 줘요. 대단한 상은 아니고 스탬프를 찍어주는 게 다예요. 그렇게 시작됐죠. 지난 제 생일에는 작업실에서 잠옷 파티를 했어요. 제 생일이 1월인데 당시 작업실 히터가 고장 나 너무 추워서 다들 점퍼를 껴입고 놀았죠. 생일인 사람이 콘셉트를 정하는데 이제는 어떤 콘셉트로 파티를 할지 다들 기대하는 눈치예요.”
이렇게 친구들과 재미있게 노는 덕에 정려원은 외로울 틈이 없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결혼 적령기가 지났음에도 결혼에 대한 생각은 크게 하지 않고 있다.
에단 호크를 좋아해요
“결혼은 놓은 것 같아요.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많으니까 우리끼리 놀러 다니는 게 재미있어요. 만약에 누군가 결혼을 하면 현실로 다가오겠죠? 그냥 언젠가는 할 거라고 생각해요. 결혼을 숙제처럼 여기면 하기 싫어질까 봐 생각하지 않기도 해요. 아이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결혼은 나이를 떠나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결혼을 빨리 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있었다면 27살이나 28살에 했을 거예요. 17살 때 막연하게 24살에 결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나이에 저는 가수를 그만두고 배우로 오디션을 보러 다녔어요. 결혼 생각을 할 틈이 없었죠. 그러다 보니 나이를 먹어서 ‘33살쯤에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도 일을 했어요. 이제는 그냥 ‘나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결혼보다 현재를 즐기는 것이 좋은 정려원의 이상형이 궁금했다. 누구냐고 묻자 단박에 영화 <비포 선셋>으로 많은 여성을 설레게 한 배우 에단 호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단 호크를 좋아해요. 작품도 다 보고, 저서도 다 읽었어요. 특히 영화 <청춘 스케치>에 나오는 에단 호크의 눈빛은 빠져들 수밖에 없죠. 작품마다 찌질하다가, 현실적이다가, 멋지다가 하는데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는 배우 같아요. 아, 히스 레저도 좋아해요.”
정려원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지만 결국 결혼은 타이밍이라며, 자신에게 결혼은 아직 먼 이야기라는 뜻을 내비쳤다.
정려원은 여성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깬 ‘마이듬’처럼 틀을 깨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연기를 정통으로 배우지 않았기에 정해진 것을 넘어서는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고. 그녀의 말이 맞다. 아직 정려원에겐 배우로서 보여줄 모습이 너무나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