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은 2010년, 전성기의 한가운데에서 돌연 자취를 감췄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이유로 약 7년을 쉬었다. 이쯤에서 이수영의 노래를 다시 들어봤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애절하다. '라라라' 'I Believe' '얼마나 좋을까'…. 한 구절 한 구절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간간이 얼굴을 내비치다가 모바일 게임 OST '묻는다'를 부르면서 활동의 기지개를 켠 이수영을 만났다. 카메라 앞에선 신중하고 조심스러워했지만, 카메라 불빛이 꺼지자 털털하고 소박한 자연인 이지연(이수영 본명)으로 돌아왔다. 일과 일이 아닌 것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그녀, 이수영이 여전히 독보적인 이유다.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섰어요. 촬영 전 의상을 꼼꼼히 체크하고 포즈 연습을 해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더군요.
사진 찍는 걸 좋아해요. 집에서 재미 삼아 혼자 포즈 연습을 하기도 하죠. 오랜만에 화보 촬영을 하니까 힐링이 되는 기분이라 더 신나게 촬영했어요. 거의 매일 집에서 살림만 하다가 가끔 이런 촬영 현장에 오면 리프레시가 되거든요.
최근 모바일 게임 OST '묻는다'를 발표했어요. 본격적인 활동을 앞두고 고민하는 부분이 있나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있는 그대로 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해요. 예전에는 앨범마다 콘셉트가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됐었는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노래할 때 처연한 모습을 많이 보여드려서 그런지 제가 여성스러운 줄 아는 분이 많은데 저 그렇게 여성스럽지 않거든요. 집에선 아줌마, 엄마, 아내 그 자체죠. 저다운 모습, 자연스러운 모습, 편안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너무 오랜만이라 뭐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이수영이라…. 가장 이수영다운 건 어떤 모습인가요?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게 가장 저다운 모습이에요. 여성스러워 보이는 것도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낸 이미지거든요. 지난 7년간 가정에서 엄마, 아내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도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 때문인 것 같아요.
우_체크 무늬 코트 브라켓디바이, 레드 컬러 반팔 니트 톱·블랙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육아와 내조에 집중하면서 복귀에 대한 갈증은 없었나요?
아들을 낳고 초반 몇 달은 '일하고 싶다'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저도 육아가 처음인지라 무척 어렵고 힘들었거든요. 출산 후에도 조금씩 활동을 하긴 했지만 제게 복귀나 활동보다 더 중요한 건 가정이었기 때문에 육아와 내조에 집중했어요. 아이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게 제 주요 임무였죠. 간혹 온전히 육아와 내조에만 힘쓴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단언컨대 후회하지 않아요. 아들이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까요. 이제는 남편도 복귀를 응원해줘요. 아들이 이제 7살이라 곧 초등학교에 가니까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나 봐요.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간섭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게 됐어요. 아들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고요.
톱 여가수의 삶을 살다가 한순간에 '아내' '엄마'가 됐을 때. 대중에게 잊힌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활동이 뜸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잊혔는데, 후배들에게 밀린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빨리 나가 일해야 하나?' 하는 조바심도 있었죠. 그런데 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잊히지 않을 자신이 생기더라고요. 아직도 '가수 이수영'을 기억하고 기다려주는 분이 많다는 걸 알았고, 무엇보다 이제는 잊히고 싶어도 잊힐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만약에 가수를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다른 무슨 일을 해서라도 삶을 이어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과거에 화려했던 '이수영'은 사라지지 않잖아요. 결국엔 또 '이수영'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조바심 내지 않기로 했어요. '언젠간 기회가 올 거야' 하면서 때를 기다렸죠.
하지만 그때 그 환호, 함성은 그리울 것 같아요.
물론 팬들의 사랑, 화려한 이력, 수많은 상패는 그립고 감사해요. 그렇지만 그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몸과 마음이 무척 힘들었던 시기거든요. 데뷔 후 11년 동안 9장의 앨범을 냈어요. 그사이 각종 공연, 행사, 방송 활동 등 쉴 틈이 없었죠. 쳇바퀴 굴리는 듯한 생활 속에서 '이지연'은 없었어요. 바닥이 드러나 더 이상 퍼 나를 게 없을 정도로 고갈된 상태였거든요. 지금의 제가 그때의 이수영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대충 해도 된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라고요. 요즘 들어 한창 예뻤을 나이인 20대 때 좀 더 즐기지 못했다는 건 아쉽게 느껴져요. 왜 그렇게 '힘들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는지…. 바쁘면 바쁜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그 순간을 즐겼으면 좀 더 행복했을 텐데 말예요.
어쩌면 결혼과 육아가 이수영에겐 충전의 시간이 됐겠네요.
남편은 슬럼프에 빠져 있는 저를 구해준 사람이에요. 결혼 후 마음이 안정됐고 여유가 생겼죠. 날카로웠던 마음이 진정되고 활동 당시엔 어려서 몰랐던 감정을 배웠어요. 허공에 붕 떠 있던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었달까요? 엄마로, 아내로, 그리고 온전히 이지연으로 살면서 재충전할 수 있었던 지난 시간에 감사해요.
쉼이 필요한 시기에 남편을 만난 셈이네요.
제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의 도움 없이 혼자 모든 걸 일구고 동생들을 키워야 하는 가장 역할을 해온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래서 '아내' '엄마'라는 역할이 주어졌을 때 마냥 행복했어요. '앞으론 내가 가장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이기적인 안도감이랄까요? 물론 가장의 무게를 누구보다 느끼며 살았기 때문에 남편이 얼마나 힘들지도 잘 알아요. 그래서 우리는 부부 싸움이 적어요. 남편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힘든지 저는 다 이해되고 공감되거든요.
결혼이 물론 좋은 점도 많지만 여자라서 희생이 강요되는 부분도 있죠.
누가 제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한 건 아니었어요.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내가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게 있었죠.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 사랑이죠.
한편 생각해보면 연예인의 남편으로 사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가장 쉬운 예로 취침 시간부터 완전히 달랐거든요. 저는 새벽 5시가 돼야 겨우 졸린 정도인데, 남편은 그 시간이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아내가 가수 이수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편한 점도 많았겠죠. 이제는 서로 많이 적응된 것 같아요. 점점 라이프스타일도 맞춰지고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도 비슷해지고 있으니까요.
우_체크무늬 코르셋 재킷 블랑이브, 베이지 컬러 니트 원피스 앤클라인.
아들에겐 어떤 엄마인가요?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같은 엄마는 없을 거야'라고 자신했는데, 요즘엔 부족한 엄마라는 것을 느껴요. 아이가 주관이 생기고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겼더라고요. 매일 회사로 출근하는 아빠, 매일 유치원으로 등원하는 본인 사이에서 저는 집에서 할 일 없이 노는 엄마였던 거예요. 처음엔 서운했어요. 이제부터라도 나도 일하고 있다는 걸 좀 보여주면 아이가 저를 '좋은 엄마'로 생각해주지 않을까요?
아들을 방송이나 언론에 공개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없어요. 남편과도 많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본인 인생은 본인이 결정하도록 할 거예요. 엄마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유명세를 치르고 불편을 감수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아요. 물론 유혹은 많았어요.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육아 프로그램 섭외도 많았고, 그걸 하지 않으면 방송하기 힘든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었죠. 그래도 한번 출연하면 영원히 자료로 남을 텐데…. 아들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방송에 노출시키는 것은 자제할 거예요.
만약에 아들이 연예인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요?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할 거예요. 제가 나서서 도와준다거나 길을 열어주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저도 부모님의 도움 없이 온전히 제 힘으로 일군 거니까요. 아들도 경쟁에서 이겨보기도 하고 져보기도 해야죠. 자기 인생을 책임지게 될 직업을 구하는데 부모가 나서서 도와주는 게 궁극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아들이 어떤 청년으로 성장하길 바라나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가 됐으면 해요. 요즘 아픈 사람이 많잖아요. 특히 정신적으로요. 물질 만능 주의, 개인주의 사회지만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소신과 주관이 뚜렷한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누군가에게 힘이 돼줄 수 있는 건강한 사람, 무엇보다 품위 있는 청년으로 자랐으면 해요.
그런 청년으로 만드는 덴 엄마 이수영의 역할이 중요하겠죠?
우리 엄마가 저를 키웠듯 그렇게 사랑으로 키울 거예요. 요즘 아들을 위한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아이의 마음을 잘 읽어줄 수 있을까'예요. 자기 전에 매일 성경을 읽어주는데 그때마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죠. "오늘 엄마는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러이러해서 많이 속상했어. 그래도 우리 아들이 있어서 괜찮아." 이런 식으로 먼저 말하면 아들도 종알종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고 감정을 털어놔요. 요즘 우리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게 돼서 좋고, 또 착하고 귀여운 아이로 크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안심이 돼요.
따뜻하고 포근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아요. 이제 곧 마흔 살이 될 텐데, 이수영의 불혹은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요?
마흔에 걸맞은 인성을 갖춘 이수영이 되길 바라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소중함을 최근에야 알게 됐거든요. 이 자리를 빌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며 저를 응원해준 (박)경림이와 중학교 동창으로 인연을 맺은 (김)유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쉬는 기간에 두 사람에게 의지를 많이 했거든요. 물론 최근에 다시 일을 시작하며 새롭게 알게 된 좋은 사람도 많아요. 앞으로는 '내 사람'에게 좀 더 베풀며 사는 따뜻한 사람이 될 거예요. 그리고 쉰 시간만큼 활동도 열심히 할 거고요. 체력과 시간이 될 때마다 차곡차곡 활동할 테니 지켜봐주세요.
인터뷰 후 이수영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분주한 촬영 현장 속에서 힐링이 됐다는 메시지였다. 짧은 내용이었지만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졌다. 단언컨대, 이수영의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