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 데님 오버올 N21, 화이트 샌들 솔앤로와.
김가연 옐로 체크 쇼츠 헤이스토리 by 캐쉬스토어, 데님 팬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신발 모노바비 by 모노톡시.
그 흔한 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가연은 그렇다. "사랑을 줄 때 저는 행복해요. 나니까 남편에게 해줄 수 있는 그런 느낌, 그게 저는 좋아요." 기자가 본 그녀는, 따뜻한 사람이다. 의외로 순수해 때로는 눈치가 없기도 하다. 한데 그 모습이 밉지 않다. 그녀는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이 꺼려하는 속내와 소신을 주변 의식하지 않고 말할 뿐이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린다. 그녀는 그 선입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모르는 사람들까지 신경 쓰며 사는 삶,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런 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녀의 삶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예쁜 외모를 가진 부잣집 딸이 20대 초반에 결혼, 이혼 그리고 출산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단단해졌을 테지만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도 있을 것이다. 연예계에 데뷔했고, 당시 소속사는 굳이 '과거'를 밝히길 꺼려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데뷔 전의 사생활이 세상에 공개됐고 그녀는 단단해져야 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을 때 다짐했다. 두 번째 결혼은 내 인생에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챙겨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사연 많은' 재혼 후 남편을 닮은 아기를 낳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 4년의 시간 동안 천국과 지옥을 부단히도 오갔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둘째 딸을 낳았다. 2년 전 그녀 나이 44살 때다.
어릴 때 '철딱서니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러다가 가족이 생기고, 가족을 지켜야 하기에 드세졌어요.
남편은 타고나길 유순한 사람이라 싸움 자체를 안 해요.
악역은 제가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저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버틸 만해요.
막둥이까지 생기니 더 힘이 나요. 못 할 게 없어요 저는.
아기와 하는 촬영은 늘 힘들다.(웃음) 막둥이의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귀여워 죽겠어요. 남편이 "아빠, 아파" 라고 하면 "아빠, 힘내!" 이래요. 태교를 하면서 입덧이 심해 일부러 TV를 켜놓고 지냈어요. 리얼리티 프로그램부터 미국 좀비 드라마까지 다양하게 봤는데, 그 영향을 받아 말이 빨라요. 첫째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 해요. 선배 입장에서 재능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몸매가 튼튼해요.(웃음)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라 응원은 하지만,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대본 리딩이나 오디션을 갈 때 메이크업 정도는 해줄 수 있지만, 본인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훨씬 많죠.
여자끼리 하는 말이지만, 옷 갈아입을 때 볼륨 있는 몸매를 보고 말았다. 의외였다.(웃음) 너무 숨겨서, 그 부작용으로 등이 굽었어요. 숨긴다기보다 사람들이 제 몸매에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냥 작고 마른 여배우 정도? 하지만 대기실을 같이 쓰는 사람들과 우리 남편은 알지요.(웃음) 아이를 낳기 전엔 군살도 셀룰라이트도 없었는데, 이제는 한계를 느껴요. 제가 그런 말을 하면 주변에서 "어린 남편이랑 사는데 관리 좀 해"라고 하지만, 우리 남편도 신경 안 써요. 총각 시절에 비해 배도 나오고 옆구리 살도 포동포동하게 올랐죠. 몸매 뜯어먹고 사나요?
큰딸과 아빠의 관계도 궁금하다. 사춘기에 겪는 엄마의 재혼,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성품이 저와 많이 달라요. 만약 저였다면 거친 사춘기를 보냈을 텐데, 큰딸은 순종적인 아이죠. 감사하게도 남편과 성격도 취향도 닮았어요. 밥 먹는 취향, 집에서 쉬는 취향…. 둘 다 느릿느릿해요.
같이 다니면 자매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 식당 아주머니들이 딸에게 "언니를 많이 닮았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죠. 동안이라는 게 배우로서는 좋지만은 않아요. 내 나이대 동료 배우들은 '엄마' 역할을 하지만 저는 어색하잖아요. <응답하라 1988>의 이일화 씨도 엄마 역할을 하고 있고, 나보다 어린 라미란 씨도 엄마 역할을 하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해요.
덕분에 8살 연하의 남편을 얻지 않았나? 그건 제 능력이죠.(웃음)
22개월 된 늦둥이 키우는 재미는 어떤가? 뭐라고 해야 하나…. 다시 태어나도 임요환 씨와 결혼해야만 할 것 같은? 남편과 결혼해야 하령이가 태어날 테니까요. 제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가 20대 초반이었어요. 그때는 멋모르고 키웠고, 엄마가 많이 도와주셔서 잔재미를 몰랐죠. 그런 부분에서는 큰아이에게 미안해요. 하령이를 키워보니 소소한 행복을 알겠더라고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죠. 큰딸이 엄마 맘을 조금은 알 거라고 생각해요.
44살에 딸을 얻었다.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다. 힘든 정도가 아니고, 내 모든 걸 토해서 낳았다는 말이 맞아요. 어지럼증이 생겼어요. 걸어다닐 때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현기증이 나서 운전도 못 하고, 마트에 진열된 물건들 사이로 걸어다니는 것도 힘들 정도예요. 휴대폰도 오래 못 들여다보지만, 그래도 저는 행복합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임신하기까지 속앓이가 많았다고 들었다. 시험관 시술을 하는 4년 동안 속앓이를 했죠. 두 번 유산했고, 그 스트레스로 생리불순까지 왔지요. 너무 조바심이 생기더라고요. 예전에 어린아이를 보면 "아, 예쁘다" "나도 곧 생기겠지" 했는데 나중엔 아이들을 보기도 싫었고, 임신부를 보는 것도 싫었어요. 불임으로 고통 받는 많은 분이 느끼는 솔직한 감정일 거예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나? 그럴 때마다 남편을 닮은 아이를 상상했어요. 그러면서 '인터넷 카페'의 글들을 보고 위안을 얻었어요. 저와 비슷한 상황을 겪는 사람들, 비슷한 시기에 병원을 찾은 후기들, 그 끝에 임신에 성공한 예비 엄마들의 글을 보며 용기를 얻었죠.
수많은 노산·불임 부부에게 조언을한다면? 가장 중요한 건, 하체가 따뜻해야 해요. 혈액순환이 잘돼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저는 38~40℃ 정도로 물 온도를 맞춰 족욕을 꾸준히 했어요. 2달 정도 하니까 기초체온이 올라가더군요. 그전에는 한약부터 좋다는 영양제 다 먹었는데 크게 효과를 못 봤어요. 먹는 걸로 치면 단백질이 중요해요. 전 전복을 계속 먹었어요. 홈쇼핑에서 주문해 손질을 한 다음 청주 한 숟가락을 넣고 조물조물해서 스팀기에 쪄 그대로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먹을 때마다 버터로 살짝 구워 소금에 찍어 먹었어요. 동물성 단백질보다는 식물성 단백질을 추천합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기분이 어땠나? 평상시 임신 테스트기 결과를 볼 때마다 내 눈엔 희미한 두 줄로 보이는 거예요. 매직아이처럼 말이죠. 그만큼 절박했거든요. 그날도 그랬어요. 근데 이번엔 남편까지 희미하게 두 줄로 보인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몇 시간 간격으로 확인을 했는데, 선이 점점 진해지더라고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몸이 허약하고 노산이라 이런저런 검사를 많이 해야 했어요. 검사 결과 수치가 정상을 벗어나면 그때부터 환장하는 거죠. 주사를 너무 맞아서 몸에 알레르기가 나고 살이 딱딱해지는 것도 예사였죠.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버텼어요.
큰딸이 마흔 살이 되면 둘째가 스무 살이에요.
아직은 어리지만 그때는 서로 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나이 많은 엄마라 이런저런 걱정이 앞서요.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눈물이 나오죠.
"엄마가 없어도 네가 하령이를 잘 보살펴야 해."
"엄마가 없어도 아빠가 너를 잘 보살펴줄 거야." 큰딸에게 늘 하는 말이에요.
출산하던 날, 기억나나? 온 식구가 5분 대기조였죠. 남편이 기다리던 영화 <미션 임파서블>이 개봉하는 날이라 남편과 큰딸이 극장에 간 후 10분 뒤에 양수가 터진 거예요. 아직 기다릴 만하겠다 싶어 친정엄마와 짐을 다 싸놓고 영화 끝나기 5분 전에 문자를 보냈어요. 딸 말로는 남편이 8층 극장에서 1층까지 <미션 임파서블>의 한 장면처럼 뛰어 내려가더래요. 여차여차해 수술실로 들어가는데, 처음이 아닌데도 무섭더라고요. 괜히 눈물을 보일까 봐 남편 얼굴을 못 봤어요. 근데 막상 수술실에 들어가니 후회가 되더라고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남편 얼굴을 보고 올걸, 지그시 쳐다만 봐도 내 마음을 알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어요. 수월치 않은 수술이어서 꽤 오래 남편이 기다렸고, 눈을 떴는데 간호사가 아기 사진을 주는 거예요. 근데 너무너무 아파서 아기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진통제를 달라고 흐느껴 울기만 했던 것 같아요. 언뜻 본 사진 속 우리 아기는 수북한 털에 싸여 있었는데, 남편이 태어났을 때도 그랬대요.
조금 이른 출산이라고 들었다. 미숙아를 낳았어요. 저는 퇴원해도 아기는 퇴원을 못 하니까, 산후조리원에 있으면서도 아침저녁으로 면회를 갔죠. 아기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몇 주만 더 품어줬으면 아기가 힘들지 않을 텐데…. 너무 작은 아기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시술을 받는다는 자체가 미안했어요. 아들 하나를 더 낳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출산의 과정을 겪으며 아이에게 죄를 짓는다는 생각에 포기했어요. 엄마가 튼튼하지 않아서 아이를 오래 못 품어준 죄책감이 내내 들었죠.
산후조리원이 화제가 됐었다. 전지현보다 '2백만원' 비싼 조리원이라던데. 지금 생각해도 저는 돈이 아깝지 않아요. 제가 큰애를 한겨울에 낳았는데, 출산하고 바로 학교에 복학했죠. 산후풍이 와서 이후 수년을 퉁퉁 부은 채로 고생을 했어요. 그때 어른들이 그러셨어요.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생긴 병은 이후 출산 때 산후조리를 잘하면 낫는다고요. 그래서 정말 잘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예전보다 몸이 더 좋아졌고요.
연하남과 시부모의 마음을 훔친 비결도 궁금하다. 남편의 직업은 '마이웨이' 직업이에요. 여자를 위해 신경 써주고 배려해주는 게 불가능하죠. 머릿속엔 늘 게임 전략밖에 없어요. 다행인 건, 저도 게임을 좋아하고 그런 남편을 더 좋아하고….(웃음) 최적화된 여자친구였죠. 시부모님요? 딴 거 있나요. 아들 잘 챙겨주는 게 최고죠. 맘 편하게 게임을 할 수 있게 매니저 역할부터 연습 상대 역할까지, 그리고 음식까지 열심히 날랐죠. 나이 차가 있어서 그렇지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않나요?
'철벽녀' 김가연의 마음을 훔친, 남편 임요환은 어떤 남자인가?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웃음) 가족을 데리고 주말에 나들이를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이에요. 직업 자체가 그래요.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선택해줘 고마움이 있죠. 실제로 남편은 결혼 초반에 결혼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어요. 해외에 자주 다니며 가족의 소중함을 느낀 것 같아요. 요즘은 제가 시키지 않아도 육아를 꽤 잘 도와줘요. 남편이 변해가는 것조차 제겐 소소한 행복이에요.
내조의 여왕이다. 나 이렇게까지 해봤다! 남편이 해외 일정이 많아요. 음식이 중요한데, 예를 들어 미니 밥통을 싸 가고, 김치 양념을 얼려 가서 현지에서 김치를 담가 주죠. 남편은 늦게까지 일을 하니까 호텔 조식을 못 먹어요. 그런 남편을 위해 해외 어느 곳에서도 집밥처럼 식사 준비를 하죠. 숙소 근처의 마트 야채 코너는 제가 접수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남편의 직업을 이해하고, 마음 편하게 해줘요.
애교도 있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웃음)
옆에선 본 가연 씨는 따뜻한 사람이다. 대중이 느끼는 '센' 이미지에 대한 생각은? 주변 사람들만 제 진심을 알아주면 돼죠. 모르는 사람까지 어떻게 다 신경 써요. 어릴 때 전 '철딱서니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러다가 지켜야 할 가족이 생기니 드세졌어요. 남편은 타고나길 유순한 사람이라 싸움 자체를 안 해요. 악역은 제가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저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버틸 만해요. 막둥이까지 생기니 더 힘이 나요. 못 할 게 없어요, 저는.
김가연 관련 기사를 보면 댓글이 없다. 이른바 '인터넷 청정 구역'이라는 재미있는 말도 있다. 재미로 '살짝' 놀리는 거 아닐까요?(웃음) 하지만 원색적인 비난이 아닌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제가 임신했을 때 우연히 본 댓글 중에 "기형아나 낳아라!"라는 말이 있었어요. 가뜩이나 예민한 상황이었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요. 미숙아로 태어나 기형아 검사를 앞두고는 일주일 간 잠도 안 올 정도로 신경이 예민했거든요. 지금도 그 댓글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져요.
녹록지 않은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어떤가? 첫 결혼에 실패했을 때, 두 번째 결혼은 없다고 다짐했어요.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안 하겠다고. 하지만 챙겨주고 싶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 결혼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사랑을 줄 때 행복해요. 나니까 남편에게 해줄 수 있는, 그 감정과 느낌이 좋아요. 제게 남편은 자식보다 우선이에요. 지금은 잠시 막둥이 하령이가 최우선이죠. 엄마 손이 꼭 필요한 때니까요. 아이가 좀 크면 다시 남편으로 원상 복귀할 겁니다.
전에 없이 편안해 보인다. 그럼에도 고민이 있나? 남편의 직업상 외국에 나갈 일이 많고, 미국에선 일 년 내내 경기가 열려요. 미국에서 몇 년간 지내다 올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제 특기를 살려 그곳에서 한국 식당을 열어도 되잖아요.
20살 터울의 딸들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로 자라주길 바라나? 혼자였다면 외로웠을 거예요. 동생과 언니가 있어 마음이 놓여요. 큰딸이 마흔 살이 되면 둘째가 스무 살이에요. 아직은 어리지만 그때는 서로 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나이 많은 엄마라 이런저런 걱정이 앞서요.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눈물이 나오죠. "엄마가 없어도 네가 하령이를 잘 보살펴야 해." "엄마가 없어도 아빠가 너를 잘 보살펴줄 거야." 큰딸에게 늘 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늙어간다. 평범해서 행복하다. 삶이란,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