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40대 중반 여성입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갔었고, 지금은 혼자입니다. 아이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고, 시댁에서 저와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아 아이의 소식도 모르는 채 지냅니다. 이혼의 아픔과 엄마로서의 상처 때문에 그동안 일에 매진했습니다. 성공도 했고, 삶도 화려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셀렙들과 어울렸고, 비싼 술집에도 다녔습니다. 스스로를 위한 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이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학했나 봅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잡고 일에 매진하고…. 그러다가 최근 다시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돈이면 남자도, 친구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저는 경험으로 잘 압니다. 하지만 밀려드는 외로움은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그런 시간의 반복입니다. 이런 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이 방황의 끝은 무엇일까요?
A 장근영 아, 질문자님은 이미 답을 다 내놓으셨습니다. 그 답은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해서 도출된 것이기도 하지요. 질문자님이 도달한 그 모든 결론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질문자님이 내놓은 답은 지금 여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혼자 남아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질문자님과 같은 경험을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누구에게나 삶은 힘이 듭니다.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꾸역꾸역 채워가며 살아가는 건 귀하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우리는 더 현명해지지 않습니다. 늙는다고 해서 멘탈이 더 강해지거나 더 겁이 없어지지도 않더군요. 우리는 원래 약한 존재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욱 약해집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을수록 삶은 두려워지고, 그 삶의 끝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두려움을 배가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인간이 대단한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냅니다. 그 의미는 허상이 아닙니다. 타인과 공유하고 서로를 신뢰함으로써 뚜렷해지는 진짜 의미입니다. 삶의 의미를 바탕으로 행복을 누리기도 합니다. 비록 가끔 찾아오는 행복과 평안일지라도 바로 그렇게 귀하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누립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백영옥 삶의 무의미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혼한 후, 아이를 만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일과 술, 남자 사이를 진자 운동하듯 왔다 갔다 한 것 같네요. 그것이 일종의 패턴으로 고착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이 사연에서 가장 문제로 보이는 건 일단 술입니다. 술은 그 모든 불행의 시작일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볼게요.
행복학에서 가장 유명한 연구 중에 75년간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들을 추적 조사한 '그랜트 연구'라는 게 있습니다. 이 연구는 알코올리즘(알코올중독)에 대한 가장 긴 연구 중 하나인데요, 이 연구에서는 유일하게 '알코올리즘'이 행복한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라는 걸 증명합니다. 건강뿐만 아니라 행복한 결혼 생활, 노년 생활의 행복 여부 역시 알코올리즘에 크게 좌우된다는 걸 사례를 통해 입증하고 있어요.
지금 사연 주신 분이 삶의 무의미와 불행에 대처하기 위해 쓰는 방어기제는 대부분 술과 남자예요. 그걸 '돈'으로 사든 '무엇'으로 얻든 중요한 건 이 방어기제가 본인 삶을 더 멍들게 하고 있다는 거죠. 삶의 의미를 되찾고 싶다면, 성숙한 방어기제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것의 예로 승화, 유머, 이타주의, 억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방어기제가 성숙하면 회복 탄력성도 좋아져요. 사실 그 사람이 쓰는 특유의 방어기제가 성숙할수록 삶도 다양한 의미로 가득해집니다. 당연히 '돈'이 아니라 '의미' 때문에 주위에 사람들이 모일 거고요. 자신의 불행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예술가, 어린 시절 성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같은 일을 겪은 아이들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환원시킨 사회 운동가도, 자기 실패를 자학 유머로 발전시킨 코미디언도 불행을 '의미'로 승화시킨 사람들이겠죠.
사람은 변하고 성장하는 존재예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특징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자신이 불행한 이유를 이혼이나 아이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진 않았으면 해요. 불행의 이유를 그곳에서 찾다 보면 자기 연민만 깊어져요. 자기 연민은 회귀적인 성격이 강해서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자꾸 주저앉혀요. 일단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게 중요해요. 술, 남자, 연애 모든 걸 제외한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 말이죠. 산책과 명상 호흡도 추천합니다.
Q 30대 후반의 싱글녀입니다. 넉넉한 집안에서 성장했고 디자인 관련 전문직이라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한 상태입니다. 문제는 '오늘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하다'는 생각에 그간 돈을 모으거나 계획적으로 지내진 않았는데, 마흔을 앞둔 지금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주고 싶다는 겁니다. 누군가는 대책 없다고도 하겠지만(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많이 지쳐 있는 것 같습니다. 제도권에서 벗어나 조금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과, 막연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앞섭니다. 부모님이 아시면 당연히 걱정스러울 테지만 앞뒤 재지 않고 제 인생 처음으로 스스로를 어루만지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어느 것 하나 정해지지 않은 제 인생. 그래서 훌쩍 떠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더 불안하다는 마음도 동시에 듭니다. 늦은 나이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A 장근영 요약하자면 질문자님은 넉넉한 집안에서 성장했고, 지금껏 욜로(YOLO)의 철학으로 삶을 누려왔습니다. 즉 질문자님은 지금까지도 남들에 비해서는 더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에게 안식년을 주고 싶을 정도로 지쳤습니다. 이런 욕구를 느끼는 자신을 대책 없고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질문자님의 욕구는 30대 후반이라는 시점에 스스로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들여다본 결과이기도 합니다. 질문자님에게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연애도 하고, 자신이 선택한 진로에서도 그 나름 단단한 성취도 이뤘으며, 직장에서도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할 정도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여성학자 게일 시이에 따르면, 20대 후반의 주요 과제는 부모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자리를 찾아 뿌리를 내리는 겁니다. 그 과정은 아무리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하더라도 불안과 긴장, 좌절과 극복으로 점철된 투쟁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일단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나면 정말로 삶에 안정이 찾아옵니다. 질문자님처럼 내 직장도 생기고, 전문 영역도 생기는 거죠.
문제는 이렇게 안정기가 됐을 때 우리는 거기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과,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가 싶은 막연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낀다는 겁니다. 마치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날 때쯤 느꼈던, 밖에 나가면 힘들지만 자유롭고, 집에 있자니 안심은 되지만 간섭이 귀찮았던 양가감정과 비슷한 갈등이 새로 시작되는 거죠. 게일 시이는 이 시기를 두 번째 사춘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보면 질문자님이 '늦은 나이에 질풍노도'라고 하신 것이 어쩌면 정확한 인식일 겁니다.
이 해석이 맞다면 질문자님은 지금 격렬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식년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삶의 궤적을 바꿔보고 싶은 거죠. 인생의 한 고비를 넘고 나서 더 큰 고비를 스스로 찾아 나서겠다는 겁니다. 질문자님과 같은 상황에서 무엇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게일 시이에 따르면, 지금 인생을 뒤집어 엎지 않고 나중에 크게 후회하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생고생을 하고서 전에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삶을 만나든가. 둘 중에 하나가 될 겁니다. 둘 중 무엇이 더 나은 답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백영옥 쉼 없이 직장 생활을 한 30대 후반이면 지칠 만도 합니다. 번 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정말 많습니다. 취업이 이렇게나 힘든데도 퇴사를 꿈꾸는 사람의 숫자도 엄청나게 많아지고 있어요. 퇴사 학교가 여기저기 번창하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 아니겠어요. 곧 나이 마흔이면 본인의 삶 정도는 스스로 판단해도 됩니다. '부모님이 나를 한심하게 본다'는 건 생각만큼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에요. 엄마나 아빠 딸로 일평생 사는 게 아니잖아요? 평생 어느 직장 부장, 차장으로 살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스스로의 선택이니 뒷감당도 본인이 하는 겁니다. 전 개인적으로 선택의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걸 감당하는 일이다." 불안감은 본인 선택의 디폴트 값이에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불안감'은 우리 삶의 기본적인 디폴트 값입니다. 직장 다닌다고 불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직장 다니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받다 보면 아마 이런 불안감이 차 오르겠죠. '이러다가 진짜 나는 사라지는 게 아닐까. 내 본성이 이 회사 때문에 너무 많이 훼손되는 건 아닌가! 이 회사에 있다가 영영 다른 기회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경제적·정신적으로 독립했다고 판단했으면 그게 맞는 겁니다. 어차피 인생이 계획대로 살아지는 거 아니에요. 다만 막연하게 쉬고 싶어 '회피'하고 싶은 건 아닌지는 체크해봐야 해요. 노는 것과 쉬는 건 다른 거예요. 쉬는 건 어떤 의미에서 좀 더 적극적인 자기 모색일 수도 있어요. 막연하게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싫어서 유학을 떠났다가 후회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적극적 모색 없인 많은 것이 '도피'가 돼버려요. 도피성 유학도 그런 예겠죠. 지금 하는 일이 막연히 '괴롭다, 피곤하다'가 아니라 자신이 지금쯤 쉬어야 할 이유를 찾아보는 것도 이런 사태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장근영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심리학자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한다. 아내, 고양이 세 마리와 동거 중.
저서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 심리학>.
백영옥
패션지 피처 에디터로 일하던 중 소설가가 되고자 과감히 퇴사 감행.
2006년 소설가로 등단 후 글 노동자라 자처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 <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 <소울 푸드> <다이어트의 여왕> <스타일>.
고민이나 사연은 deuxism100@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사연이 선정되신 분들께는 '비타플렉스 포 우먼(2만5천원 상당)'를 선물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