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은 지난 2년 동안 드라마 <두번째 스무살>과 <공항 가는 길> 그리고 농구 예능 <버저비터>를 찍고 또 연인과의 결별을 겪으면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보다 ‘어떤 배우가 되느냐’에 집중하게 됐다고 했다. 나이라는 물리적 숫자는 마흔에 더욱 가까워졌지만 연기에 대한 ‘용기’나 ‘열정’은 더 에너제틱해진 느낌이랄까?
드라마 <귓속말> 종영 다음 날 이상윤을 만났다. 화보나 광고 촬영은 간간이 해왔지만 기자와의 인터뷰는 2년 만이다.
“오랜만에 인터뷰하려니까 어색하고 긴장되네요. 근황요? 드라마 찍느라 하지 못했던 농구도 하고, 하루 종일 집에 늘어져 있기도 하고, 못 만났던 친구들도 만나면서 지난해부터 이어져오던 긴장감을 털어내려고 노력 중이에요.”
<귓속말>은 호평 속에 마무리됐다. 이상윤과 이보영의 만남으로 화제가 됐고 거대 권력의 검은손을 응징하는 이상윤의 모습은 통쾌한 한방을 선사했다.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지만 정작 이상윤은 현재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라고 고백했다. 활기차 보이던 2년 전과는 달리 조금은 위축돼 보였다. 스스로 올해의 가장 큰 화두는 ‘자아 찾기’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작년부터 왠지 저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저를 찾는 게 시급해요. 지난해 <공항 가는 길>을 찍으면서 많이 힘들었나 봐요. 잘하고 싶었는데 대본의 느낌을 반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자책하는 시간이 길었죠.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였어요. 생각만큼 안 되니까 자꾸 신경질이 나는 거예요. 제가 한없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인지 점점 더 연기에 대한 욕심이 커지네요. 마음 다스리는 법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이런 이상윤이 어색했다. 2년전 “팬이라서 궁금한 게 많다”는 기자에게 “앞으로도 계속 팬으로 남아달라”고 말하던, 자신감 충만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라이어 게임> <두번째 스무살> 때까지만 해도 마냥 재미있게 연기했죠.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캐릭터였고, 촬영 현장 분위기도 되게 좋았어요. 무엇보다 ‘넌 반항적인 이미지는 안 어울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깰 수 있어서 통쾌했어요. ‘거봐! 나도 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꺼림칙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아마 <공항 가는 길> 때부터인 것 같아요. 제 맘에 쏙 드는 연기가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큰 사랑을 받았거든요.”
그의 고민의 해답을 찾기 위해 드라마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상윤은 <귓속말>에서 악마의 귓속말에 흔들려 자기 합리화를 하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마는 ‘이동준’을 연기했다. 하지만 선의의 피해자인 ‘신영주(이보영 분)’를 만난 후 결국 자신을 내던지며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캐릭터다.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이번 작품 역시 100% 만족스럽지는 않은 작품이에요.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렀고 풍부한 감정 연기도 힘들었죠. 최선을 다했지만 연기적으로 답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드라마 후반부에 몸무게를 쟀는데 4kg 정도가 빠졌더라고요. 나중에는 살 빠진 제 모습도 신경 쓰여 일부러 많이 먹으려고 했네요. 모든 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하려고 했어요.”
끊임없이 궁지에 몰리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캐릭터. 숨통이 트일 만하면 어느새 다시 조여오는 통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촬영장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던 적도 있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캐릭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어요. 보통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 배우들과 수다를 떨면서 스트레스를 푸는데 이번엔 그것조차 버겁게 느껴졌죠. 어느 날 아침에는 제 표정이 너무 안 좋았나 봐요. (이)보영 누나가 지나가면서 어깨를 툭툭 치더라고요. ‘힘내~’ 하면서요. 특유의 따뜻한 목소리와 눈빛이 큰 위로가 됐어요. 덕분에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마칠 수 있었네요.”
<귓속말>의 ‘이동준’은 이제까지 이상윤이 보여준 착실하고 다정다감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이보영, 박세영과의 멜로 역시 이전에 보여줬던 ‘키다리 아저씨’ 느낌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시청자의 반응은 엇갈렸다. ‘신선했다’는 평가와 ‘안 어울린다’는 평가. 상반된 반응이 흥미롭긴 했지만 결코 유쾌하진 않았다.
“이전에는 가볍고 따스하기만 한 캐릭터를 맡았다면, 이번엔 좀 더 날카롭고 무게감이 있었어요. 더 강한 남자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연기력이 부족했는지 잘 안 되더라고요. ‘이상하다’고 욕도 많이 먹었죠.(웃음) 스스로 변론을 해보자면, 기존 ‘멜로남’ ‘로맨틱 가이’ ‘교회 오빠’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여태까지 강한 이미지를 보여준 적이 없으니 시청자들이 못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니까 이번에 제대로 한번 보여주자 싶었죠. 향후 작품을 선택할 때 선택의 폭도 더 넓어질 거라 생각했고요.”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생애 첫 베드신이 대표적이었다. 도전 앞에서 주춤거리지 않는 배우가 된 것, 이상윤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보영 누나가 복수를 위해 술 취한 저를 호텔로 유인하는 장면이었어요. 꼭 필요한 베드신이라 큰맘 먹고 찍었죠. 신인 때는 베드신이 자신 없어서 포기한 작품도 있어요. 지금은 베드신도 도전해볼 만큼 작품 앞에서 유연해졌어요. 작품이 좋고, 그 작품에 꼭 필요한 장면이라면 피하지 않을 거예요.”
알고 보면 ‘허당’이랍니다.(웃음) 좋아하는 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지인들은 ‘사람들이 너한테 속고 있다’고 말해요.”
데뷔 11년 차. 잠시 쉬어 갈 법도 한데 자꾸 채찍질한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보내는 것,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 이상윤만의 성공 노하우다.
“저는 연기 전공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더 목말라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 한 선배님이 ‘어느 순간 연기 공부가 필요한 시기가 올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시점 같아요. 물론 학문적인 연기 공부가 실제 연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진 않을 수도 있지만, 현장 경험 외에 기초 지식이 쌓이면 또 다른 문이 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든지 다 잘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같은 건 아닐까? 1등을 하는 사람이 그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상윤은 기자의 이 같은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감독님이 ‘상윤 씨는 모든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면서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 넌 사실 정말 못된 놈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뜨끔했죠.(웃음) 그러면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염려도 해주셨어요. 그래서 좀 내려놔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종종 해요.”
이렇듯 이상윤은 자신을 둘러싼 편견을 하나씩 깨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겠단다. 자세를 고쳐 앉은 이상윤이 마치 속삭이듯 말했다.
“지적인 이미지…. 물론 제가 가진 장점 중 하나예요. 남들은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부분 중 하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이미지를 깨고 싶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어요. 제가 언제나, 무조건 똑똑하진 않거든요. 알고 보면 저… ‘허당’이랍니다.(웃음) 좋아하는 일, 그러니까 연기나 농구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죠. 친한 지인들은 ‘사람들이 너한테 속고 있다’고 말해요. 극 중 지적인 이미지 때문에 실제의 저를 모르는 거라고요.(웃음)”
그가 말을 이어갔다. 날것 그대로의 이상윤은 어떤 모습일까?
“이기적인 면모도 있어요. 저는 배려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 결국 배려가 아니었던 경우가 많았죠. 이를테면 농구 시합 후 뒤풀이 장소를 정할 때 저는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해 ‘이곳으로 가자~’고 하면 사람들은 ‘결국 네 맘대로 가는 거지’ 하는 식이에요.(웃음) 술 마실 땐 분위기를 잘 타는 스타일이에요. 계속 들떠서 무한정 마셔요. 그러다가 구석에 쓰러져 잠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네요.(웃음)”
이쯤에서 꼭 물어봐야 할 질문이 있었다. 대중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지. 교과서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어쨌든 대중에게 저는 연기자잖아요. 그래서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재밌게 이끌어갈 수 있는 배우로 보였으면 좋겠어요. ‘이상윤이 나오면 볼 만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 그만큼 작품이나 캐릭터를 아끼고 사랑하는 배우로 인식되는 게 배우이자 인간 이상윤으로서의 목표입니다.”
진지한 말투 속에 특유의 유머가 들어 있다. 이를테면 “학문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연기 전공자인 권율 씨는 권하지 않더라” 하는 식이다. 툭툭 던지는 농담에 위기가 금세 반전되곤 했다. 이참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보라고 권했다. 똑 부러진 느낌의 예능 감각이 또 다른 이상윤을 만들어줄지도 모르지 않는가. 한참을 듣고 있던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당분간 예능 프로그램에는 출연하지 않을 계획이에요. 보시는 분들이 재미없을 게 분명하거든요. 농구하는 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버저비터>에 출연했는데, 역시 예능의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이다 보니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죠. <문제적 남자>에 출연해보라는 권유도 있는데 제가 문제를 풀어도, 못 풀어도 재미없을 거예요.(웃음) 다음엔 너무 무겁지 않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공항 가는 길>과 <귓속말>이 정적이었으니까 이번엔 유쾌하고 발랄한 느낌의 작품을 하고 싶네요. 편한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가 좋을 것 같아요. 로맨틱 코미디도 좋고요.”
뜬금없이 드는 궁금증 하나. 이미 가지고 있는 스펙으로 더 나은 삶, 더 쉬운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무모할 수도 있었던 배우의 길을 걷는 그에게 대체 연기가 왜 좋으냐고 물었다.
“연기자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이 참 좋아요. 사람들과 깊이 교류하고 작품이 끝나면 오롯이 제 시간을 갖는 이런 리듬도 좋죠. 물론 공개적으로 평가를 받는 일이 아직도 가끔은 힘들지만, 일반 직장인이 얻는 성과보다 훨씬 많은 걸 얻는 부분도 분명 있어요. 언젠가 주인공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도 오겠지만 두렵진 않아요. 이 일이 좋으니까요.”
열아홉 번째 필모그래피를 만든 이상윤은 당분간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온전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며 ‘진짜’ 이상윤을 만나볼 생각이다.
“그동안 드라마를 잘 안 봤어요. 혼자 있는 시간만큼은 이 세계와 멀어지고 싶어서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었죠. 그런데 그 방법도 잘못됐다는 걸 알았어요. 작품을 끝내면 아예 다른 쪽으로 에너지를 쏟다 보니 제가 소모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계속 비우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어요. 늘 채워 넣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번엔 저를 채울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찾아보려 해요. 드라마나 공연도 의식적으로 더 찾아보고 상대적으로 농구를 하는 횟수는 줄이려고요. 연기 수업도 받고, 여행도 다닐 거예요.”
7월엔 오랜 친구와 뉴질랜드로 떠난다. 들뜬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다.
“훌쩍 떠나고 싶어서 알아보다가 뉴질랜드로 정했어요. 구체적인 목적지는 정해두지 않았어요.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돌아다닐 계획이에요. 뭐 어떻게든 되겠죠.(웃음)”
이상윤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욱 풍성해질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