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촬영은 어땠나요? 재미있었어요. 밤을 꼬박 새가며 5백 벌의 옷을 갈아입었던 옛날 생각도 나고요. 그땐 스케줄이 너무 많아 기계적으로 일했는데, 요즘엔 신인의 자세로 임하고 있죠. 드라마 <귓속말> 촬영장에서도 저는 거의 신인이나 다름없어요. 덕분에 활력도 생기고 좋습니다.
전성기 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열여덟 살에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이 단체로 미스 롯데에 지원했어요. 거기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1위를 하면서 연예계에 입문했죠. 연기가 뭔지, 배우가 뭔지도 모른 채 끌려 다니다시피 활동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을 어떻게 다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바빴거든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촬영하니까 ‘이렇게 내 청춘이 다 가는구나’ 싶어 속상했죠.
어떤 여배우였나요? 예쁜 외모는 아니었어요. 그냥 여기저기에 잘 묻히는 얼굴이었던 것 같아요. 연기도 그렇게 잘한 것 같지 않고…. 스스로 배우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죠.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 것 같아’ 하면서 연기했던 것 같아요. 대신 누구보다 성실했어요. 무슨 역할이든 열심히 했고, 끝까지 해냈어요. 그러면서 내공이, 구력이 생긴 것 같아요.
트로이카라는 수식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동시대에 활동한 여배우는 이미숙 씨, 차화연 씨, 최명길 씨 등이 있죠. 그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영광이에요.
그렇게 전성기를 보내던 중 훌쩍 미국으로 떠났어요.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남편과도 종종 “우리가 그때 왜 그렇게 떠나왔을까” 하고 이야기하곤 해요. 정확한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면 답하기 어렵지만, 그때 시아버지와 친정엄마가 동시에 돌아가셨어요. 연예계에 피로를 느끼던 시기에 연달아 힘든 일을 겪으니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더라고요. 남편의 미국 유학 시절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몇 년 살아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가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네요. 일에 대한 미련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동안 충분히 일했다고 생각했거든요. 대신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죠. 거의 은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돌아올 생각도 전혀 없었어요.
미국에서는 온전히 가정주부였다고 들었어요. 육아에 집중했어요. 세 아이를 차례로 학교에 보내고, 살림하고, 남편 챙기고. 미니시리즈 한 편 찍는 것보다 바쁜 일상이었죠. 한국에선 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엄마의 부재를 느끼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그 한을 미국에서 다 풀었어요.(웃음) 남편과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삶도 좋았죠. 남편은 현재 목회자의 길을 준비 중이에요. 9월에는 목사 안수를 받을 예정이죠.
여배우로 살다가 평범한 주부로 산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그것도 미국에서. 미련 없이 떠난 거라 달라진 환경에 대해선 불만이 없었어요. 언어가 제일 힘들었죠. 처음엔 조금 지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웃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한국말을 잊지 않으려고 했어요. 특히 여섯 살이던 막내아들이 한국말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집에서만큼은 무조건 한국말로 대화하려고 했죠.
블랙 롱 슈트 더데무.
큰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죠? 미국 뮤지엄에서 일하는 큰딸이 6월 3일에 시집가요. 아직까지도 ‘내 딸이 결혼을 한다고?’ 싶은 마음에 실감이 안 나죠. 예비 사위요? 너무 사랑스러운 친구예요. 오늘 아침에도 화상 통화를 하면서 ‘고맙다’고 말해줬어요.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는 친구거든요. 딸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꿈꾸던 평범한 가정생활을 이뤘는데, 다시 돌아오는 것 또한 결단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MBC <가화만사성> 이동윤 PD에게 출연을 제안받고 고민하는데 남편이 “느낌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돌아오지 못하면 영영 연기를 못하겠구나 싶은 마음에 용기를 냈어요. 아이들도 “한번 해보라”고 응원해줬고요. “엄마 되게 유명한 사람이야”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만 듣고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 없는 아이들이 일하는 제 모습을 궁금해하는 것도 자극이 됐죠. 드라마 속 제 모습을 자랑스러워해요. 오늘도 화보 촬영한다고 하니까 잘하라고 응원해줬어요. 아마 지금도 사진 속 제 모습을 엄청 궁금해하고 있을 거예요.
돌아와보니 어떤가요? 어렸을 땐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요즘엔 너무 재미있어요. 제 안에 열정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요. 새록새록 열정이 샘솟는 걸 느끼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예전에 저를 사랑해주셨던 분들이 “왜 이제야 왔느냐?”고 물으면서 반가워해주실 땐 가족을 만난 기분이에요. 요즘 후배들도 너무 예뻐요. 경력이나 나이는 제가 선배지만, 오히려 후배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지금은 청평에서 전원생활 중이라고 들었어요. 미국에 오래 있다 보니 서울의 고층 빌딩이 답답하고 삭막하더라고요. 어디에서 지내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청평에서 살기로 했죠. 공기 좋은 자연 속에서 즐겁고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멀어서 출퇴근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좋아요.
앞으론 활발한 활동을 기대해도 될까요? 역할이 크든 작든 할 수만 있다면 계속 활동하고 싶어요. 내일모레 예순 살인데도 뭐든 다시 도전하고 싶죠. 그리고 이런 저의 도전이 다른 주부들에게도 자극이 됐으면 하고요.
어떻게 나이 들고 싶나요? 자연스럽게 늙고 싶어요. 그래서 전 제 얼굴의 주름이 좋아요. 오히려 분위기 있지 않나요?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아줌마’가 되고 싶어요. 내가 자랑스러워진다거나 대단해지는 것보다 젊은이들과 사이좋은, 깨어 있는 ‘노인’이 되려고요.